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소중한 게 생기면
짧은 노크 소리에 이어 수안이 불쑥 들어섰을 때, 도훈은 지희와 통화 중이었다.
“당분간 오후 늦게 있는 회의는 모두…….”
건조하게 지시사항을 읊어대고 있던 도훈의 목소리가 문 앞에 서 있는 수안을 발견하고 뚝 끊겨 버렸다.
목소리만 끊긴 게 아니라, 몸마저 굳어버린 것처럼 벌어진 입과 눈이 꼼짝을 안 했다.
[사장님?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사장님, 사장니임.]
하이 톤이라 더 잘 들리는 지희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뚫고 나와 멀리 떨어진 수안의 귀에까지 어렴풋이 들리건만, 도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계속 고장 나 있었다.
“너 왜…….”
[네? 뭐라고요, 사장님? 오후 늦게 잡힌 회의 모두를 조정할 수는 없어요. 지금 하려고 하는 말이 그거라면 말이에요. 어제, 오늘 뒤틀린 일정 조정만 해도 곤란한 게.]
“장 실장, 조정 불가능한 회의와 미팅 리스트 뽑아서 메일로 보내.”
사장님을 외치는 지희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뚫고 나올 기센데도 도훈은 제 할 말만 하고는 통화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너 왜 거기 있어?”
겨우 튀어나온 말이 그거였다.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꽉 잠겨 있었다.
수안이 좀 가끔 들여다봐 주라는 당부와 걱정을 늘어놓고 퇴근한 경원 아줌마는 분명 그녀가 잠자리에 들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왜 저런 차림으로…….
아니지, 잔다고 했으니 잠옷을 입은 건 당연한 건데.
암만 그래도 저런 모습은 절대로 당연할 수가 없잖아.
도훈의 내적 갈등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수안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느라 팔을 들어 올렸다.
조명발 제대로 받은 순백의 면 잠옷 너머 허리부터 종아리까지만 은은하게 내비치던 실루엣이 팔을 들어 올린 순간 허리부터 가슴 선까지로 확장됐다.
“하아, 정말 미치겠네!”
한숨을 토해낸 도훈이 답답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으음, 통화 중인 줄 몰랐어요. 내가 방해한 거죠? 난 좀 기다려도 되니까 통화 다시 하세요.”
옆으로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주섬주섬 말을 흘린 수안이 도훈을 등지고 돌아섰다.
이번엔 동그란 엉덩이가 면 잠옷 아래에서 리듬을 탔다.
왜소한 몸이었지만, 결코 앙상하지 않은 볼륨감을 자랑하는 수안이 때문에 도훈은 난데없는 자제력 테스트를 당하는 중이었다.
그저 보호 대상으로만 생각할 수 없어져 버린 상대와 한 공간에서 아무렇지 않게 머무른다는 건 참 곤욕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것도 저렇게 온몸으로 이미 성인임을 광고하고 있는 여자애와는 더더욱.
쟤가 뭘 알고 저러는 거라면, 요물도 보통 요물이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요물이었으면 조금 나았으려나?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은 순수한 행동임을 알기에 수안만큼 순수하지 못한 자신만 미친놈이 되는 것이었다.
소파로 가서 웅크리고 앉는 수안을 보고 있던 도훈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뒤 아무런 말도 없이 성큼성큼 서재를 나섰다.
“어어, 아저…….”
엉거주춤 소파에서 일어난 수안은 금세 울상이 됐다.
저렇게 아무 말도 없이 수안을 팽개쳐 둔 채 내빼는 걸 보면,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도훈이 지희와의 통화를 방해받아서 더 화가 난 것은 아닌가 싶어 씁쓸하고 속상했다.
감정을 내보이는 것보다 숨기는 일에 능숙한 수안이 용기를 내서 찾아온 숨 쉴 구멍은 애초에 그녀의 차지가 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무룩해진 수안이 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막 걸음을 떼었을 때, 도훈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순전히 기석 때문에 생긴 선입견이었지만, 화난 남자는 무서운 존재였다.
다시 업무를 보러 돌아오는 게 분명한 도훈을 마주하기 껄끄러워진 수안이 겁먹어서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몸을 한껏 움츠렸다.
실내화를 신은 커다란 발이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문 쪽을 힐끔거리는 수안의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 겁먹은 수안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도훈이 그러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화가 난 남자들이 종종 이성을 잃고 폭력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건 명확히 알고 있었다.
설마 도훈마저 그런 부류는 아닐 거라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살그머니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널찍하고 단단한 그의 가슴이었다.
숨 한 번 헙 들이켜는 사이 어깨 위로 가볍고 포근한 블랭킷이 내려앉았다.
“이렇게 얇게 입고 돌아다니면 감기 걸려.”
