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수안이 원하는 것
난데없는 초인종 소리에 도훈은 하려던 말을 멈춰야 했다.
아무리 맘이 조급해도 늦은 시간 아주 신경질적으로 끊임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들으며 할 말은 아니었다.
“하아!”
“누가 왔나 봐요.”
한숨을 토해낸 도훈이 훌쩍 몸을 일으키자, 수안이 부스스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누워 있어.”
얼른 한마디를 던져 놓고 1층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스웨이드 재킷을 걸친 남자의 상체가 월패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도훈이 월패드 화면을 확인하는 도중에도 초인종은 끊기기 무섭게 다시 울려댔다.
“누구세요?”
[저 수안이 친구 한태경입니다. 수안이 지금 집에 있습니까?]
태경의 얼굴이 화면에 불쑥 나타났다.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표정이 꽤나 사나워 보였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네가 물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수안일 만나러 왔나?”
[네. 수안이가 좀 취했는데,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져서……. 저, 혹시 차도훈 사장님입니까? 수안이 집에 왔나요?]
“집에 잘 도착해서 자고 있으니까, 이만 돌아가지.”
의도치 않게 거짓말이 튀어나가 버렸다. 너무 당당하게 수안을 찾는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월패드 화면을 뚫고 나올 듯 얼굴을 들이밀었던 태경은 한숨을 뱉어내며 멀찍이 떨어지더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저 죄송하지만, 차도훈 사장님도 이 집에서 사십니까?]
“그건 왜 묻지? 남의 집을 방문하기엔 늦은 시간이야. 이만 돌아가.”
[그러니까요. 방문하기에 늦은 시간인데, 사장님은 왜 여기 있냐고요? 후견인이라면서, 왜 수안이와 한집에 있냐고요?]
왈칵 소리를 높이는 태경은 그 나이 또래의 패기와 미숙함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말속에 치덕치덕 묻어나는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숨길 마음도, 숨길 요령도 없는 듯 태경은 온몸으로 수안에 대한 감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애송이의 설익은 감정쯤 별것 아니다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불쾌한 걸까.
너무도 당당한 태경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선을 긋던 수안의 말까지 더해져,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양 언성을 높이는 태경게게 분노마저 일었다.
수안이 고심 끝에 둘러댔을 후견인이라는 호칭이 자신의 위치를 규정짓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여기가 내 집이니까. 물론 수안이 집도 되고.”
얼마든지 다른 말로 둘러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사춘기 때조차도 완벽하게 컨트롤했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나직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이 정도면 답이 됐나?”
화면 속 태경은 입을 헤벌쭉 벌린 채 잠시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아니, 아우 씨, 수안일 만나야겠어요. 좀 깨워주세요. 아니, 아니, 나 좀 들여보내 주세요. 아우, 젠장. 이 문 좀 열란 말이야!]
“오늘은 늦었어. 내일 만나도록 해.”
성질을 못 이겨 대문을 집어 찼는지 덜컹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XX. 문 열어. 지금 당장 수안일 만나야겠어! 당신 수안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
[아아악! XX. 나와. 당장 나오라고!]
태경이 소리를 질러대며 대문을 마구 흔들어댔다. 넓은 정원도 삼키지 못한 소리가 도훈의 신경을 긁어댔다.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나간 도훈은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요란스럽게 덜컹대고 있는 대문을 열고 나간 도훈이 주춤 물러나는 태경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였다.
어찌나 세게 틀어쥐었는지, 태경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컥컥거리는 태경의 발은 차이 나는 키 때문에 뒤꿈치가 바짝 들린 상태였다.
“켁켁, 후견인이라고 수안일 못 만나게 할 권리는 없어. 수안이를 큭, 만나게.”
“실컷 만나. 안 말려. 하지만 오늘은 안 돼. 술 취해서 잔다고.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냐고?”
태경이 시뻘게진 얼굴을 간신히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친구 이상은 안 돼. 수안이에 대한 다른 감정은 접는 게 좋을 거야. 친구로라도 남고 싶으면 말이지. 알았나? 어?”
“컥. 이거, 이것 좀 놔주, 컥컥.”
그리 우람한 체격도 아닌데, 도훈의 손아귀 힘은 생각보다 더 무지막지했다.
태경은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컥컥댔다.
“대답부터 해.”
“아랐, 컥. 눼, 알았으니까 이것 쪼옴.”
도훈이 멱살을 놓아주자 태경이 목을 매만지며 콜록거렸다.
