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미치도록 황홀한
“뭐?”
“아우. 아저씨, 왜 자꾸 소리를 질러요?”
“네가 자꾸 헛소리를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그게 왜 헛소린데요? 뭐든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시도도 안 해보고 진짜 부부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너 진짜 왜 이러냐? 요즘 애들 무서운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쪼그만 게 정말 발랑 까져서는, 뭐? 뭐부터 해? 키스, 키쓰으.
백수안, 나를 아예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냐?
“아저씨 모쏠인 건 아는데 너무 겁먹지 마요. 그냥 딱 가만히 있어봐요. 내가 다 알아서 해볼라니까.”
어어? 수안아, 백수안, 네가 뭘 알아? 대체 뭘 다 알아서 하겠다는 건데?
“흠흠, 백수안 까부웃.”
인상을 팍 쓰고 근엄하게 까불지 마라는 명령어를 뱉어내려던 도훈의 입이 양 볼을 강하게 움켜쥔 수안의 손에 의해 앞으로 쭉 모아졌다.
처음엔 당황했다가, 잠시 후엔 밀어낼까 고민을 했고, 나중엔 네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하는 심정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수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밀어내야 한다는 책임감과 밀어내고 싶지 않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느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정신이 없었다.
말랑하고 따뜻한 게 입술에 닿고 나서야, 이미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젠장! 백수안, 너 진짜 어쩌려고 이러는 건데?
살포시 닿은 입술은 생각보다 더 부드러웠다.
잠시 망설이는 듯 움찔거리던 그것은 이내 살짝 벌어졌다가 도훈의 아랫입술을 담뿍 감쌌다. 그러고는 어이없게도 마치 사탕을 빨아먹듯 쪽쪽 빨아대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백수안.
다 알아서 해본다고 아주 당돌하게 밀어붙이기에 얘가 진짜 뭘 좀 알고 이러는 건가 잠시 헷갈렸었다.
이렇게 어린애가 사탕 핥아먹듯 하는 게 고작이면서, 무지막지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마냥 볼을 감싼 손은 거슬릴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와야 정상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입술을 침 범벅으로 만드는 어린애 장난 같은 키스에 설레고 몸이 뜨거워지는 자신은 미친놈임이 분명했다.
밀어내도 벌써 몇 번을 밀어냈어야 맞을 시간 동안, 이렇게 맛만 보이고 훅 떨어져 나갈까 봐 겁먹고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은 제정신이 아님이 틀림없었다.
확 끌어안아 제대로 삼키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차 꽉 움켜쥔 손이 바들바들 떨려올 즈음, 수안의 뾰족한 혀가 도훈의 입술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한계였다. 더 이상은 곤란했다.
이대로 더 가면 아주 물불 안 가리고 애한테 덤벼들지도 몰랐다.
마음을 다잡은 도훈이 수안의 양팔을 잡고 그녀를 떼어냈다.
나름 전력투구를 했던 탓인지 수안은 예상외로 쉽게 떨어져 나가며 조그맣게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이거 생각보다 가슴 떨리고 힘든 일이네요.”
“뭘 했다고.”
미처 채우지 못한 욕구 때문에 억울해진 도훈에게서 자신도 모르게 불통한 말이 튀어나갔다.
도훈에게 팔을 잡힌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수안이 반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지금 제일 억울한 게 누군데, 앙큼하게 날이 선 눈은 도훈의 말이 상당히 억울하단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아저씨가 중간에 딱 멈춰서 다 못 한 거잖아요. 내가 지금 막 완전 찐하게 하려고 했는데.”
“허!”
완전 찐하게? 그게 수줍게 들어올 듯 말 듯 머뭇대던 혀 얘기라면, 진짜 찐한 건 아마 환갑 즈음에나 가능하지 싶었다.
“저기 혹시, 아저씨는 싫은 거예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살짝 주름이 잡힌 도훈의 미간을 수안은 다른 의미로 오해한 듯했다.
입술을 가져다 대기 전에 물었어야 할 말을 너무 뒤늦게 꺼내며 수안은 도훈의 눈치를 봤다.
“그러니까, 내가 좀 아저씨 취향도 아니고, 이럴 마음도 전혀 없었는데 강제로 덮쳐서 기분이 나쁜 거라면…….”
수안은 점점 울상이 됐다.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이 마치 성추행범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인 듯했지만, 한편으론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는 도훈은 허락도 받지 않고 이마에 뽀뽀를 두 번이나 했고, 병실에서는 재워준다는 명목으로 멋대로 끌어안기까지 해놓고.
게다가 이제 아주 머리 쓰다듬는 건 거의 버릇처럼 하는 수준이고, 지금도 남의 팔을 제 것인 듯 꽉 잡고 있고.
