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더 해도 돼요?
“무, 뭐, 뭡니까?”
“수안이 말 제대로 알아들었나?”
“무슨 말을요?”
“다시는 얘한테 껄떡대지 마. 네 그 알량한 빽 지키면서 몸 편히 살고 싶다면 말이야.”
음산하게 깔리는 음성에 등줄기로 소름이 쫙 끼쳤다. 깔아보는 듯한 살벌한 눈빛에 절로 오금이 저렸다.
품에 안긴 수안을 다시 추스른 도훈이 칼같이 돌아설 때까지 재호는 기가 눌려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도훈을 넋 놓고 보고 있는 재호의 뒤통수로 현진의 매운 손이 날아들었다.
“아씨, 왜……요오?”
“들었지, 짜샤. 앞으로 수안이 옆에 얼씬도 하지 마라. 이 누나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거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알았지?”
“아우, 쫌. 그만 좀 때려요. 내가 누군지 알고 자꾸…….”
“요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모르겠냐? 네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저 양반이 누군지가 중요하지.”
“저 양반이 누군데요?”
“너 경영학도라며? 그런데도 사장님을 몰라? 으이구, 여자애들 뒤꽁무니 따라다닐 시간에 경제지 좀 봐라, 인마. 그리고 한 번만 더 아줌마라고 하면 양쪽 입꼬리 귀에다 갖다 확 걸어버리는 수가 있다. 항상 입조심, 아랫도리 조심. 알았냐? 누난 이만 간다.”
현진이 미련 없이 자리를 뜨고도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 있던 재호가 떡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태, 태, 태성. 어우 씨, 왜 몰라봤지. 그나저나 백수안은 대체 뭐지?”
재호가 꽤나 심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수안 때문에 심란한 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도훈도 매한가지였다.
세상 달달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운 수안을 바라보는 그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 나왔다.
안아서 옮기는 건 그런대로 할 만해서, 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 잠시 착각했다.
경원 아줌마를 이만 가시라 할 일이 아니었다. 수안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옷을 갈아입혀야 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허리에 손을 얹고 내려다보는 도훈의 미간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위에 걸친 코트만 간신히 벗겨주고는 후끈 달아오른 열기에 넥타이를 풀고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냥 저대로 재워야 하나 가늠하는 눈이 매의 그것처럼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유난히 쫙 달라붙은 티셔츠와 청바지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그나마 가장 만만한 양말로 손을 뻗었다.
자신의 발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는 발에서 조심스럽게 양말을 벗겨낸 도훈이 또다시 한숨을 뱉어냈다.
“하아, 무슨 발가락이 이렇게…….”
귀여워.
발가락이 이 정돈데 다른 데는……
휴우, 아무래도 티셔츠와 청바지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답답해도 어쩔 수 없다. 술 마신 벌이야, 인마.”
허리를 숙여 어깨 위로 이불을 덮어줄 때였다.
가느다란 팔이 도훈의 목을 답삭 휘감았다.
흠칫 놀란 도훈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수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파르르 떨리던 수안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이건 꿈일까요?”
잠결인 듯 술기운인 듯 몽롱한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아저씨가 여기 있을 리 없으니까, 이건 분명 꿈일 거야. 그쵸?”
묻느라 동그랗게 모아진 오동통한 입술이 도훈의 입술 위로 말캉하게 닿았다.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할 수 있었는데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호자로서의 책임감과 남자로서의 마음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사이, 애먼 놈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접근하는 걸 이미 봐버렸다.
수안이 제 눈에만 예뻐 보이는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안을 밀어내는 일이 세상 그 무엇보다 힘들다는 건, 요 며칠 사이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젠 더 이상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까짓 거 열 살 차이. 수안의 템포에 맞춰 조금만 더 느리게 살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수안아, 너는 뛰어와라, 응? 성큼성큼.
그렇다고, 이렇게는 말고.
요 밤톨만 한 게 누굴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백수안 똑똑한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딱 한 번 알려준 걸 아주 알뜰하게도 배워서 써먹는다.
뾰족 내민 혀로 입술 앞에서 머뭇거렸던 백수안은 이 자리에 없었다.
입술이 닿자마자 쑥 밀고 들어온 그녀는 도훈의 입속을 아주 달콤하게 헤집고 다녔다.
조금은 미숙하고 조심스러운 그 움직임이 도훈을 미치도록 황홀하게 만들고 있었다.
수안의 어깨 즈음에 엉거주춤 닿아 있던 손은 어느새 목 뒤와 허리를 감싸 그녀를 좀 더 밀착시키고 있었다.
수안이 술에 취했다는 것도, 이 이상은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각도를 틀어 더 깊게 탐하며, 수안에 한해서만 너무 쉽게 허물어지는 제 의지를 탓해야 했다.
