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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남편의 여자들 (2) (25/88)

25. 남편의 여자들 (2)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들어간 사장실에서 수안을 맞이한 건 하필이면 지희였다.

“어서 와. 회의가 딜레이 되는 바람에 사장님 좀 늦어지실 것 같은데, 차 한 잔 줄까?”

지희는 여전히 수안 한정으로 높임말이 미숙했다.

“커피로 부탁할게요. 그리고 안으로 가져다주실래요?”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상한 기분이 지희로 인해 더욱 나빠졌다.

잘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부탁하고 대답을 듣지도 않고 사장실로 향하며, 괜한 심술을 부린 제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사장실로 들어서서 문을 닫자마자 얕은 한숨을 토해냈다. 손은 자연스럽게 에메랄드 펜던트로 향했다.

“바보, 이런 거 말고 반지를 사주지.”

작게 투덜거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수안은 얼른 소파로 가서 자리를 잡고 대답을 했다.

“믹스밖에 없는데 괜찮지?”

“네, 감사합니다.”

커피 잔만 내려놓고 나갈 줄 알았던 지희가 수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실 생각이 없어 그냥 받아만 놓으려고 했는데, 혹시 커피 마시는 걸 확인하려는 건가 싶어 수안은 일순 당황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화사하게 웃으며 양해를 구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수안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의견을 물어볼 양이었으면 앉기 전에 말했어야지.

“무슨 얘기요?”

“음, 우선 네 사고 소식은 들었어. 걱정했는데, 오늘 보니까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다.”

사고 소식이라는 말에 수안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희가 소식을 들었다면 분명 도훈한테서일 것이다.

비서실장이니 아는 게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어떤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날 정도로 짜증이 났다.

“그래서 말인데, 사장님 비서실장으로서 부탁 좀 할게. 사장님이 요즘 계속 일찍 퇴근하는 바람에 중요한 미팅도 자꾸 캔슬되고, 회의 시간도 뒤죽박죽이 돼버려서 업무에 지장이 많은 상태거든.”

최대한 온순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지희가 슬쩍 수안의 표정을 살폈다.

미팅이고 회의 시간이고 조정하느라 조금 번잡하긴 했지만, 솔직히 업무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조정하기 힘든 회의는 온라인으로 진행했으며, 한 달 전보다 더 늘어난 업무량을 도훈은 말끔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안이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안 생겨서는 사장님 마음이 참 여려. 아무래도 네가 나이도 어리고 상황도 안 좋고 하니까 자꾸 신경이 쓰이나 봐. 게다가 사장님은 너한테 잘 보여야 하는 처지다 보니…….”

무릎 위에 놓인 수안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지희는 회심의 미소를 속으로 삼키며, 더욱 심각한 표정을 꾸며냈다.

“어머, 나 좀 봐. 이런 말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으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는 수안의 뒤로 걸린 시계를 확인한 지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들어 수안의 일이라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도훈에게 이런 모습 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이쯤 자리를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수안의 자존심을 살짝만 자극해서 도훈과의 거리를 벌려놓는 정도면 충분했다.

애초에 이런 짓, 제 성미와는 맞지 않았다.

수안의 졸업식이 있었던 날 이후로 도훈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수작질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심하고 냉정한 차도훈, 그가 변했다.

때때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피식피식 웃기도 했고, 울리지 않는 개인 휴대폰을 힐끔거리는 일이 잦았으며, 퇴근시간만 가까워 오면 조급하게 시간을 확인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업무에 소홀한 건 아니었지만, 일이 항상 우선이었던 예전의 모습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불안했다. 대체 백수안의 뭐가 차도훈의 메마른 감성을 자극한 걸까?

몇 년을 들인 공이 아까워서라도 두 사람의 감정이 더 진전되기 전에 뭐라도 해봐야 했다.

“암튼, 사장님이 회사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네가 신경 좀 써줘. 부탁할게.”

“장 실장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안이 돌아서 나가려는 지희를 불러 세웠다.

“회사를 걱정하는 장 실장님 마음은 잘 알았어요.”

“그렇담 다행이고.”

이렇게 고분고분하면 쬐끔 양심에 찔리긴 하는데, 어쩔 수 없단다, 얘야. 네가 이해하렴.

난 누가 내 거에 손대는 거 딱 질색이거든.

피식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감춘 지희가 수안을 말끄러미 쳐다봤다.

울기라도 하면 어쩌나 했더니, 또렷하게 주시하는 눈이 꽤 강단 있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차도훈 사장님 아내로서 부탁 좀 할게요. 마음이 없을 게 뻔한데 형식만 갖추면 뭐 하나 싶어서 그만두라고 했는데요, 장 실장님이 나한테 그렇게 편하게 말 놓을 위치는 아니지 않나요?”

