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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부부의 아침 (33/88)

33. 부부의 아침

세상 가장 달콤한 걸 발견한 사람처럼 입꼬리가 나른하게 휘었다.

“뭐 해?”

“엄마, 깜짝야.”

씽크대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수안이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돌아봤다.

“뭐 하냐고?”

그리 다정하지 않은 퉁명스러운 물음에도 수안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짜란. 아저씨 아침 식사요.”

그러고 보니 식탁에는 김치와 콩나물국, 정체가 불분명한 노리끼리한 밥이 차려져 있었다.

“얼른 앉으세요.”

수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릿하게 다가간 도훈이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은 잘 잤고?”

“네.”

“아픈 덴 없고?”

“네.”

“어제 일은 기억나고?”

“음, 대부분은요.”

“그 대부분에 술집 에어간판 끌어안고 애걸복걸했던 것까지 포함되나?”

식탁에 물이 담긴 컵을 내려놓던 수안이 멈칫했다.

“흠흠, 그 에어간판이 은근 내 취향이더라고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 하나는 아주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 어제 공교롭게도 난 내 와이프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셈이군.”

마주 앉은 수안의 눈이 샐쭉해졌다.

“아저씨 은근 못된 구석 있는 거 알아요? 그런 실수는 알고도 모른 척해줘야지.”

“틀렸어. 은근이 아니라 제대로 못됐거든. 앞으로 술은 금지야.”

“와아! 정말 못됐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처음 실수는 한 번 눈감아주는 게 예의지.”

“너한테 예의 차릴 생각 없어.”

도훈의 단호한 말에 수안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거렸지만, 더 이상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솔직히 술은 처음이라 그렇게까지 흐트러질 수 있는지 몰랐다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그녀도 적잖이 놀랐었다.

게다가 재호에 대해 수군대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 나서는 겁이 덜컥 났더랬다.

감자탕집 안으로 불쑥 들어온 현진을 보고 도리어 반가울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어제의 상황을 생각하면 도훈의 말이 아니라도 술은 자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새롭게 접한 신세계와 손절해야 한다는 건 영 아쉬운 일이라 절로 시무룩해졌다.

“근데.”

다 차려놓은 밥상을 앞에 두고도 오직 수안에게만 관심이 있는 도훈은 숟가락도 들지 않은 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운을 뗐다.

호되게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금세 축 처지는 수안이 너무 귀여워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저기 되는대로 꽉꽉 물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의 가학성에 놀람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게 또 마냥 나쁠 것 같지는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백수안한테 엉큼한 아저씨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우선은 아쉬운 대로 놀리는 재미 정도로 만족해야 할 성싶었다.

“그 에어간판과는 언제부터 그렇게 열렬한 사이였나?”

아니나 다를까, 즉각적인 반응이 도훈을 즐겁게 했다.

볼은 금세 붉어지고, 앙큼한 눈은 샐쭉하니 좁혀졌다. 게다가 아침부터 유난히 붉은 입술은 오동통하니 불쑥 튀어나왔다.

“어제부터요.”

팔짱까지 척 낀 수안이 새침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그렇지. 백수안이 이런 말에 그냥 얼굴만 붉히고 말 인물이 아니지.

“어제 딱 마주치는 순간 첫눈에 반했잖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자로 쭉 뻗은 몸매가 아주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뿐이야, 잘 넘어오지 않는 도도함도 어찌나 내 취향이던지 헤어지기 싫어서 혼났다니까요.”

“허! 꽤나 독특한 취향인 것 같긴 한데, 일단 접수.”

“네? 그걸 왜 접수해요?”

“네 취향 맞추려면 참고해야지. 일자 몸매 만들려면 앞으로 운동은 그만둬야겠군.”

“아, 안 돼요, 안 돼. 아저씨 몸매가 얼마나 근사한데, 그걸 일자로 만드…….”

급한 마음에 손까지 휘저어대며 말을 늘어놓던 수안의 얼굴이 좀 전보다 더 붉어졌다.

민망해진 건 도훈도 마찬가지라 괜한 헛기침을 뱉어내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흠흠, 바, 밥이 좀 특이하네.”

“아암, 이거 간계밥이요.”

“간, 계밥?”

“이게요, 미디움레어로 구운 계란프라이에 적당량의 간장과 참기름으로 맛을 낸 고급요리거든요. 간 맞추기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 아무나 못 하는 건데, 내가 딱 해냈다는 거 아니에요.”

수안의 너스레에 도훈의 입술이 설핏 기울었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기가 힘들었다.

자제심이고 포커페이스고 백수안 앞에선 말짱 꽝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흠, 잘 먹을게.”

