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키스부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도훈이 다가와 어깨라도 감싸면 어떻게 반응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한 번 더 흐느껴? 아냐, 아냐, 그건 너무 노골적이야. 차라리 어지러운 척 비틀거리다가 몸을 살짝 기대는 게 낫겠어.
흠, 슬픔에 젖어 있는 연약한 여자, 언제 어느 순간이건 먹히는 아이템이지. 거기다 수안의 비뚤어진 인성까지 은근히 부각시킨다면…….
“저는 그저 사장님한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사모님께 말씀드린 건데, 아무래도 제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아요. 사모님 기분 나빠하시는 거 충분히 이해…….”
열연을 펼치던 지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뚝 끊겼다.
지희의 어이없는 눈길이 자신을 그대로 지나쳐 수안이 앉아 있는 소파로 향하는 도훈을 좇았다.
눈을 앙큼하게 부라린 채 잔뜩 짜증이 나 있는 수안에게로 곧장 다가간 도훈이 그녀의 머리부터 쓰다듬었다.
다가오는 손에 움찔했던 수안은 싫은 듯 싫지 않은 오묘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얌전히 기다릴 것이지, 겨우 20분 만에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웃음기 묻은 목소리라니.
지희는 자신의 귀로 정확히 흘러들어 오는 다정한 느낌의 음성에 뜨악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한 지 횟수로 6년, 도훈의 저런 모습은 정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실소에 가까운 미소조차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번 내보였던 차도훈이었다.
지희는 실소가 아니라 썩소라도 좋으니 자주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매일매일 소원했었다.
그런데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니.
밀려드는 배신감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고, 그런 걸 고마운 줄도 모르는 수안이 꼴 보기 싫어 미칠 지경이었다.
반면에 수안은 지희에게 화가 나는 만큼 도훈도 미웠다.
지희의 황당한 울음에 반응하지 않은 것까지는 그런대로 좋았는데, 기껏 다가와서 한다는 소리가 번잡한 애 야단치는 것 같은 말이었다.
얌전히 기다릴 것이지? 정말, 아주 미치도록 얌전히 있었거든요.
무슨 일 벌인 건 아저씨 비서실장이구만,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데?
아주 사납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수안은 꾹꾹 눌러 참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부하직원 앞에서 사장님의 체면을 깎아내릴 순 없으니까.
“두 사람 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할 마음이 없나 보네.”
“아, 정말 별일 아니었습니다.”
스무 살 어린애니 투정부리듯 제 입맛대로 마구 지껄여 대는 건 아닐까 걱정된 지희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을 꺼냈다.
“그래?”
“네. 저는 이만 나가서 차 대기시키라고 콜 넣겠습니다.”
절도 있게 돌아선 지희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수안도 도훈도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된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장 실장.”
“네?”
“콜은 됐어. 직접 운전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장 실장.”
묵직하게 깔리는 도훈의 목소리가 문손잡이를 잡아챈 지희를 다시 불러 세웠다.
“네, 더 지시하실 일…….”
“좀 전의 태도, 장 실장답지 않았어.”
서서히 돌아선 지희가 굳은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부연 설명이 필요한가?”
그래, 저게 바로 차도훈이라는 남자였다.
예의는 차릴지언정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고, 일정 경계선 안으로 들어서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지희는 도훈의 그런 점이 좋았다. 때로는 곁을 내주지 않는 것에 섭섭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게임의 최고 레벨 정도로 생각하면 투지도 불끈 솟고 기대감도 증폭됐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상대는 매력 없었다.
쉽게 얻을 수 없기에 더욱 가지고 싶은 것, 그게 바로 도훈이었다.
그 하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거의 최종 단계까지 접근했다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어리고 영악한 계집애가 아무런 노력 없이 제 앞으로 끼어들었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냐고?
아주 상세하게 필요하다 말하고 싶었다.
대체 나다운 게 뭔지는 알고 나답지 않다고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짜 어디쯤 접근한 건지 단정하기 힘들어져 버렸지만, 지금 딛고 있는 자리마저 빼앗기게 될까 겁나서 뭐 하나도 속 시원히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내가 장 실장의 어떤 점을 높이 사는지 잊지 마.”
“네, 사장님.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돌아선 지희의 입술이 자신의 이에 되게 씹혔다. 수안이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훈이 조금 더 미웠다.
그럼에도 절대로 포기가 안 되는 도훈의 시선을 의식하며, 허리를 곧게 세우고 도도하게 사장실을 벗어났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긴 도훈이 소파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수안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봤다.
