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태경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마음도 빼앗겨 버렸다.
“음료수 마실래?”
복도를 걸어오는 잠깐 사이 어느 정도 화를 가라앉힌 건지 태경은 느릿느릿 다가선 나미에게 차분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좀 있으면 강의 시작이야. 할 말 있음 빨리 해.”
태경을 향한 말에 날이 섰다. 알아주길 바랐다.
그녀가 지금 화가 났음을, 금요일 밤의 일로 서운해하고 있음을 태경이 알아줬으면 했다.
“왜 그랬어?”
“뭘?”
“후견인이라고 하는 거 같이 들었잖아. 네가 똑바로만 말했어도 백수안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하지만 태경의 관심은 오로지 수안뿐이었다.
나미의 목소리가 다른 때와는 다르다는 걸 제대로 인식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뭐?”
“수안이 문제를 왜 내가 나서서 해명해야 하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수안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한태경 너는 진짜, 네 눈엔 백수안밖에 안 보이지?”
이틀 동안 가슴앓이하느라 까칠해진 내 얼굴은 안중에도 없지.
“수안이한텐 네가 있는데, 굳이 나까지 필요한 것 같진 않네.”
“무슨 말이 그래? 우린 다…….”
“너희들 거기서 뭐 해?”
끊어지기 직전의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공간이 경쾌한 수안의 목소리에 툭 깨져 버렸다.
험악했던 태경의 표정은 조금 누그러졌고, 내내 참고 있던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나미는 울상이었다.
“나미야, 왜 그래?”
환했던 수안의 얼굴이 나미를 보고는 금세 찡그려졌다. 쪼르르 다가오는 걸음걸이는 조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 태경이가 또 약 올렸니?”
다정하게 팔을 쓸어주며 걱정스레 묻는 수안을 바라보며 나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착잡함을 느꼈다.
얘가 조금만 못됐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맘껏 미워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리진 않을 텐데.
오늘은 정말 네가 미운데, 미워할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 심술은 네가 좀 참아줘.
나미가 수안의 손을 밀어냈다. 어리둥절해하는 수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태경이 날 약 올릴 정신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얘 눈에 보이는 건 한 사람뿐이거든.”
비아냥거리는 것 같은 나미의 말에 당황한 수안이 태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태경, 네 그 놀라운 활약상 수안이한테 말해주지 그러니. 어쩌면 감동받아서 너한테 홀딱.”
“유나미!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미의 손목을 잡아챈 태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자고 하면, 할 의향은 있고?”
나미가 콧방귀를 뀌며 잡힌 손목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비난을 쏟아내고 성질을 낼망정 상대방을 상처 입힐 의도가 전혀 없었던 다툼과는 느낌부터 달랐다.
“너희들 진짜 왜 이래? 놀라운 활약상은 뭐고, 내가 감동받을 거란 말은 또 뭐야?”
태경이 한숨을 토해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우, 나미가 나한테 화가 나서 그러는 거니까 넌 신경 쓸 거 없어.”
수안에게 절대로 상처 주지 않으려는 태경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몰랐던 사실도 아니건만, 나미는 추락하는 롤러코스터에 몸을 실은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참 대단하네, 한태경. 이쯤에서 난 자리를 비켜주는 게 낫겠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서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미야, 유나미.”
수안이 안절부절못하며 불러댔지만, 나미는 시선 한 번 주는 일 없이 그녀를 지나쳐 강의실로 향했다.
참담함과 원망이 제멋대로 뒤엉켜 머리며 가슴이며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수안과 태경, 두 사람 다 잃고 싶지 않은 마음과 차라리 혼자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공존했다.
태경을 원망했다가, 수안을 원망했다가, 종내에는 결국 자신의 마음을 비난했다.
빌어먹게도 왜 한태경한테 이런 마음이 되어버린 걸까?
강의가 시작됐지만 나미는 전혀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저만치 떨어져 앉은 선배들도 집중 못 하는 건 마찬가진 듯, 자꾸 수안을 힐끔대며 저희들끼리 톡을 주고받았다.
안타깝게도 태경의 대단한 활약상이 제대로 약발을 발휘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수안인 그런 건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듯, 오로지 나미의 표정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긴, 백수안이 언제는 주변의 숙덕거림에 동요한 적이 있었던가.
장례식이 끝난 뒤 현진을 꼬리처럼 달고 나타나 아이들이 숙덕거릴 때도 수안은 초연하기만 했다.
전부터 수안을 시기하고 있었던 민희가 웃기지도 않다며 대놓고 비아냥거렸을 때조차도 대신 화를 낸 건 나미와 태경이었다.
수안은 도리어 그들을 말리며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고 민희에게 사과까지 했었다.
그럴 때의 수안은 희로애락을 패키지로 모두 겪어버린 듯, 인생 다 산 것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저것보다 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까짓 말로 할퀴어지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편 들어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만 기뻐했다.
