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짐승 같은 놈, 비겁한 놈
원래 키스라는 게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거 아닌가?
그렇게 감미로운 키스를 하고 난 다음인데, 도훈은 왜 한겨울 벼랑 끝에 선 소나무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걸까?
‘절대로 나한테 접근하지 마.’라는 경고문을 떡하니 붙인 것 같은 도훈을 보며 수안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왜요? 왜 갑자기 취손데요?”
수안이 먼저 시작하긴 했어도 명백히 키스다운 키스는 도훈이 주도했다.
그녀가 아무리 그쪽으론 문외한이라도 좋고 싫고를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만큼 좋아 죽을 정도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거칠어진 숨결과 상기된 얼굴로 봐선 도훈도 그녀와의 키스가 나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수안을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은 사람 취급을 하는지 들어야 했다.
“오늘까지 처리해야 될 일이 있어.”
“저녁 먹자고 불러낸 건 아저씨잖아요. 조금 전엔 없었던 일이 왜 갑자기 생겨난 건데요?”
“회사 일을 일일이 너한테 말해야 하나?”
냉한 음성으로 말을 뱉어낸 도훈이 신경질적으로 인터폰을 눌렀다.
“최현진 씨 아직 도착 안 했습니까?”
[방금 도착했습니다, 사장님.]
“들었지? 어서 나가 봐. 이왕 나온 거 최현진 씨와 식사하고 들어가는 것도 좋겠군. 밥값은 이걸로 계산하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도훈이 블랙카드 한 장을 책상 위 명패 옆으로 내려놨다.
수안과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손이 닿는 것도 싫다는 듯 그렇게…….
다시 서류철에 집중한 도훈을 참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수안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비겁해요.”
떨림이 깃든 한마디가 조용한 사무실을 휘돌아 도훈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화가 묻은 발자국 소리에 이어 문이 열렸다가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잠시 미동 없이 앉아 있던 도훈이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의자에 털썩 기댔다.
“그럼 어쩌냐. 짐승 같은 놈보단 비겁한 놈이 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호기심이나 치기에 불과했을 수안의 도발에 넘어가 정신을 못 차렸던 제 자신이 한심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성을 잃고 수안의 입술을 삼켰던 그 순간, 아직 설익은 마음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어떤 원망을 들을지언정 수안을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수안이 흠칫 놀라지 않았더라면 정말 어디까지 갔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한 사람을 향한 집착과 소유욕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들 줄은 미처 몰랐다.
“차도훈, 참 못났다. 하아!”
***
“클래식기타 동아리 가자아. 응? 응?”
바람은 아직도 쌀쌀한데, 팔랑거리는 나미의 스커트 자락엔 벌써 봄바람이 담뿍 담겼다.
“클래식기타 완전 낭만적이지 않아?”
나미가 상큼하게 물으며 클래식기타 들고 앉으면 무진장 뽀대날 것 같은 태경을 돌아봤다.
“어, 낭만적이지 않아. 몇 번 하지도 않고 손가락 아프다고 징징댈 거면서 낭만은 개뿔.”
“한태경 너는 진짜 말을 해도. 그럼 넌 다른 동아리 가면 되잖아. 수안이는 나랑 클래식기타 가고. 그치? 수안아.”
“어? 글쎄. 나는 좀…….”
입학한 지 2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건 결국 도훈의 얼굴을 못 본 지 2주가 훨씬 넘었다는 소리였다.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들어온 날 이후로 도훈은 수안을 피하고 있었다.
아주 일찍 나가거나, 아주 늦게 들어오거나, 아니면 아예 안 들어오거나.
둘이 살기에 터무니없이 큰 집은 사람 하나 피하고자 마음먹으면 힘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구조였다.
처음 일주일은 수안도 화가 나서 피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리라 결심했지만, 점점 시일이 지나가면서 화가 사그라든 자리에 불안과 걱정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경원 아줌마까지 가고 나면 그 큰 집에 혼자 내버려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키스 한 번 잘못했다가 완전 버려진 여자,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좀 뭐? 백수안 너까지 날 배신할 참이야?”
“별게 다 배신이다.”
“한태경, 입 다물어라. 수안아, 다른 데 안 갈 거면 클래식기타 하자, 응?”
“미안, 나미야. 나 이미 저기 가려고 마음 정했어.”
“저기 어디?”
수안의 검지가 향한 곳을 쭉 따라가던 태경과 나미의 입이 놀라서 쩍 벌어졌다.
“백수안, 미쳤어? 남자만 득시글거리는 저기를 네가 왜 가는데?”
다혈질인 태경의 아주 원색적인 반응이었다.
“저기 선배들 다 무섭게 생겼던데,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니지? 그냥 해본 소리지? 주먹다짐, 저건 진짜 아니다, 수안아.”
겁 많고 힘든 거 딱 싫어하는 나미가 복싱동아리 주먹다짐의 표지판을 가리키는 수안의 검지를 잡아 내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미의 간곡한 만류도 들은 체 만 체 수안은 표지판에 그려진 샛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비장한 걸음을 내디뎠다.
“백수안, 왜 하필 저기냐고?”
하지만 가만히 두고 볼 태경이 아니었다. 수안의 앞을 가로막은 태경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이유를 물었다.