감기가 걸릴 만큼 실내가 춥지도 않았고, 면 소재의 잠옷은 보온성이 좋은 편이었지만, 수안은 단 한 마디도 반박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앞머리를 흩트리는 숨결이, 콧속을 파고드는 체취가 너무도 아찔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 지나치다 싶게 블랭킷을 꼭꼭 여민 도훈이 한 발 물러나고서야 수안은 조심스러운 숨 한 자락을 뱉어낼 수 있었다.
도훈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수안은 어제 이후로 그의 가벼운 손짓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세심하게 챙겨주는 그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자신이 뭔가 많이 손해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저씨는, 참 착한 것 같아요.”
선의를 선의로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 마음이 부끄러워 괜한 말을 보탠 수안이 그와의 거리를 좀 더 벌려 블랭킷을 움켜쥔 채 소파에 쪼그리고 앉았다.
“흠, 아닐걸.”
어쩐지 조금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설핏 머금었던 그가 책상에 기대앉아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또 잠이 안 와?”
“아니요, 그냥 좀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납치에 관한 일이라면,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왜요? 내 일인데 왜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요?”
“네 보호자가 되기로 한 순간부터 그건 내 일이야.”
또 어린애 취급이었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남편이지 왜 보호잔데?
앙칼지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러면 진짜 어린애가 떼쓰는 것처럼 비춰질 것 같아 애써 말을 삼켜 버렸다.
“나 이제 스무 살이에요. 성인이라고요. 물론 생일로 따지면 3개월은 더 지나야 하지만, 보호자가 필요할 나이는…….”
최대한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늘어놓던 수안이 멈칫 굳어졌다.
분명하게 선을 긋는 도훈의 태도에서 뭔가를 감추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혹시, 그 사람 풀려났어요?”
이제는 도저히 아버지라 칭하기도 꺼려지는 사람의 얘길 꺼내자 도훈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그 여자가 다 뒤집어쓴 거예요?”
“수안아.”
“내가…….”
“아니, 다른 방법을 강구 중이야. 이번 일만으로는 백기석 발목 오래 묶어두기 힘들어. 그러니까, 쥐꼬리만 한 성과 얻어내자고 힘 뺄 필요 없다는 소리야.”
말을 할 듯 입을 뻐끔대던 수안이 얕은 한숨을 토해내곤 입술을 꾹 맞물었다.
도훈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경찰서에 갔다가 기석을 마주치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석에게 당당히 맞서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나이가 좀 더 들면, 아저씨 정도 되면 두려움이 좀 덜해질까요?”
무릎을 모아 안고 그 위에 턱을 묻은 수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글쎄, 난 근래 들어 두려운 게 생긴 터라.”
소중한 게 생기면 두려움이 깊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아저씨 뭐 위험한 사업 시작했어요?”
지켜내지 못할까 봐 매순간 두려워지는 이 마음을 너는 알기나 할까?
“아무래도 회장에 취임하려면 눈에 확 띄는 실적을 내야 하니까, 공격적인 경영이 필요하긴 하겠네요. 암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요.”
그 두려움마저 기꺼워지려고 하는 거 보면, 아무래도 미친놈 인증인가?
“잊었나 본데, 아저씨 마누라가 태성그룹 최대 주주잖아요. 여차하면 부부 우대 적용해 줄게요.”
그녀가 권리 행사를 하지 못한다는 건 둘 다 뻔히 아는 사실임에도, 저 덩치로 두렵다고 말하는 그가 안쓰러워진 수안은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빙긋이 미소를 물고 느긋하게 다가선 도훈이 불쑥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백수안, 까불지 마라.”
우씨, 이 아저씨 얼굴이 완전 무기 수준이다.
넋 놓고 쳐다보다가 심장마비로 죽기 십상인 딱 그런 얼굴.
심장이 제 기능을 하도록 두근대는 가슴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어린애 취급이 분명한 ‘까불지 마라’는 말에 제대로 쏘아붙이지도 못했다.
아니, 그의 나른한 미소 앞에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투덜댈 마음 따위 싹 사라져 버렸다.
누구 남편인지 참 끝내주게 잘생겼네.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내가 있잖아.
그의 눈동자 가득 그녀가 담겨 있었다.
담긴 곳이 예뻐서 그런가, 눈가에 멍이 들고 입가에 흉이 있어도 자신이 참 예뻐 보였다.
“예뻐요.”
“그래.”
예뻤다. 흑요석처럼 검은 눈망울도, 끝이 동글동글한 콧방울도, 도톰하니 붉은 입술도, 어디 한 군데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자줏빛으로 변하기 시작한 멍과 딱지가 지기 시작한 입술의 안쓰러운 상처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열 살이나 어린 꼬맹이한테 이런 마음이어도 되나 걱정스러울 만큼 벅차도록 예뻤다.
말초신경의 지배를 받는 사춘기 소년처럼 요 앙증맞은 입술에 닿을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숨결이 나른하게 퍼지는 공간, 맞닿은 눈길만이 지배하는 시간, 서서히 좁혀지는 거리.
넋을 홀딱 빼앗긴 수안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