각도를 달리하며 진하게 맞물렸다가 떨어지기를 여러 번, 끈적한 소리가 침실을 가득 메우고, 달짝지근한 시간들이 켜켜이 쌓였다.
수안은 엄마 품을 파고들며 보채는 아이처럼 도훈의 품에 점점 더 밀착해 왔다.
“하아. 수안아, 그만.”
간신히 수안과 사이를 벌린 도훈이 깊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수안에게 도훈의 제지가 먹힐 리 없었다.
그녀는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칭얼대며 막무가내로 입술부터 맞댔다.
“그만, 더 이상은 위험해.”
수안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고정시킨 도훈이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묻고 달아오른 숨결을 토해냈다.
“또, 피할 거죠?”
떨림이 깃든 목소리에 도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물기가 맴돌기 시작한 눈이 애처롭게 반짝였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지?”
그녀의 옆에 모로 누운 도훈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얼마만큼 멀리 왔는데요?”
“술에 취해서 아무거나 끌어안고 주사를 부려도 예뻐 보일 만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기는 손길에 귓속이 웅웅 울렸다.
술기운에 뭐든 두 배가 된 감정은 설움을 왈칵 몰고 왔다.
“그래 놓고, 그런 말 해놓고 또 잊자고 하면, 아저씨 미워할지도 몰라요.”
가슴 저리는 말을 듣고도, 첫 번째 키스 이후 2주 넘게 외면당했던 시간들이 먼저 떠올라 버렸다.
그 시간 동안 수안은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이 회장과 주은의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을 들었던 순간처럼 세상 속에 홀로 내팽개쳐진 듯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그녀에겐 그건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되짚는 것만으로도 밀려오는 아릿함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주름이 잡힌 그녀의 눈가를 살살 쓸던 도훈이 콕 찍듯 입술을 부딪쳐 왔다.
발그레하게 익은 볼 위로, 애가 타서 오물거리는 입술 위로 차례차례 더듬고 지나간 입술이 그예 아찔하게 휘었다.
한쪽에만 쏙 파이는 보조개는 어찌나 매력적인지,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던 수안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잊자고 해서 잊히는 것 같았으면 지금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거고.”
잠깐 눈만 붙이려고 누워도 수안의 감촉이, 향기가 실제인 것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애저녁에 편히 잠드는 건 포기해야 했다.
조기졸업을 위해 서너 시간 자고 버틸 때도, 뉴욕지사에서 프로젝트 하나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이틀 건너 하루 꼴로 날밤을 샐 때도 힘들다는 생각을 못 했던 그였는데, 요 며칠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한 번도 힘들었는데, 두 번은 어림도 없지.”
“그럼 더 해도 돼요?”
도훈이 지그시 바라보며 눈으로 무슨 소리냐 물었다.
“이거요.”
생끗 웃음을 흘린 수안이 입술을 촉 가져다 붙였다.
“흠흠, 까분다.”
“진짜, 또 그 소리. 부인한테 예의를 지켜야지 말이야.”
“허! 요게 아주.”
도훈이 거의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수안의 코를 톡 쳤다.
“어허, 서방님, 예의를 지키시라니까요. 흐흐. 그러고 보니 우리 정말 조선시대 부부 같지 않아요. 열렬히 사랑하지는 않지만, 기꺼이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 되게 이상적인 느낌이죠?”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귓불 부근을 슬금슬금 만지작거리고 있던 도훈이 멈칫 굳어졌다.
묵직하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슬슬 변화를 가질 때도 됐다고 생각해요.”
네가 말했던 변화는 단지 외형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국한되는 거였을까.
“우리 이제 진짜 부부처럼 살아보는 것도…….”
설마 너, 그저 삶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관계가 진짜 부부라고 생각하는 거니?
나는 좀 더 사적이고 감정적인 부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너는 왜 비즈니스인 거냐고.
수안이 쥐고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급작스레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머릿속이 어질했다.
수안은 절대로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제대로 배신당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열렬히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어디에 발을 들였는지도 모르는 사이 깊어진 자신의 마음처럼, 수안의 감정 또한 그 근방 어딘가를 헤매는 중이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었다.
“오늘 술 마셔보니까 알겠어요. 조금 몽롱하고, 쉽게 흥분하고, 아주 격해지고, 제대로 통제가 안 되는, 사랑도 아마 이럴 것 같아요. 막상 좋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돼도 헤어나질 못하는 거지.”
아직 술기운이 남은 수안의 눈은 도훈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먼 곳 어딘가를 헤매는 것 같은 표정은 아련하고 슬퍼 보였다.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없는 주은의 사랑에 대해 말하며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했던 예전 수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안은 자신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수안아, 우리…….”
딩동, 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