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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최고로 잘한 일 (37/88)

37. 최고로 잘한 일

느낌이 영 좋지 않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덕규의 옆으로 20대의 여자가 예쁘게 포장한 선물처럼 그럴듯하게 앉아 있었다.

잠시 멈춰서 덕규와 여자를 번갈아 쳐다본 도훈은 대강의 상황 파악을 끝냈다.

이목구비가 굵직굵직한 덕규와는 영 딴판인 곱상한 얼굴이었지만, 기민하게 반짝이는 여자의 눈만은 영락없는 박덕규였다.

“손님이 계셨네요. 보고는 손님 가신 뒤에 하겠습니다. 연락 주십시오.”

“아, 아닐세. 손님은 무슨. 여기는 내 딸이야. 예술 한답시고 LA에 나가 있다가 오늘 들어왔거든. 얼굴이나 보게 잠깐 들르라고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앉게.”

역시나 딸이 맞았다. 도훈은 바로 돌아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여자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인사나 나누는 게 어떤가.”

“안녕하세요? 박인희예요.”

인희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차도훈입니다.”

“알고 있어요. 요즘 가장 핫하신 분인걸요.”

도훈은 고개만 까딱했을 뿐 인희의 손을 잡지 않았다.

인희는 개의치 않는 듯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곤 손을 내렸다.

“그리고 아빠, 소개 좀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잘난 딸 칭찬은 못 해줄망정 꼭 말을 그런 식으로 하더라.”

인희가 밉지 않게 얼굴을 찡그리며 덕규에게 투덜댔다.

“허허, 녀석하고는. 딸 하나라고 오냐오냐 키웠더니 지가 세상 제일인 줄 알지 뭔가. 허허허.”

덕규의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세상 뻣뻣한 놈, 이쯤 대충 장단 좀 맞춰주면 좋으련만, 꼿꼿하게 앉은 도훈은 눈빛마저 곱지 않았다.

그런 그의 앞에서 딸에 대해 늘어놓느니 벽에 대고 떠들어대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목적한 바를 이루려면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 했다.

“하기는, 얘가 매사에 똑 부러지는 데다 허튼짓 한 번 한 적이 없어서 당최 혼낼 일이 없다 보니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지 뭔가. 허허허.”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도 이 정도 읊어대면 빈말이라도 칭찬을 늘어놓기 마련이었다.

“그렇군요.”

그렇지, 도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눈치는 세상 빠른 놈이니 벌써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적당히 인희의 매력을 어필해 약간의 관심만 이끌어내면 될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훈육하는 게 좋죠.”

“무, 뭐? 훈유, 아니,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에 기가 막혀서 말까지 더듬는 덕규를 도훈은 참 담백한 눈길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리어 민망해진 덕규가 괜한 헛기침을 뱉어냈다.

똑 부러진다더니 빈말은 아닌 듯, 도도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인희의 볼도 슬그머니 붉어지고 있었다.

“흠흠, 그렇지, 때론 엄한 훈육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

“아빠?”

금세 민망한 기색을 숨긴 덕규가 소파에 기대며 느긋하게 말을 꺼내놓자 인희가 정색을 하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완전히 여유로움을 되찾은 덕규는 파르르한 인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도훈에게 꽂힌 칼 같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지금이야 욕심이 지나쳐 제 살을 깎아 먹고 있을망정, 태성을 대기업 반열에 올린 일등공신으로서의 그를 되짚어보게끔 하는 노련함이었다.

“그래서 우리 인희 본사 홍보팀에서 일 좀 시켜볼까 하네.”

“채용 일정이 잡혔다는 보고는 받지 못한 것 같은데요.”

건방진 놈, 끝까지.

“특별채용이라는 방식도 있고, 일정이야 잡기 나름 아니겠나?”

“글쎄요, 특별채용이란 게 적절한 전문 인력을 충원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맞는 건데, 간혹 질 떨어지는 낙하산을 양산하는 용도로 이용되기도 하니까요.”

“차 사장, 말이 지나치군.”

“저는 일반적인 사항에 대해 말씀드린 것뿐인데, 기분 상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도훈이 전혀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두 사람의 신경전을 바라보고 있던 인희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요염하게 다리를 꼬았다.

무릎 위로 올라간 스커트 라인 아래로 드러난 각선미가 아찔할 정도로 미끈했다.

“그러니까, 차 사장님 눈엔 내가 질 떨어지는 낙하산으로 보인다는 소리네요. 그렇죠?”

“좀 전에도 말했지만, 일반적인 사항에 대해…….”

“뭐, 이해해요. 외모가 이렇게 완벽하니 속은 텅텅 비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나, UCLA에서 디자인 미디어아트 전공했어요. 한 달 전에는 LA에서 열리는 전시회에도 참여했고요. 이 정도면 꽤 고급 낙하산 아닌가요?”