“그게, 내가 저번에 존댓말이…….”

“아, 서투르다고 했었죠. 그럼 나도 공평하게 반말할까? 미국에선 나이 상관없이 다 반말하잖아. 안 그래? 장 실장.”

황당한 듯 동그랗게 치떠졌던 지희의 눈이 금세 새치름하니 일그러졌다.

“어떻게, 나 반말해?”

“아닙니다. 앞으로 주의하죠. ……사모님.”

부득부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턱에 힘을 준 지희가 말끝에 억지로 사모님 소리를 덧붙였다.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예의는 서로 지키는 게 좋겠죠. 그리고 뭐 좀 물어볼게요. 퇴근 시간이 몇 시죠?”

“6시……입니다.”

“혹시 사장님이 6시 전에 퇴근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이상하네요.”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고개까지 갸웃거리는 수안의 모습에 지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렇게 역으로 당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 터라 거의 멘붕 상태인 데다, 어린 계집애한테 이 꼴이 되고 보니 울분이 솟구쳐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지가 쌓은 것도 아니면서 재력 하나 믿고 날뛰는 계집애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정시에 퇴근하는데도 업무에 지장이 많다고 하는 거 보면, 결국 사장님이 정시 퇴근이 힘들 정도로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인 거네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지금 회사 사정도 그렇고, 워낙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장 실장님, 내 남편 그렇게 능력 없는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늦게 잡히는 회의는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마, 맞습니다.”

수안이 온라인으로 회의를 진행하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지희가 얼결에 말을 더듬었다.

“미팅도 회의도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제대로 조정을 못 했다면, 도리어 비서실 자질 부족 아닌가요?”

“그게…….”

“장 실장님, 남의 남편 신경 쓸 시간에 업무에 더 충실하셔야겠네요.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으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지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수안을 쏘아보는 눈이 미처 억누르지 못한 울분으로 붉게 충혈됐다.

사실, 당당하게 말을 쏟아낸 수안의 어깨며 손이 더 떨리고 있었지만, 제 분에 겨운 지희는 알아채지도 못했다.

솔직히 수안은 지금 한계였다. 내 남편이라고 오만하게 말했지만, 정말 내 남편이 맞기는 한지 제 스스로 끊임없이 답을 구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복잡하고, 가슴은 답답하고, 숨은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저녁이고 뭐고, 이대로 아무도 없는 곳에 처박혀 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만 나가서 일 보셔야 하지 않아요?”

우선 지희부터 내보내자는 생각에 애써 당당함을 유지하고 말을 건넸다.

수안을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고 있던 지희가 막 돌아섰을 때, 기가 막힌 타이밍을 자랑하며 도훈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지희에게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툭 터져 나왔다.

말이 사라진 공간에 훌쩍이는 지희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어이없는 수안은 완전히 말을 잃었고, 도훈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잠시 말을 아꼈다. 그래서 지희의 흐느낌은 조금 생뚱맞게 들렸다.

솔직히 계획했던 행동이 아니었던지라 지희 자신조차도 살짝 당황한 상태였다.

어린 계집애한테 당했다는 사실에 울분이 치솟긴 했지만, 그런 일에 눈물을 흘릴 만큼 유약한 성격은 아니었다.

지희는 논리적이지도 당당하지도 못한 데다, 까딱하면 눈물로 뭔가를 해결해 보려는 부류의 여자들을 경멸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이제는 그것 때문에 통탄스러워서 진짜 울음이 터질 판이었다.

얼결에 영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지만, 이제 와 흐지부지 물릴 수는 없었다.

도훈에게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 약간의 충격쯤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한 그를 되돌려놓고 싶었다.

어느 순간 자신의 미래가 되어버린 그를 저 애송이 계집애에게 빼앗길 순 없었다.

견고한 철벽을 두른 통에 뭐 하나 제대로 해본 것도 없는데, 더 늦기 전에 뭐든 해봐야 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지희와 수안을 번갈아 쳐다본 도훈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흐윽. 죄송해요, 사장님. 이럴 일이 아닌데, 제가 잘못한 건데, 갑자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바람에 못 볼 꼴을 보여 드렸네요. 흡, 하아.”

지희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는 듯 눈물을 삼키며 얕은 한숨을 뱉어냈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볍게 찍어내며 눈꺼풀을 새치름하니 들어 올렸다.

너무 과하지 않게, 하지만 지극히 처연해 보이도록.

도훈이 드디어 한 발짝을 떼어놓았다. 지희는 자신의 의도가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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