처음엔 화가 난 건가 싶었는데, 유심히 보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안아?”
수안의 멍한 눈길이 그에게로 향했다. 꽉 움켜쥐고 싶어지는 앙증맞은 코 아래 자리 잡은 입술도 살짝 벌어진 상태였다.
입술에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오늘따라 유난히 탐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쪽쪽 빨아대면 단물이 돋을 것 같은 입술에 사로잡힌 도훈은 수안을 불러놓고 잠시 동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저씨, 아저씨?”
“어? 왜?”
“아저씨가 먼저 불렀잖아요.”
“어? 아, 그만 밥 먹으러 나갈까?”
허둥대며 문을 향해 손짓하는 도훈을 보고도 수안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내가 뭐 좀 생각해 본 게 있는데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가 내린 도훈이 수안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장 실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것도 그건데, 나 방금 엄청난 걸 깨달았거든요.”
얘가 또 무슨 엉뚱한 소릴 하려고 이러는 걸까?
요 근래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던지라, 도훈은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며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소파에 등을 기대고 팔짱까지 꼈다.
“준비됐어. 얘기해.”
장난기가 깃든 도훈의 말에 수안은 비장하게 눈빛을 세웠다.
“나, 내일모레면 대학생이에요.”
도훈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얘만 그런 건지, 아니면 요즘 애들이 워낙 이렇게 좀 뜬금없는 건지.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러나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래, 축하한다.”
하지만, 도훈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척 여유로움을 한껏 끌어낸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무려 4개월이나 함께 살았구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만 집중한 듯, 수안은 도훈의 말을 무시한 채 마이웨이였다.
“그러니까 슬슬 변화를 가질 때도 됐다고 생각해요.”
진지함과는 약간의 거리를 둔 것 같았던 도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대학생이 되는 것과 4개월을 함께 살았다는 얘기를 연결해 도출해 낼 수 있는 결론은 도훈이 생각하기에 딱 하나였다.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독립은 곤란…….”
“우리 이제 진짜 부부처럼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
“뭐?”
“뭐라고요?”
함께 떠들어대다가 전혀 다른 각자의 얘기에 놀라 말을 멈췄던 둘은 또다시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진짜 부부처럼? 그게 무슨 소리야?”
좀 더 당황한 도훈이 먼저 말할 기회를 가로챘다. 꼈던 팔짱은 이미 스르르 풀려 버렸고, 소파에 기댔던 등은 칼같이 날이 섰다.
“말 그대로예요. 아저씨만 괜찮다면 나는 진짜 부부처럼 지내고 싶어요.”
“백수안 너, 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확실히 아니까 얼마나 아느냐고 묻지 마세요. 지금 여기서 아저씨한테 내 성 지식에 대해 오픈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허!”
헛웃음만 터져 나왔다.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백수안이 때때로 아주 당돌해지기도 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 전개는 너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는 스무 살이고, 이미 혼인신고도 했고, 4개월을 함께 사는 동안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고. 이 정도면 진짜로 부부 해도 괜찮지 않아요?”
“수안아,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우선 애를 좀 진정, 아니, 내가 좀 진정하고 봐야 했다.
괴상망측한 소리를 더 해대기 전에 생각과는 많이 다른 어른의 세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며, 내 페이스를 찾아야 했다.
“아니요, 마음만 고쳐먹으면 생각보다 간단할 수도 있어요. 진짜면, 진짜 부부면 그 사람도 어떻게 못 할 거니까.”
“네가 이번 일로 충격이 큰 것도 알고, 그래서 많이 불안한 것도 충분히 이해하는데…….”
“꼭 그 이유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아저씨가 결혼반지 안 끼어서 오해받는 것도 싫고.”
“사. 그깟 결혼반지, 사면 될 거 아니야.”
미친놈, 지금 뭐래는 거냐?
“남편을 남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들도 기분 나쁘고.”
“말해. 말하면 되잖아. 누가 못 하게 해?”
정신 못 차리냐, 차도훈. 이게 아니지.
“그러니까요. 그런 거 다 해도 되는데, 왜 진짜 부부처럼 하면 안 되는 건데요?”
“그걸 몰라서 물어? 너 아직 스무 살이야.”
“드디어 스무 살인 거죠. 아, 물론 아저씨 눈엔 내가 아직 어린애로만 보이는 거 알아요.”
그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말인데요, 키스부터 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