머리를 뒤로 넘기며 윙크를 하는 인희의 자태는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뿌듯함으로 그녀의 어깨는 살짝 치솟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도훈의 표정은 무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급이든 저질이든 낙하산인 건 같군요.”

딸에게 흐뭇한 눈길을 보내고 있던 덕규의 손이 소파 팔걸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이 회장이 싸고돌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놈은 이제 그를 잡아먹고도 남을 만큼 성장해서 발톱을 숨길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성질 같아선 정말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모든 게 불확실한 이런 시기에 도훈의 적개심을 더 북돋워봐야 좋을 게 없었다.

솔직히 무섭도록 성장한 도훈에게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게다가 백수안이라는 백그라운드까지 업고 있으니 놈은 천하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이란 많지 않았다.

차도훈이 그에게 좀 더 호의적이 되도록 회유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백수안과의 균열을 만들어내거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하나뿐인 딸을 이런 자리에 끌어들이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손쓸 수 없는 순간까지 내몰리지 않으려면 뭐든 해봐야 했다.

“허허, 이 사람 참, 사람을 놀리는 고약한 취미가 있구먼그래. 허허허.”

다시 한번 덕규의 공허한 웃음소리가 회장실을 채웠다.

인희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지만, 섣불리 나서지는 않았다.

자신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인희는 프라이드와 현명함을 고루 갖춘 아이였다.

물려받은 재력만 믿고 나대는 백수안과는 차원이 다른 아이였다.

인희가 잘만 해준다면 차도훈과 백수안 사이에 균열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이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차 사장,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대면보고는 생략하는 게 어떤가?”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속이 빤히 보였지만, 대면보고를 요구한 쪽에서 생략하자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도훈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덕규가 경쾌한 소리가 나도록 손을 짝 부딪쳤다.

“자, 그럼, 저녁 식사나 함께하도록 하지.”

“죄송하지만, 저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이 사람 참, 자네가 하루 정도 일찍 퇴근한다고 해서 태성이 어떻게 되진 않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한결 가볍네요.”

“그래, 그래. 자네도 뉴욕에 오래 있었으니 인희랑 통하는 부분도 있을 테고, 식사하면서 천천히…….”

“아니요, 식사는 두 분이서 하셔야겠습니다. 저는 아내와 데이트가 있어서요. 일찍 퇴근하려니까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회장님 덕분에 마음의 짐도 덜었습니다. 두 분, 부디 즐거운 식사 시간 되십시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 좋게 올라가 있던 덕규의 입꼬리가 불만스럽게 내려앉았다.

“이봐, 차 사장, 자네 지금 실수하는 거야.”

“실수라니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도훈의 눈이 덕규를 똑바로 직시했다.

“지금이야 백수안이 어리니까 고분고분 자네 말을 듣고 있는지 몰라도, 사람 마음 변하는 거 한순간이라네. 그러니 자네도 미리미리 살길을 모색해야 되지 않겠나, 이 말일세.”

“회장님께서 제 앞날까지 걱정하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우리야 어차피 태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 아닌가.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지.”

“그래서 제가 살길을 모색하려면 지금 뭘 해야 하는 겁니까?”

도훈의 순순한 반응에 고무된 덕규는 비릿한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홍보팀에서 그럴듯한 스토리를 꾸며내긴 했지만, 차도훈과 백수안이 정략적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린애 손에 맡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운명이 불안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이렇게 빌미를 제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그 얘기를 해보자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는 거 아닌가. 하하하.”

“그 얘기란 게 혹시 따님과 관련된 겁니까?”

도훈의 시선이 여전히 과하게 포장한 선물처럼 앉아 있는 인희에게로 잠깐 흘렀다가 다시 덕규를 향했다.

“뭐, 겸사겸사 할 만한 얘기가 많지 않겠나.”

“하나뿐이라 귀하게 키우셨다더니,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미혼인 따님을 유부남과 엮으려는 거 보면 말입니다.”

비꼬듯 던진 말에 덕규는 여전히 느긋했고,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인희의 눈엔 날이 섰다.

부녀간에 어떤 말이 오간 건지, 인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 듯했다.

“설마, 백수안과의 결혼이 진짜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감히 누구한테까지 수작이냐며 덕규가 턱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무감했던 도훈의 얼굴에 미소가 슬쩍 드리워졌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 미소 한 스푼까지 보태지자, 말 그대로 금상첨화였다.

날을 세우고 있던 인희마저 넋을 잃고 쳐다볼 정도니 말해 무엇 할까.

“제가 한 것 중 최고로 잘한 일인데, 가짜면 곤란하죠. 그래서 저녁 식사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뿐인 귀한 아내가 마음 상하는 건 못 보겠거든요.”

어이없어하거나, 넋이 나갔거나, 어느 쪽이건 정상이 아닌 것 같은 둘을 내버려 둔 채 도훈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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