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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남편의 여자들 (1) (24/88)

24. 남편의 여자들 (1)

“하아! 안 되겠지?”

짙은 한숨을 토해낸 도훈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인 이성의 끈을 부여잡았다.

이런 거엔 면역도 없고 익숙하지도 않아서 인내하는 건 거의 고통 수준이었다.

나이 서른이 되도록 여자를 몰랐다면 웃기는 소리 말라 비웃을 사람이 꽤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겐 결코 웃기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가족처럼 대해줬다고 해도 이 회장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고, 냉엄한 사업가였다.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거둬진 것만큼 갑작스럽게 내쳐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터라, 다른 데 눈 돌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학창 시절엔 공부에만 매진했고, 주체할 수 없는 사춘기의 열병도 운동으로 다스렸다.

그 편이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훨씬 유리했으니까.

스무 살 이후로는 되도록 신세지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해대느라 잠자는 시간마저도 부족했다.

연애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하고 지나오면서 막연히 언젠간 비슷한 또래의 여자를 만나 그럭저럭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겠거니 생각했지, 뽀송뽀송한 솜털도 가시지 않은 여자애에게 홀려 정신 못 차리는 순간이 오리라곤 짐작조차 못 했었다.

그러니까 뭐든 좀 해봐야 하는 거다. 미리미리 가벼운 연애라도 해봤더라면 얘한테 이렇게 속절없이 흔들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아니다. 어느 순간 어떤 곳에서 마주쳤어도 달라질 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야금야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리슬쩍 눈에 콕 들어와 박히는 걸 무슨 수로 막을까.

좋아하자 마음먹어서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자 마음먹는다고 싫어지는 것도 아닌 것을.

그러기에 자신의 어떠한 감정도 수안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스무 살,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애를 제 품에 가둬 저만 바라보게 하는 파렴치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뭘 좀 더 안 뒤에, 아무 거라도 좀 더 한 뒤에, 그런 뒤에도 제 품으로 와준다면 그때…….

수안의 그 어디라도 만지고 싶어 간질거리는 한 손을 꽉 움켜쥔 도훈이 실없는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지금으로선 줄 수 없는 것들을 가차 없이 붙들어매는 대신, 뒷짐 지고 있던 손에 들린 벨벳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좀 늦긴 했지만, 졸업 선물.”

“네, 감사, 네? 서, 선물이요?”

멍하니 감사 인사를 전하던 수안이 푹 젖어 있던 환상에서 깨어나 눈을 동그랗게 부풀렸다.

“어, 그, 인형이 아니네요.”

“하하, 인형 받고 좋아할 나이는 아니니까.”

자신이 했던 말을 되돌리는 도훈을 밉지 않게 흘겨본 수안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봄을 닮은 영롱한 초록빛이었다.

단조로운 골드체인에 과하지 않은 펜던트가 다양한 각도에서 커팅 된 보석을 품고 있었다.

“에메랄드야. 행복과 행운을 가져다주는 5월의 탄생석이라고 하더군.”

“알아요.”

수안은 눈도 떼지 못하고 물기 머금은 소리를 냈다.

“흠흠, 해줄까?”

분명 묻는 말이었는데, 도훈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벨벳상자를 가져가 목걸이를 꺼냈다.

허리를 숙이고 불쑥 다가온 그가 수안의 머리를 움켜 한쪽 어깨로 모은 뒤 목걸이를 목에 가져다 댔다.

도훈이 허리를 숙이는 순간부터 긴장한 수안은 자신의 귓가를 적시는 그의 숨소리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단지 목걸이를 걸어주려는 것뿐이야. 별것 아니야.

머릿속으로 최면을 걸고 또 걸어봐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가슴이 두근댔다.

콧속으로 스미는 상쾌한 그의 체취에 중독된 듯 아찔하게 흐려지려는 순간, 불현듯 자신이 머리를 감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버렸다.

욕조 안에서 앙큼하게 쳐다보는 자신에게 냄새가 아주 구리다고 했던 도훈의 비웃음까지 떠오르면서,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그를 밀어내려고 할 때, 머리 위로 보드라운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게 뭔지 모를 수 없었다. 이마에 두 번이나 닿았던 경험치 때문에 수안은 입술이 닿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예쁘다.”

건조하게 툭 뱉어진 말에 떨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제 임무는 여기서 끝이라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의 등을 훔쳐보며 머리를 가져다가 냉큼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아직 옅은 샴푸향이 남아 있었다.

구린내 나는 애로 찍히진 않겠구나, 안도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시선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로 향했다.

“마음에 들어?”

“네, 뭐, 그냥.”

“별로야?”

“그건 아닌데, 결혼반지는 내가 준비해야 하나 싶어서요.”

멋쩍은 얼굴을 숨기려고 보는 척 집어 들었던 서류가 도훈의 손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세상에 다시없을 결혼반지를 사고도 남을 능력을 소유하고도 제대로 능력 발휘를 못 한 남편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나부끼는 서류 위로 흩어졌다.

***

수안의 시선이 자꾸 엘리베이터의 한쪽 벽면을 차지한 거울로 향했다.

흉터가 거의 사라진 입술은 립글로스가 덧씌워져 탐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옅게 남아 있던 멍 위에는 컨실러를 덧발라 감쪽같이 흔적을 지웠다.

멍이 사라진 기념이라는 명목을 가져다 붙인 식사 자린데, 구색은 맞춰야 하니까.

도훈은 며칠 동안 6시 30분 퇴근을 고수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나면 바로 서재에 틀어박히기 일쑤였지만, 도훈이 집에 있는 게 좋았다.

달리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으니 수안도 주로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거나, 영어공부를 하거나, 혹은 게임을 하거나, 것도 아니면 *튜브를 시청하며 서재 소파에서 뭉그적거렸다.

