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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후견인 (22/88)

22. 후견인

집으로 누군가를 부른 건 처음이었다.

절친에게조차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수안은 집안 얘기를 하거나 속내를 내보이는 일을 가급적 삼갔다.

그녀가 태성그룹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태경과 나미가 장례식장을 방문하고서야 알게 됐으니, 오랜 시간 마음을 열어준 친구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섭섭한 눈치일망정 아픈 일을 겪은 그녀를 배려해 화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좀 더 곁을 내주고 싶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부른 거였는데, 아무래도 너무 섣부른 결정이었나 보다.

차마 친부에게 납치돼 맞았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멋쩍게 미소 지으며 옷자락만 비틀어댔다.

“그냥 겉보기만 그렇지, 별거 아니야.”

“입술도 다 터지고 눈두덩은 아주 시퍼런데, 이게 별거 아니라고?”

태경이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 젖혀가며 눈을 부라렸다.

“내가 멍이 좀 잘 드는 체질이라 그래. 정말 아무렇지도.”

“XX, 납치했으면 됐지, 때리긴 왜 때려. 어떤 새끼야? 너도 아는 놈이야?”

“어? 그냥 나, 납치범. 잡혔어. 그러니까 그만 흥분하고 들어가자, 응? 종일 밍밍한 것만 먹어서 떡볶이 정말 먹고 싶었는데.”

대충 얼버무린 수안은 만만한 나미부터 잡아끌었다.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있던 태경도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이거 짱구네 분식 거지? 여기 김말이튀김 진짜 맛있는데. 튀김은, 나미야, 울어?”

장례식장에서 수안 대신에 펑펑 눈물을 쏟아냈던 나미는 이번에도 그녀의 상처를 보며 훌쩍였다.

이쯤 되면 나미는 원래 눈물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계속 훌쩍거리는 애와 계속 씩씩거리는 애를 다정하게 맞아준 경원 아줌마는 다이닝룸에 나미가 사온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보기 좋게 세팅해 주었다.

수안은 입을 크게 벌리지도 못하면서 떡볶이와 순대를 야금야금 잘도 해치웠다.

“그래서, OT는 못 가는 거야?”

“아무래도 이 모양을 해서 가기는 좀 그럴 테니까.”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한숨을 내쉰 나미가 태경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눈을 반짝였다.

“태경이 넌 갈 거지?”

“안 가.”

“왜애? 너까지 안 가면 난 어쩌라고?”

“그건 너 알아서 하고. 백수안, 차도훈하고는 무슨 사이야?”

“켁, 콜록, 콜록.”

태경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떡볶이를 잘못 삼킨 수안이 기침을 해댔다.

“차도훈? 그게 누군데?”

나미가 수안의 등을 두드리며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태성그룹 사장. 어제 학교 앞으로 왔던 사람.”

“허업! 맞다, 차도훈. 민희가 자기 최애라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나 왜 연결을 못 시켰지? 꺄아, 어쩐지 겁나 잘생긴 게 꼭 어디서 본 거 같더라니. 수안아, 차도훈이랑 무슨 사인데? 응?”

다시 또 난관에 봉착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납치까지 서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만큼이나 5월이면 이혼하게 될 기간한정 남편에 대해 얘기하는 건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이것 참.

“친척 오빠?”

“아니, 그건 아니고.”

기간한정일망정 남편을 친척 오빠라고 할 수는 없었다.

냉큼 고개부터 저은 수안은 미간을 깊게 일그러뜨렸다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후견인, 후견인이야.”

틀린 말은 아니니까.

“오, 완전 영국 귀족 같은 그런 느낌이네. 후견인이면 너 막 지켜주고 그런 건가? 그래서 어제 너 납치됐다고 했을 때 눈빛이 막 이글이글했구나!”

“후견인이 무슨 보디가드냐? 지키긴 뭘 지켜.”

눈을 빛내며 나름의 환상에 취해 있는 나미의 말에 태경이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지켰는데 애 얼굴이 이 모양이냐며 순대를 아주 사정없이 찔러댔다.

“진짜 눈빛이 장난 아니었는데. 누구 하나 때려잡을 것처럼 아주 막, 어후!”

“원래 눈빛이 좀 사납기는 해.”

“에이, 사나운 게 아니라 완전 낭만적인 거지.”

뭐에든 잘 반하는 나미가 양손을 모아 쥐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영 탐탁지 않은 얼굴로 순대를 족치고 있는 태경에게서 순대 접시를 사수하며 아주 들썩들썩 신이 났다.

“그 오빠 몇 살이야? 나중에 보면 인사 좀 시켜주라. 이제 나도 곧 같은 경영인이 될 처진데, 친분 좀 쌓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정말 그 비서랑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지?”

나미 설마 너, 그 댓글러 중 한 사람은 아니지?

단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도 도훈과 지희를 연결시키는 건 듣기 거북했다. 아니, 좀 많이 싫었다.

