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맞추는 건 내가 해
장소도 같고 식탁도 같은데, 아침과는 전혀 다른 상차림에 놀란 수안이 앉지도 못하고 멀뚱거리고만 있었다.
딱 봐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할 것 같은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에는 빛깔 고운 소스마저 예술적으로 뿌려져 있었다.
거기다 조화롭게 색감이 어우러진 샐러드에 먹음직스러운 빵까지, 이건 누가 봐도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그런 자태였다.
식탁이 이 정도 비주얼이면 요리한 사람이라도 엉망진창이었으면 수안이 조금 덜 민망했으련만, 도훈은 아주 제대로 각 잡고 멋있었다.
넥타이가 사라진 셔츠는 여유롭게 풀려 목울대와 쇄골 사이의 섹시한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으며, 소매 아래 드러난 팔뚝은 핏줄이 적당히 불거져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수안은 아침에 자신의 모습이 어땠는지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계란 깬다고 진땀을 뺀 뒤에 간장 양을 맞추느라 손까지 바들바들 떨었던 수안은 숙취가 남은 부스스한 얼굴에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다.
옷차림은 또 어떻고. 오래 입어서 완전 편해진 헐렁한 추리닝 차림이었다.
그놈의 하찮은 간계밥 만든다고 설쳐 댈 게 아니라 꽃단장을 했어야 했다.
심지어 지금 도훈의 허리에 멋들어지게 감겨 있는 앞치마조차 하지 않았었다.
근데 저 앞치마, 이 주방에 있던 게 맞긴 한 거야?
아우, 진짜, 넝마를 둘러도 빛이 날 아저씨 같으니라고.
“왜 그러고 섰어? 어서 앉아.”
“이거 진짜 아저씨가 다 만든 거예요?”
“그럴듯하지?”
“어우, 이건 그럴듯한 정도가 아니죠. 완전 끝내줘요.”
“그 정돈 아니야. 그냥 고기 구운 게 전부니까 너무 띄우지 마.”
허어! 아저씨, 이게 뭔가요. 여기서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겸손을 시전해 주시면, 간 맞춘 거 하나 가지고 온갖 생색을 다 낸 내가 뭐가 되나요.
할 수만 있다면 아침의 기억을 통째로 들어내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암튼, 너무 감동적이지만 다소 민망한 이중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있는 수안에게로 다가온 도훈이 우아한 동작으로 의자를 빼서 그녀가 앉는 걸 도왔다.
생긋 웃고 멀어지는 그를 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은, 이 완벽하기 짝이 없는 남편을 마주하려면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부작용이었다.
“맛은 어떨지 모르겠다. 어서 먹어봐.”
몇 개월 전 라면으로 그녀를 약 올렸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헷갈릴 만큼 매너 좋고 다정한 남편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먹고 죽을 음식을 내놨대도 맛있다고 할 판인데, 입에 들어간 스테이크는 아주 살살 녹았다.
“와우! 이거 완전 사기네.”
스테이크를 삼킨 수안에게서 중얼거리듯 튀어나온 말이었다.
“뭐?”
“사람이 좀 인간적인 맛이 있어야지, 어떻게 부족한 게 없냐고. 유머 코드 안 맞는 거까진 그냥 넘어가 볼랬는데, 너무 완벽한 사람은 쪼옴…….”
수안이 코를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곧 도훈의 입에서 ‘까분다’나 ‘까불지 마라’ 정도의 말이 아주 위엄 있게 흘러나오리라 짐작하며, 큼지막하게 조각낸 스테이크를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이리저리 재볼 시기는 이미 지난 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도훈의 반응에 수안이 멈칫했다.
아무리 유머 코드가 안 맞아도 그렇지, 무슨 예능을 다큐로 받는담.
“재보는 거 아닌데요. 어떻게 맞춰가며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건데요.”
당황한 것도 잠시, 수안은 당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집어낼 수는 없지만, 그녀의 이런 당돌함은 도훈의 앞에서만 망설임 없이 튀어나오곤 했다.
아마 장례를 치른 뒤 실의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도훈이 찬물 세례를 퍼붓는 충격요법을 썼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때 같았으면 분명 겁먹었을 순간에 수안은 화를 내고 눈을 흘기고 소리를 질렀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수안은 그때 이미 도훈에게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주눅 들지 않는 본래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고민할 필요 없어. 맞추는 건 내가 해. 우선은 이것부터.”
똑 떨어지는 정감 없는 목소리와는 달리, 달콤한 내용의 말이 도훈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식탁 위로 조그만 벨벳상자 하나가 놓여졌다.
안에 든 내용물이 뭔지 절대 모를 수 없는 모양과 크기의 상자였다.