“그래도 나 안 미안해할래요. 아저씨도 막 내 이마에 멋대로 뽀뽀했잖아요. 그래 놓고 나한테 기분 나쁘냐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이번 거 마음에 안 들어도 아저씨가 그냥 참아줘요.”
도훈이 입을 꾹 다문 채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수안은 제멋대로 단정을 짓고 공평한 마무리까지 이끌어내고 있었다.
도훈의 눈앞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입술. 붉고 도톰하고 유난히 반짝이는 저 입술.
수안의 입에서 나온 참아주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도훈은 오히려 참기 힘들어져 버렸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아니, 내가 뭐랬다고. 지금 엄청 가만히 있거든요.”
“휴. 수안아, 다른 건 다 네가 바라는 만큼 참아줄게. 그러니까 이번 건 그냥 네가 참아.”
잡고 있던 팔을 그대로 잡아당겨 수안을 품은 도훈이 목 뒤를 감싸며 순식간에 입술을 겹쳤다.
수안이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붙였을 때와 시작은 같았지만, 진행은 전혀 같지 않았다.
차도훈 사장님은 어찌나 급진적이고 개방적이신지, 단계를 한꺼번에 뛰어넘은 듯,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 그의 혀가 이미 놀라서 벌어진 수안의 입속으로 쑥 들어와 있었다.
이렇게 혀가 난무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경험해 보지 않은 수안으로서는 그게 조금 징그럽고 찝찝하게 느껴진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도훈에게 막상 시도해 보려다 망설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전혀 징그럽거나 찝찝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움직임 사이로 퍼지는 숨결이, 나른하게 스며드는 체향이 미치도록 황홀했다.
의식은 점점 몽롱해지는데, 감각은 미세한 움직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예민해졌다.
도훈의 손이 허리를 감아 당겼을 때 흠칫하며 앓는 소리를 낸 건, 정말이지 예민해진 감각 때문이었는데, 아무래도 도훈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나 보다.
겹쳐질 때보다 더 갑작스럽고 뜬금없이 도훈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거친 숨결이 뒤섞일 만큼의 거리, 동그래진 수안의 눈이 일그러진 도훈의 얼굴을 바쁘게 더듬었다.
“아저…….”
커다란 손이 수안의 얼굴을 덮었다. 그 손 위로 도훈의 얼굴이 툭 내려앉았다.
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뜨거운 숨결이 번져 나갔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놀라서 그런 게 아니라고, 싫어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녹아내릴 듯 달짝지근한 키스의 뒤끝이 이렇게 묵직하리라곤 짐작조차 못 했던 수안은 어찌해야 될지 몰라 거친 숨만 쌕쌕 몰아쉬었다.
“내 실수야. 오늘 이건, 잊자.”
도훈의 나직한 음성이 이마를 울림과 동시에 그의 손도 얼굴도 떨어져 나갔다.
수안은 황망한 눈길로 불쑥 솟구쳐 일어나는 도훈을 좇았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어둠이 깔린 창가를 향해 섰다.
곧게 뻗은 어깨 밑으로 자리한 널찍한 등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묵묵히 어둠을 응시하는 도훈은 어쩐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최근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그와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칼 같은 이미지다 보니 경계가 뚜렷해 보이는 저런 순간엔 말 걸기도 조심스러워졌다.
‘실수’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자꾸 머뭇거려졌다.
그가 만들어낸 몽환적인 세계에 발을 담갔다가 갑자기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키스가 끝난 뒤인 이 순간 자체도 민망해 죽겠는데, 도훈까지 저러고 있으니 뭘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숨죽인 1분 1초가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두께가 엄청 두꺼워 보이는 창유리를 뚫어버릴 기세로 꼼짝을 않고 쏘아보던 도훈이 드디어 움직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저주에서 이제 막 풀려난 것처럼 수안은 안도의 숨을 뱉어내며 빳빳하게 곧추섰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저씨랑 키스하는 거 나쁘지 않다고, 나는 엄청 좋았다고, 우린 제법 잘 맞는 진짜 부부가 될 수도 있겠다고, 도훈이 돌아보는 즉시 말하리라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수안이 결심을 실행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수안 쪽으론 시선 한 줌 주지 않은 도훈이 인터폰으로 손을 뻗어 현진을 호출해 달라 지시를 내렸다.
어안이 벙벙한 수안이 계속 그를 좇는데도, 도훈은 그녀를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했다.
태성그룹의 그 대단하신 사장님 모드로 전환된 도훈이 책상에 앉아 서류철을 펼쳐 들며 수안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건넸다.
“미안한데, 저녁 식사는 아무래도 취소해야 될 것 같다. 최현진 씨 오면 그 차 타고 집에 먼저 가.”
황당했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완전 무시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