며칠간 느낀 거지만, 도훈의 집중력은 실로 대단했다. 설렁설렁 훔쳐보다가 나중엔 대놓고 쳐다보는데도 업무에 집중한 도훈은 모를 때가 많았다.

진짜 와이프였으면 신경도 안 써준다 강짜라도 부렸겠지만, 수안은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주 속속들이 바라볼 수 있는 그 시간이 좋았다.

뭐, 계속 바라본다고 질리는 외모도 아닌 데다가, 일에 열중하는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웬만한 *튜브 채널보다 더 재밌었다.

목걸이를 선물 받았던 그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로 잠든 이후로 수안은 요 며칠 서재 소파에서 잠을 잤다.

아침에 깨어나면 항상 도훈은 없었지만, 소파 앞으로 담요와 베개가 놓여 있었다.

마치 잠든 공주의 곁을 지키는 파수꾼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부끄러워 미소 띤 얼굴을 이불 속에 감췄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간지러운 감촉에 부스스 눈을 떴을 때, 완벽한 슈트 차림의 도훈이 감미로운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 들었던 부위를 설핏 매만지는 손길에 어찌나 가슴이 떨리던지.

‘멍 사라진 기념으로 밖에서 저녁 먹자. 6시쯤 회사로 와.’

호흡곤란 유발자는 참 담백하게도 이 한마디만 남기고 그녀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수안은 내내 구름 위를 딛고 선 듯 붕 뜬 기분이었다.

종일 꾸안꾸 패션과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에 대해 심층 분석을 하고 드레스룸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메이크업이 익숙지 않아 세수를 두 번이나 하고 결국 컨실러와 립글로스에 만족해야 했다.

수십 번 입고 벗기를 반복한 끝에 낙점된 옷은 디자이너 선생님이 좋은 날 예쁘게 입으라며 선물해 준 모직 재질의 미니원피스와 숏 재킷이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너무 꾸민 것 같아 보이나?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영 어색해 보였다.

볼터치를 하지 않았음에도 발그레 열이 오른 볼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열린 엘리베이터로 오피스정장 차림의 여자 두 명이 올라탔다.

자연스레 구석으로 비켜선 수안을 힐끔 쳐다본 여자의 시선이 방문자 출입증에 잠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아무리 비서라지만 너무 유난스럽지 않아?”

“누가 아니래. 지가 비서지 마누라야. 옷에 뭐 붙은 걸 왜 지가 떼어주는데.”

단발머리의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리자, 옆의 여자가 냉큼 맞장구를 쳤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시작한 대화의 연장인 듯했다.

수안의 방문자 출입증을 확인한 이유가 아무래도 못다 한 비밀스러운 잡담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나 보다.

“말끝마다 뉴욕, 뉴욕. 그렇게 뉴욕이 좋으면 돌아갈 것이지 왜 여기 있는지 몰라.”

“그러니까. 나는 걔가 한 번씩 본토 발음으로 혀 굴릴 때마다 토 나올 것 같아서 죽겠다니까. 으, 재수 없어.”

남의 험담 들어봐야 좋을 게 없다 싶어 신경 쓰지 않으려는 수안의 귀로 자꾸 여자들의 대화가 흘러들어 왔다.

딱 꼬집어 이름을 말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대화의 내용상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얘긴 것 같아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 귀가 쫑긋 섰다.

“근데, 진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야?”

“에이, 설마. 혼자 들이대는 거겠지. 우리 …님 결혼했다잖아.”

“결혼반지도 안 끼었던데, 뭐. 결혼 따로 연애 따로 하는지도 모르지.”

“진짜 그렇다면 난 좀 싫을 것 같아. 그 여우한테 주기에는 좀 많이 아깝잖아.”

“왜? 그 여우 아니면 명함이라도 내밀어보게?”

“놉, 유부남은 사양이야. 가끔 보고 안구 정화하는 거로 만족할래.”

“흐흐, 안구 정화용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긴 하지. 얼굴 되지, 몸 되지, 젊지, 거기다 능력에 재력까지, 이건 뭐 가져도 너무 가졌지.”

서로 옆구리를 툭툭 치며 키득거리는 여자들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수안의 눈에 힘이 들어가고 어금니가 으득 물렸다.

뉴욕에 결혼반지에 안구 정화까지, 누구 얘기를 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서재에서 희희낙락 내 남편 잘났다 감상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목걸이 하나에 얼씨구나 좋다, 결혼반지까지는 몰라도 커플링 정도는 괜찮겠지 꿈에 부풀어 있을 일이 아니었다.

기간한정이래도 우선은 내 남편인데, 누구 맘대로 안구 정화용으로 쓰는 건데?

너무 대놓고 째려봤을까. 단발머리의 여자가 힐끔 뒤돌아보다가 흠칫하며 수안을 위아래로 쫙 훑었다.

“몇 층 가세요?”

“네?”

여자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라서 되묻자, 또 다른 여자도 수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층을 안 누른 것 같아서요. 몇 층 가냐고요?”

아, 너무 들떠서 층 누르는 것도 잊고 있었나 보다. 어쩐지 여자들이 타기 전까지 엘리베이터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더라니.

“혹시 인턴이에요? 인턴 교육장은 6층인데.”

“아니요, 인턴 아닌데요.”

어쩐지 얕보는 것 같은 시선과 말투에 수안은 발끈하고 말았다.

여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수안을 바라보다가 이내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서둘러 내렸다.

바짝 곤두서 있던 어깨가 한순간 축 처졌다.

버튼이 눌린 엘리베이터는 신나게 쭉쭉 올라가는데, 수안은 더 이상 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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