그 댓글을 처음 읽었던 두 달 전보다 지금은 더, 더, 더 싫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 사람 유부남이야.”

“진짜? 와아, 대애박! 절대 유부남처럼 안 생겼는데.”

“와이프는 뭐 유부녀처럼 생긴 줄…… 아니, 와이프도 유부녀처럼 생기진 않았어.”

“헉! 수, 수, 수안아.”

왜? 뭐?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내가 어딜 봐서 유부녀처럼 생겼는데? 액면가로 치면 아저씨 쪽이 딱 봐도 유부남이지.

입을 막은 채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나미를 보며 수안은 속으로 괜한 트집을 잡았다.

그 문제의 와이프가 자신이라고는 짐작조차 못 하리란 걸 알면서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마음이 괜히 울퉁불퉁해졌다.

뭐에 놀란 건지, 순대 접시를 빼앗긴 태경이 방정맞게 떨어대던 포크를 딱 멈춘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떡볶이를 푹푹 찔러대고 있는 수안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손이 툭 내려앉았다.

절로 발동하는 반사 신경에 어깨부터 움찔했던 수안이 놀람과 반가움, 그 사이 어디쯤의 표정을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역시나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과는 어울리지 않는 칼 같은 슈트와 무감한 표정의 도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친구들?”

“예? 네. 어, 이쪽은 한태경, 이쪽은 유나미예요.”

잠시 당황했던 수안이 도훈에게 태경과 나미를 소개했다.

뚱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하고 마는 태경에 반해, 나미는 몸을 배배 꼬며 영어 쌤 앞에서나 내곤 했던 꾀꼬리 같은 소리로 인사를 했다.

“우리, 학교 앞에서 봤지? 반갑다, 나는 차도훈이야.”

“어, 저 아저씨,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당당하게 밝히지 못해 툴툴댈 땐 언제고, 도훈의 입에서 남편 어쩌고 하는 소리가 나올까 봐 겁이 덜컥 난 수안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난데없이 거침이 없다.

“너 때문에.”

손가락으로 수안의 앞머리를 살짝살짝 건드리며 말을 하던 도훈이 불현듯 예쁜 오색풍선이라고 하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 한쪽 입꼬리를 설핏 끌어 올렸다.

나미에게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쑥 몸을 일으키는 태경의 의자가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수안이 당분간 무리하면 안 되니까 적당히 놀다 가라.”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 도훈은 다시 한번 수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돌아섰다.

“아주머니, 씻고 나올 거니까 서재로 간단하게 요기할 것 좀 가져다주세요.”

도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제대로 먹어야지 어쩌고 하는 경원 아줌마의 투덜거림이 이어진 뒤 갑작스러운 고요가 내려앉았다.

“후견인이라며? 저 사람 왜 여기 사는 것처럼 보이냐?”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어정쩡하게 일어선 태경이었다.

“야, 봤어? 이렇게 입꼬리 올라가는 거 봤어? 무표정한 사람이 웃으니까 진짜 환상이다.”

“유나미, 입 좀 다물어. 지금 헛소리할 때야? 백수안, 저 사람 여기 사는 거냐고?”

“어? 그냥, 음, 걱정돼서 그냥 들른 거야. 좀 있으면 갈, 근데 한태경, 너 왜 화내는데?”

“그야……. 화 안 냈거든. 궁금한 거 물어보지도 못하냐?”

태경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한 번 싸해진 분위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태경에게 괜한 소리를 들은 나미마저 뾰로통해 있는 통에 떡볶이와 순대를 다 먹지도 못한 채 자리는 마무리됐다.

안정을 취하라는 김 박사의 말이 아니래도 안정을 취해야 할 만큼 지친 수안은 곧바로 씻었다.

수안이 걱정돼서 퇴근도 않겠다는 경원 아줌마를 간신히 만류해서 보내고는 침대에 누워 불까지 꺼버렸다.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는데, 감은 눈이 뻑뻑하니 아파올 때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난방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어 방이 제법 훈훈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어깨가 선득선득했다.

너무나 익숙한 공간임에도 어둠에 싸인 자신의 방이 낯설게 다가왔다.

어느 순간 무엇엔가 놀란 것처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가 무섭도록 두근댔다.

3년 전에는 익숙했던 느낌이었다. 기석에게 한 번씩 호되게 맞고 난 뒤엔 일주일 정도는 이런 상태로 잠을 잘 이루지 못했었다.

몹시 두근거려 숨 쉬기도 버거워질 때면 잠자기를 포기하고 서성대다가 결국 집중도 안 되는 책을 펼쳐 들곤 했었다.

어제 깨다 자다 했을망정 그나마도 잘 수 있었던 건 모두 도훈이 곁에 있어준 덕분이었다.

거칠게 두근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속 뒤척대던 수안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쌕쌕거리던 수안이 기어코 침대를 벗어났다.

무작정 아래층으로 향하는 수안의 얇은 원피스 잠옷 끝자락이 살랑대며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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