“어어, 이건…….”
“결혼반지. 우리 이것부터 하자.”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는 수안을 대신해 도훈이 상자를 열어 다시 앞으로 내밀었다.
과하지 않은 다이아가 링 중앙에 박힌 반지는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것까지 계산하고 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도훈이라면 아마 그것까지 계산하고 샀을 것이다. 반지는 학생인 수안이 끼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인 디자인이었다.
“항상 끼고 다니라고 일부러 과하지 않은 거로 산 거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아뇨. 완전 마음에 들어요.”
거 봐, 그것까지 계산한 게 맞다니까.
“백수안, 너 울어?”
“아뇨. 내가 울기는 왜, 어 이게 뭐지? 왜 눈물이…….”
눈가를 더듬던 수안이 손가락에 닿는 물기에 당황해 말을 끝맺지 못했다.
피식 웃음을 흘린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가락으로 눈가를 쓸어주었다.
올려다보는 일이 대부분인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마치 존중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쁘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 상황 같은데.”
“그러니까요. 아저씨 막 돌아온 탕아, 이런 느낌이에요. 순종적이고 착한 아내에게 무심했던 남편이 이제야 뉘우치고 돌아와서, 아야!”
기어코 코를 꼬집혔다.
“까분다.”
왜 그 소리가 안 나오나했다.
“손.”
말 잘 듣는 강아지마냥 얌전히 내밀어진 손을 거머쥔 도훈이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을까. 수안의 가는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반지는 임자를 만난 듯 빛을 발했다.
예쁘기 그지없는 수안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도훈이 자신의 몫인 반지를 그녀에게 건네곤 손을 내밀었다.
이상하게 손이 떨렸다.
도훈이 반지를 끼우기 쉽게 손가락을 벌려주는데도 불구하고 두어 번 삐끗한 뒤에야 그의 약지에 무사히 반지를 안착시킬 수 있었다.
혼인신고를 한 지 11개월, 함께 살기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드디어 결혼반지를 나누어 끼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살짝 찌푸려진 수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도훈이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사랑에 설레는 여자의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분명 이런 표정은 아닐 것이다.
감격에 겨워 활짝 피어나는 얼굴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행복한 표정이길 바랐건만, 그건 아무래도 도훈의 욕심이었던 것 같다.
수안의 말마따나 정말 꽃다운 아내를 팽개쳐 둔 무심한 남편이 된 것만 같았다.
늦어도 너무 늦어버린 반지를 건네며, 이 정도로도 행복하길 바라는 천하의 둘도 없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구나 이 결혼반지는 고스란히 자신의 욕심이었다. 수안을 자신의 곁에 붙잡아놓고 싶은 욕심.
“이런 건 글쎄, 형식에 불과하겠지만, 앞으로 남들 하는 건 다 해보자. 아니, 남들이 안 하는 것도 그냥 다 하자.”
사랑을 말하기도 조심스러운 수안에게 건넬 수 있는 약속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겨우 스무 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잃었고, 너무 험한 일을 겪었으며, 결혼조차도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던 수안에게서 풋풋한 첫사랑의 설렘마저 빼앗아 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죄책감이 일었다.
하지만 늘 해야만 하는 일과 책임감에 짓눌려 살았던 그가 유일하게 욕심내게 된 존재를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내가 잘할게.”
그러니까 다른 건 좀 대충 눈감아주길.
어떤 속내가 담긴 말인지도 모르고 수안이 입가를 늘렸다.
“나도요, 나도 잘할게요.”
수안이 경쾌한 말만큼이나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말캉하게 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입술에 도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글쎄, 별로 잘하는 것 같진 않네.”
너무 이르게 내려진 박한 평가에 불만을 표하기도 전에 격하게 입술이 겹쳐졌다.
매번 그랬지만, 도발은 수안이 하고 진도는 도훈이 뺐다. 겹쳐짐과 동시에 달큼하게 삼켜지고 녹진하게 잠겨들었다.
절대로 먼저 다가오는 법은 없으면서 시작만 했다 하면 어찌나 열정적인지, 수안은 그의 열기에 매번 허덕였다.
아주 차갑고 깔끔한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도훈의 키스는 무척이나 색정적이었다.
숨이 멎을 만큼 가슴이 두근댔고, 모든 걸 잊을 만큼 황홀했다.
깊게 사로잡힌 마음은 겁이 나는 와중에도 무언가 더 많은 걸 갈구했다.
어느새 위치는 뒤바뀌어, 일어선 도훈이 의자에 앉아 있는 수안을 향해 한껏 몸을 숙인 상태였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수안은 좀 더 닿고 싶은 마음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상체를 가져다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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