“콜록, 콜록. 그것만, 하나만 말해주세요. 수안이와 무슨 관곕니까? 정말 후견인이에요?”
힘에 밀려 굴복한 와중에도 태경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이맘때 남자애들은 객기에 반쯤 취해서 산다.
수안이 말했던 술에 취한 상태, 조금 흥분하고 아주 격해지고 제대로 통제가 안 되는, 조금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맹목적으로 무엇에건 빠져든다.
어설프고 유치하다는 걸 빤히 아는데도 이 녀석의 거침없는 객기가 부러워졌다.
수안에 대한 감정을 접으라며 다그치는 순간에도, 그녀가 정말 원하는 게 이게 맞을까 고민하게 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한태경, 내가 수안이와 어떤 관계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수안이가 원하는 게 뭐냐는 거야.”
기어코 어른인 척 입바른 소리를 내뱉는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정말은 이 녀석을 아주 곤죽이 되도록 패주고 싶었다. 이렇게 감정 통제가 쉽지 않았던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그 말은 수안이가 저와 친구 이상이길 원하면, 용납하겠다는 소린가요?”
결의가 깃든 태경의 눈이 도훈을 똑바로 마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훈의 쏘는 듯한 매서운 눈길에 금세 흔들린 시선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그의 목울대쯤으로 떨어졌다.
미숙하지만 그만큼 순수했고, 어설프지만 솔직했다. 그래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수안에 대한 어떤 것도 이 녀석에게 내어주기 싫었다.
***
빠른 속도를 내고 있는 트레드밀은 거친 소리를 토해내고 있건만, 그 위를 달리는 도훈에게선 고른 숨소리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미 근육 운동을 끝낸 뒤라, 바짝 긴장한 어깨와 가슴 근육이 얇은 티셔츠에 감싸여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도훈은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각종 운동기구로 채워진 방에서 한 시간 넘게 체력단련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거의 세 시간 가까이 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밤 도훈의 대답을 듣고 난 뒤, 태경은 한참을 머뭇대다가 마지못해 돌아갔다.
그러고도 한참, 도훈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정원을 서성댔다.
뒤늦게 수안의 방으로 갔더니,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평온하게 잠든 수안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약간의 허탈함을 맛봐야 했다.
정원에서 도훈이 그토록 오래 고민한 건, 그를 제외시켰을 때의 수안의 미래나, 지극히 불분명한 그녀의 마음 같은 게 아니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신중할 뿐, 그 뒤에는 장난 없이 내달리는 게 도훈의 방식이었다.
수안과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다른 거라면 객관적인 분석이 아니라, 본능에 근거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난생처음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쪽을 택했다.
하지만 결정한 이상 번복도 없고, 후회도 없다.
그럼에도 정원을 그렇게 오래 서성였던 이유는 성큼 앞서 가버린 그의 마음 때문이었다.
수안이 생각하는 그런 건전한 부부가 아닌, 몸도 마음도 공유하는 진정한 부부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너무 앞서 가버린 자신의 마음 때문에 수안이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것이 싫었다.
마음이든 몸이든 수안이 충분한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태경 때문에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수안 한정으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자신의 자제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만 때때로 엉뚱하고 대부분 사랑스러운 수안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가 풀내가 나도록 정원의 잔디를 짓이기며 내적인 고난에 시달리는 동안, 원인제공자인 수안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잠으로 빠져들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야속하다고 해야 할지.
자는 모습만으로도 애써 가라앉힌 마음을 들썩이게 만들었으니, 야속한 쪽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려나.
암튼, 그래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썰렁한 침대에서 두어 시간 뒤척이다 일어나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나니 새벽 4시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6시가 넘은 지금까지 이곳에 처박혀 땀을 뺐다. 체력단련이 아니라 거의 소모라고 봐야 했다.
시간을 확인하고 트레드밀의 속도를 서서히 줄인 도훈이 뻐근한 허벅지를 두어 번 치고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온 도훈은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행동 하나에도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그이건만, 2층 계단 앞에선 유독 발걸음이 갈피를 못 잡고 주춤댔다.
“속은 괜찮으려나?”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을 흘리곤 마지못해 주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방이 가까워지자, 고소한 기름내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도훈이 시간을 확인했다.
역시 경원 아줌마가 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도훈의 걸음이 빨라졌다. 경원 아줌마를 제외하면 이 집에서 주방을 이용할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설마설마 하면서 주방 입구로 들어선 도훈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