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나만 좋았냐고?
숨결이 미친 듯이 거칠어졌다. 물기 어린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워가고 있었다.
이대로 수안을 안고 바로 침실로 향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순간이었다. 아니, 수안은 어쩌면 그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안에게서 입술을 때어낸 도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맞붙였을 때, 그녀는 잠깐 숨을 고르기 위해 멈췄다고 생각했다.
이걸로 끝이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다가 그대로 몸을 일으키는 도훈을 보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배고프네. 마저 먹자.”
황당함에 입을 헤벌린 수안이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는 도훈을 물끄러미 좇았다.
지금 이 상황에 배가 고프다고?
나를 아예 삼켜 버릴 듯 달려들던 사람은 어디 갔나요?
나 혼자만 좋아서 죽을 것 같았던 거야?
아저씨한테는 키스가 무슨 식사 중간에 곁들이는 샴페인이나 와인 같은 건가요?
정말 음식이 목으로 넘어간다고?
아우, 진짜, 나만 좋았냐고?
소리라도 버럭 지르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마치 키스 더 해달라고 조르는 것 같아서 차마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조금 식었다. 뭐 해? 어서 먹어.”
너무도 태연하게 음식의 온도까지 챙기는 도훈을 흘겨보지 않기 위해, 스테이크를 태워 버릴 듯 쏘아보며 포크와 나이프를 사납게 움직였다.
그러느라 포크와 나이프를 든 도훈의 손에 힘줄이 도드라지는 것도, 열기에 휩싸인 눈으로 그녀를 좇다가 질끈 감아버리는 것도 미처 보지 못했다.
화가 난 수안이 접시를 말끔히 비우는 동안, 도훈은 겨우 한 조각의 스테이크를 삼킨 게 다였다.
***
[나미야, 어디야?]
하트를 마구 날리는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도착한 수안의 메시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나미가 그대로 폰을 엎어버렸다.
계속해서 수신 알림음이 울려왔지만, 나미는 들리지 않는 듯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얘, 너 백수안이랑 같이 다니는 애 맞지?”
나미가 강의실로 들어설 때부터 한쪽에 모여 수군거리고 있던 선배들 중 한 명이었다.
알아내고 싶은 게 있는 듯 친절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나미는 짜증부터 확 치밀어 올랐다.
늘 이런 식이었다.
‘너 백수안이랑 친하니?’
‘수안이 어디 있는지 알아?’
‘야, 수안이랑 태경이 사귄다는 게 정말이야?’
수안은 나미와 태경 외에는 어울려 다니는 친구도 없었으며, 앞으로 나서는 일도 없었고,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 일이 잦았다.
수안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데는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성적도 한몫을 했지만, 그보다는 나미가 그랬듯 수안만이 가진 묘한 매력에 사로잡히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항상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라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다가도, 꼭 필요하다 싶을 때는 상당히 대담해지는 이중적인 모습에 아이들뿐 아니라 선생님들도 매료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말만 많지 않을 뿐 상당히 친절했으며, 곤란한 사람을 돕는 일에도 꽤 적극적이었다.
나미도 수안에게 도움을 받은 뒤로 친해졌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 할까.
그런 모든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수안은 다가가기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미가 수안과 친해진 뒤로 그녀에게 수안에 대해 묻는 일이 잦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수안 때문에 자신이 꽤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은근 그녀의 대변인처럼 행동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유나미라는 이름은 흐릿해지고 수안의 친구로만 기억된다는 걸 알아버렸다.
수안 같은 진정한 친구를 얻었는데 그 정도야 뭐,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태경에게도 그렇게 인식된다는 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금요일 밤 술에 취한 나미를 무슨 물건 배달하듯 집에 데려다준 태경이 부리나케 돌아서며 수안에게 전화를 거는 걸 보고 난 뒤로 그녀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주말 내내 가슴앓이를 했다.
그러니 ‘얘’라고 불리며 수안과 같이 다니는 애 취급을 받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분명히 너였는데. 너 맞잖아. 그치?”
“왜 그러는데요?”
“어어, 재호 선배한테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태성그룹의 차도훈 사장이랑 백수안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그게 사실이니?”
뒤에 서 있던 다른 선배가 답답하다는 듯 톡 끼어들었다.
“재호 선배 말은 백 퍼 신뢰할 수 없긴 한데, 다른 애도 백수안 데리러 온 차도훈 사장을 봤다기에 정말인가 궁금해서.”
“글쎄요, 잘은 모르는데 친하긴 한가 보더라고요.”
“거 봐, 내가 뭐랬어. 차도훈이 백수안 안고 가는 거 똑똑히 봤다고 했잖아.”
“어머, 어머, 차도훈 결혼했다고 했는데, 그럼 둘이 불륜인 거야? 백수안 그렇게 생기진 않았는데.”
“원래 얌전하게 생긴 것들이 뒤에서 호박씨 까는 거 몰라? 난 딱 봤을 때부터 걔 별로였다니까. 아주 얌전한 척, 고상한 척 앉아서 남자들이나 꼬드기고.”