수안은 그런 애였다. 매사에 초연하지만 지극히 섬세하고, 무심한 듯 굴지만 넘치도록 정이 많은 그런.
그런 애한테 이것도 참 못 할 짓이었다.
뭘 알기나 하고 그러는 건지, 네가 먼저 사과하라 윽박지르며 태경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는 수안이 때문에 나미는 종일 곤두세웠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눈을 찡끗거리며 날을 세우는 수안과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토해내는 태경을 보고 있던 나미가 결국 씁쓸한 웃음을 뱉어내고 말았다.
“야! 배 안 고프냐?”
수안과 태경은 나미의 눈치를 보며 쫓아다니느라, 나미는 그런 그들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느라 점심까지 걸렀다.
어느덧 6시가 가까워지는 시각.
아직도 쓰린 마음 때문에 배고픈 줄도 몰랐지만, 이쯤 죄 없는 애들 속은 채워줘야겠다는 생각에 불퉁하게 물었다.
“어? 배? 고파. 고프지. 아주 쓰러지시겠다. 그치, 태경아?”
“뭐…….”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충 얼버무리는 태경의 등을 인상을 찌푸리며 툭 친 수안이 그를 강제로 끌어다 나미의 곁에 세웠다.
“우리 완전 근사한 데로 가자. 응?”
매번 분위기 띄우는 건 나미의 몫이었는데, 그녀 대신 수안이 어색한 몸짓으로 태경과 나미 사이의 간격을 좁혀줬다.
그러곤 냉큼 나미의 옆으로 가서 팔짱을 끼고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나미야, 우리 뭐 먹을까?”
생글거리는 수안의 얼굴을 마주하자, 뒤늦은 죄책감이 나미의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수안아.”
하루 종일 아무 잘못도 없는 수안을 괴롭혔던 것에 대해 나미가 사과의 말을 꺼내려던 순간, 여러 명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 앞이 가로막혔다.
수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했던 바로 그 선배들이었다.
종일 나미에게만 신경을 집중했던 터라 태경과 선배들 사이에 있었던 일은 알지도 못했던 수안이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선배들을 쳐다봤다.
“백수안, 오전에 있었던 일 얘들한테 들었지?”
“네?”
“암만 생각해도 그런 기막힌 소리까지 들은 마당에 그냥 넘어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뒷담화가 문제라면 직접 물어봐야지. 안 그러니?”
선배들의 사나운 눈길이 태경에게로 향하자, 수안의 시선도 그리로 옮겨졌다.
“그만하죠. 의문은 확실하게 풀어준 것 같은데요.”
집요한 수안의 시선을 무시한 태경이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아니, 우린 백수안한테 직접 들어…….”
“꺄아! 야, 저, 저, 저기 좀 보, 봐.”
“아우, 지금 얘기 중이잖아. 뭘 자꾸 보, 허억! 차, 차, 차도훈.”
귀에 익은 이름에 수안의 고개가 선배들의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해 획 돌아갔다.
태경과 나미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정말 차도훈이었다.
직접 운전을 하고 온 건지, 정차한 차에서 내린 도훈이 수안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
“안에 손님이 있나 본데,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죠.”
박덕규의 웃음소리가 회장실 문을 뚫고 비서실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비서에게 말을 건네는 도훈의 표정이 슬쩍 굳어졌다.
차기 회장을 결정짓는 주총이 코앞으로 다가온 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임을 알면서도 덕규는 심술이라도 부리려는 것처럼 요 며칠 도훈에게 수시로 대면보고를 요구했다.
대면보고를 받아야 달라질 건 없었다.
도훈이 총괄사장직을 맡은 지 겨우 5개월.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의 팀이나 다름없는 전략기획팀에서 5조 원 가까운 해외 신규 수주를 달성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주주들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눈도장은 없었다.
이로써 박덕규의 임시 회장직은 정말 임시로 끝날 확률이 높아졌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덕규가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때때로 도훈을 불러 염탐하듯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다였다.
덕규를 볼 때마다 도훈은 끝도 없는 인간의 욕심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살아생전 이 회장은 어려운 시기를 함께했던 친우라는 이유만으로 덕규의 비자금 조성과 횡령에 대해 일정 부분 눈감아주었다.
처음엔 아니었겠지만, 시간이 거듭될수록 그는 태성의 발전보다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덕규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릴 만큼 누리고 챙길 만큼 챙겼다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뭐 하나 놓치기 싫어 전전긍긍했다.
양손 가득 움켜쥔 걸 하나라도 빼앗길까 봐 탐욕으로 물든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도훈을 살피곤 했다.
대면보고야 어려울 것 없는데, 덕규의 눈에 깃든 탐욕을 마주해야 하는 건 참 역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닙니다, 사장님. 도착하시면 언제든 바로 모시라는 지시가 있으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른 책상을 돌아 나온 비서가 회장실을 노크하며 도훈이 들었음을 알렸다.
안쪽에서 지나치게 기분 좋은 덕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