“정신 번쩍 나게 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 얼굴을 봐야 뭘 해도 할 텐데, 그전에 저런 거라도 배워놓으면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뭐? 누구? 전에 그 납치범? 계속 경호받는다며? 걱정 안 해도 된다며?”
기석이 풀려나는 바람에 도훈은 수안의 경호를 더 늘렸다.
대신 대학생이 된 수안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거리를 두라는 지시를 내려둔 터라, 경호원의 존재를 다른 사람이 알아채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거 아니야. 있어, 비겁한 사람. 암튼 난 저기 입회원서 내고 갈 거니까 너희들 먼저 가.”
자신을 지나쳐 거침없이 나아가는 수안을 보고 있던 태경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고는 그 뒤를 따랐다.
“한태경, 너는 또 어디 가는데? 우리 먼저 가라잖아.”
“너 먼저 가.”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가는 태경의 뒷모습에 나미의 눈이 시무룩하니 처졌다.
커다란 태경의 덩치에 가려 수안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물으나마나 뻔했다. 수안과 태경은 주먹다짐에 나란히 입회원서를 넣을 것이다.
한곳만 바라보는 태경이나, 그런 태경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수안이나 이럴 땐 참 야속할 수밖에 없었다.
“개강파티 6시까진 거 알지?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빨리 와.”
대충 손을 흔들어 보인 태경이 혼자 가겠다고 밀어내는 수안과 실랑이하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나미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
왁자한 소리에 귀가 웅웅 울렸다. 개강파티인지 술 파티인지 아리송해져 버린 건 벌써 한참 전이었다.
“수안아, 괜찮아?”
“으응, 좋아.”
옆에 붙어 앉아 걱정스럽게 묻는 태경의 말에 미소가 한가득인 수안이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부터 끄덕이며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좋았다.
술은 감각을 조금 무뎌지게 하는 대신 얼토당토않은 대담함을 이끌어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진작 마셔볼걸 그랬다는 후회를 할 정도로 수안은 술의 기능에 심취해 있었다.
“이래서어 사람들이 술을 마시나 봐. 헤헤.”
낯선 사람들 앞에선 주눅 들어 말은커녕 잘 웃지도 않았던 수안이 말끝마다 웃음을 배어물었다.
“너 취했어. 그만 마셔.”
눈살을 찌푸린 태경이 수안의 손안에 있는 잔을 빼앗아서 제가 마셔 버렸다.
“어어, 그거 내 술인데에. 나빴어. 내 거 막 뺏어 먹구.”
수안이 눈에 힘을 팍 주며 태경의 손에서 술잔을 낚아채 소중한 거라도 되는 것처럼 품으로 가져갔다.
“이런, 우리 예쁜 후배님 잔 비었네.”
신입생들과의 침목 도모를 핑계로 선배들이 사이사이 끼어 앉은 참이었다.
자리를 옮기라는 선배의 말을 아주 대놓고 무시한 태경을 제외하고, 신입생들은 모두 선배들과 나란히 앉아 자세를 곧추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 수안의 옆에 앉은 선배는 단연 압권이었다.
학회장이라며 개강파티를 주도하던 재호는 키도 몸매도 수준 이상이었고, 대충 걸친 듯한 옷은 수안도 익히 아는 명품 브랜드인 데다, 온화한 미소가 버릇처럼 입가에 번져 있는 말끔한 훈남이었다.
그냥 딱 봐도 인기남인 그에게서 수안이 느낀 감정은 거부감과 두려움이었다.
웃을 일도 없는데 벙싯대는 그의 미소에서 수안은 다른 사람을 겹쳐 보았다.
그래서 그가 수안의 옆으로 앉는 순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술의 힘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잔뜩 움츠러들어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했으리라.
그러니 술 준다는데 안 받을 수가 있나. 아직 재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건 어림도 없었지만, 술잔 정도는 착실히 내밀 수 있었다.
“우리 수안이 주량이 어떻게 돼?”
“잘 모르겠어요.”
재호가 상체를 기울이며 다정하게 묻는 말에 수안은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 얘 취했어요. 술 주지 마세요.”
태경이 수안의 소주잔을 빼앗으려 들자, 마음이 급해진 수안은 잽싸게 홀짝 술잔을 기울였다.
“나 안 취했는데에.”
“그러게, 발음도 정확하고, 얼굴도 안 빨갛고, 수안이 하나도 안 취했는데 뭐. 너 뭐냐? 너 이름이…….”
“한태경입니다.”
“아, 그래, 한태경. 네가 뭔데 얘 술 마시는 것까지 관리하냐? 뭐, 둘이 사귀어?”
“아닌데요. 얘는 그냥 친구거든여. 헤헤, 그취? 태경아.”
느릿느릿 말을 토해낸 수안이 눈에 보이는 술병을 냉큼 제 앞으로 가져와 잔을 채운 뒤 또다시 홀짝 술을 삼켰다.
미처 말리지 못한 태경이 정색을 하며 수안의 술잔을 잡아챘다.
“야, 그만 마시라, 악!”
짜증스럽게 말하던 태경의 머리가 누군가 뒤통수를 때리는 바람에 앞으로 푹 숙여졌다가 튕겨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