한 사람씩 말이 건너갈 때마다 악담의 강도가 세졌다.
이런 경우 나미는 제 일처럼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아니, 처음부터 오해를 살 수 있는 애매한 말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는 지금은 수안을 위한 어떠한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백수안을 대변해 줘야 하는데?
수안이 해달라 말한 적도 없건만, 괜한 심술에 마음이 한정 없이 불퉁댔다.
“근데, 걔는 그 대단한 사람을 어디서 만나서 어떻게 꼬신 걸까?”
“개강파티 때 재호 선배한테 대놓고 웃음 흘리는 거 못 봤어? 그런 애들 하는 짓이야 뻔하지 뭐. 머리에 든 건 없으면서 그런 쪽으로만 뛰어난 애들 있잖아.”
그 와중에도 남의 험담에 신난 선배들은 없는 일까지 진실처럼 꾸며내며 비아냥댔다.
그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거북하게 느껴질 즈음, 책상을 무언가로 내려치는 ‘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선배들 모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나운 표정을 한 태경이 그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 헛소리 좀 작작 하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 우리가 무슨 헛소리를 했다는 거야?”
가장 먼저 나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던 선배가 태경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차도훈 사장님은 백수안 후견인입니다. 그리고 수석 입학한 애랑 남 뒷담화하는 사람들 중에 어느 쪽이 머리에 든 게 없는 걸까요?”
“후, 후견……. 어머, 얘 봐. 그러니까 뭐야, 지금 우리더러 머리에 든 게 없다고 한 거니? 너, 1학년 아니야? 어디 선배들한테 버릇없이.”
“XX, 같잖아도 선배라고 꼬박꼬박 존대하는 거 안 들리세요?”
“어머머, 얘 뭐니? 무슨 이런 또라이 같은 게 다 있니?”
“나한테는 또라이건 뭐건 실컷 지껄여 대도 상관없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잘못도 없는 애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지 말란 말입니다.”
선배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열을 내면서도, 사나운 태경의 기세에 눌려 각자 콧방귀를 뀌거나 혀를 차며 흩어지고 말았다.
“유나미, 나랑 얘기 좀 해.”
여전히 사나운 태경의 목소리가 나미에게로 날아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수안의 편을 드는 태경 때문에 이미 가슴 어느 구석은 갈기갈기 찢겼다.
그런데 여기서 뭘 더 하려고 얘는 이러는 걸까?
“너랑 할 말 없어.”
“내가 있으니까 얼른 따라 나와.”
으르렁거리듯 말을 뱉어낸 태경이 먼저 성큼성큼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나미가 그의 뒤를 따랐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벌써 저만치 가버린 태경은 자판기 옆 후미진 복도 끝 창턱에 기대서 있었다.
‘후’ 뱉어낸 숨결이 그의 앞머리를 들썩 띄웠다가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들이치는 봄볕이 날렵한 이목구비에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부지런히 다가가던 나미는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갈기갈기 찢겨서도 뭐가 좋다고 가슴은 참 주책없이 두근댔다.
언제부터 저 애한테 이런 마음이 되어버린 걸까?
아마 수안이 아니었으면 태경과는 인연이 닿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수안과 친해지려고 하다 보니, 자연히 그녀의 곁에 붙어 있다시피 했던 태경과도 자주 만나게 됐다.
태경의 말에 따르자면, 중3 때까지 그는 콩가루 집안이 양산한 반항기 만렙의 문제아였단다.
고등학교 때도 수안의 곁에 붙어 모범생 흉내를 내고는 있었지만, 반항적인 기질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었다.
본디 쾌활한 성격답게 매사에 직선적인 그녀는 다혈질인 데다 거친 성격의 태경과 늘 말다툼하기 일쑤였다.
태경과 대차게 말다툼을 하고 난 어느 날, 수안에게 저런 애랑 대체 어떻게 친해진 거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안은 쉽게 말을 늘어놓는 스타일이 아니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의 조합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 건 태경이었다.
“맹한 범생이가 담을 넘겠다고 낑낑대기에 도와줬더니, 누가 범생이 아니랄까 봐 은혜 갚겠다고 귀찮게 쫓아다니는 통에 이렇게 됐지 뭐.”
그렇다고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은 건 아니었고, 딱 이 정도.
아리송하기 짝이 없는 말에 답답해서 수안을 다그쳤더니, 그녀는 배시시 웃음부터 물었었다.
“맞아. 나 은혜 갚아야 돼. 태경이가 그때 도와주지 않았으면, 난 지금까지도 지옥에서 살고 있었을 거야. 평생 태경이한테 고마워하며 살 거야.”
수안의 말에 소름 끼친다며 팔뚝을 긁적이면서도, 태경의 입술은 웃음을 참는 듯 삐죽댔었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유대감이 존재하는 둘 사이에 억지로 끼어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수안도 태경도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좋은 친구들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수안을 바라보는 태경의 눈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