도훈이 얼른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간 맞춘 거로 큰소리친 게 빈말은 아니었던 듯, 고소한 밥은 적당히 간이 되어 그런대로 맛이 괜찮았다.

연달아 세 숟가락을 떠서 먹자,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안의 입가에 미소가 내려앉았다.

이쯤 맛있다고 해주면 더 좋아하려나?

수안의 표정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도훈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바스락.

씹히는 소리가 날 리 없는 밥에서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막 숟가락을 들려던 수안이 멈칫 굳어졌다.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지만, 도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우물거려서 삼켜 버렸다.

“맛있네.”

이미 흥이 반감된 말을 뱉어놓고, 도훈은 조금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밥을 떠먹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또다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열정적으로 씹은 탓에 꽤 크게 들린 소리는 아닌 척 무마하기에도 쉽지 않은 수준이었다.

하아! 백수안, 계란을 붙인 거니? 계란 껍데기를 붙인 거니?

이제 완전 울상이 된 수안을 힐끔 쳐다본 도훈이 밥을 삼키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보탰다.

“식감이 색다르네. 딱 내 취향이야.”

“계란 깨본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서…….”

기석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며 힘든 나날을 보냈을망정 집안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태성그룹의 공주님으로 자란 주은은 결혼 후에도 가사도우미에게 집안일을 맡겼다.

당연히 수안이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기석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방 안에 처박혀 있었던 게 대부분이라, 거실도 낯선 판에 주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기석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뒤에도 집안일엔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진짜 부부’라는 말에 완전 꽂혀서는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던 게 문제였다.

“뭐, 그럴 수 있지. 간은 딱 맞아. 콩나물국도 맛있고.”

“휴우, 국은 경원 아줌마가 끓여놓으신 거예요.”

“아아, 어쩐지. 익숙하니까 맛있게 느껴졌나 봐.”

“됐어요. 난 괜찮으니까, 그만 먹어도 돼요.”

“아까 한 말 잊었어? 딱 내 취향이라니까.”

수안이 한사코 말리는데도 도훈은 크런치한 식감의 간계밥을 말끔하게 해치웠다.

그러곤 바로 일어나리라 생각했던 도훈은 깨작거리며 콩나물국을 떠먹고 있는 수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수안아.”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수안은 숟가락마저 내려놓았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듯 들떴던 마음은 이젠 심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넌 이런 거 안 해줘도 예뻐.”

뭐 이렇게 갑자기 심쿵 모드람. 가슴 떨리게.

“해주면 더 예쁠 거 아니에요.”

“여기서 더 예쁘면, 내가 좀 곤란하지.”

아, 뭐야, 뭐야아. 이 오글거리는 멘트는.

느끼한 말도 칼 같은 얼굴로 날려주니 나름 새로운 맛이 있었다.

“아저씨 좀 느끼해진 것 같아요.”

수안은 오글거리는 멘트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좋아 죽을 듯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래.”

또 그 아리송한 ‘그래’를 시전하신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안의 옆으로 성큼 다가와 섰다.

“난 중간은 없으니까, 되도록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기어코 볼이라도 한번 만지지 않고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말갛게 바라보는 얼굴을 감싸 엄지로 쓱 쓸었다.

“아침 잘 먹었어. 답례로 저녁은 내가 준비하지.”

“아저씨가요? 직접?”

“왜? 못 할 것 같아서?”

“그것도 그렇지만, 바쁘잖아요.”

“토요일이잖아. 늦어도 5시 안엔 퇴근할 거야. 경원 아주머니 일찍 들어가서 쉬시라고 하고, 뭐 먹고 싶은지 생각도 해놓고.”

수안의 턱을 감싼 채 매끄러운 얼굴을 매만지고 있던 도훈이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돌아섰다.

더 시간을 끌다간 아무래도 오늘 안에 출근은 힘들 것 같아 애써 마음을 다진 결과였다.

그런데 그런 마음 따위 알 리 없는 수안이 산통을 깼다.

멀어지려는 도훈의 손목을 다급하게 잡아챈 그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다가 배시시 웃기까지 한다.

“왜?”

“아직 못 한 게 있는데.”

그러고는 냉큼 일어나 까치발을 하더니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잘 다녀오세요. 아저, 읍.”

순식간에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이번엔 도훈 쪽에서 시작한 거라, 쪽 하고 떨어지는 거로는 어림도 없었다.

출근 전에 나누기엔 너무나 열정적이고 진득한 키스가 숨 막히도록 이어지다가 마지못한 듯 멈췄다.

“간계밥보다 이게 더 맛있네.”

잠긴 목소리로 나른하게 속삭인 도훈이 몽롱한 눈빛인 수안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주방을 나섰다.

진짜 부부가 되기 위한 아침이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다른 건 천천히 채워가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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