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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래도 첫날밤인데 (21/88)

21. 그래도 첫날밤인데

“아저씨?”

“왜 또? 난 귀가 예민한 편이니까 말 그만하고 자. 잘못하면…….”

“뭐, 아저씨도 콱 물어버릴 거라고요?”

“그건 기본이고. 물고 안 놓는 수가 있어.”

허업! 뭔데, 뭔데에? 저렇게 살벌한 말을 왜 이토록 달콤하게 하는 건데?

말을 못 하게 하려면 도대체 어디를 물고 놓지 않아야 하는 거야? 어머, 어머, 이 아저씨, 뭐야아.

홀로 얼굴을 붉히고 발을 동동대던 수안이 결국엔 고개를 휘휘 젓고는, 도훈으로부터 꿈지럭꿈지럭 등을 돌렸다.

“그래도 첫날밤인데 좋은 꿈꾸라고 할랬더니…….”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도훈은 묵묵부답이었다.

도훈의 체중을 버텨내느라 고생하는 침대만 삐걱삐걱 비명을 토해냈다.

그녀의 목 뒤로 놓인 팔뚝에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가 가라앉았지만, 수안은 미처 느끼지 못한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오늘 거기서 아저씨 얼굴 봤을 때 정말 좋았어요. 많이, 아주 많이 고마워요.”

수안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도훈의 커다란 손에 손가락 끝을 살짝 가져다 대며 내내 전하고 싶었던 말을 작게 속삭였다.

너무 작게 말해서 못 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즈음, 그의 손가락이 구부러져 그녀의 것을 감쌌다.

움찔거리던 수안의 입꼬리가 그예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등 뒤에서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도훈의 입술도 엇비슷한 모양새로 휘었다.

“근데 아저씨, 코를 심하게 곤다거나 이를 악랄하게 간다거나 하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특이한 잠버릇이 있는 건 아니죠?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좀 예민한 말초신경을 가지고 있긴 한데…….”

“백수안, 확 물어버리기 전에 그만 자라.”

“윽, 알뜰하게 써먹기는.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하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으음,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계속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그래.”

수안이 들어본 중 가장 확실한 의미의 ‘그래’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얕게 잡은 손이 더 깊게 맞물렸고, 올 것 같지 않던 잠은 야금야금 자리를 넓혔다.

그야말로 손만 잡고 자는 첫날밤이었다.

***

경찰서 앞에서 대기 중이던 재식이 차에서 내리는 도훈에게로 부리나케 다가갔다.

“이자현은 만나봤습니까?”

“네. 계속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백기석 쪽 변호사와 잠깐 접촉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때 언질을 받은 모양입니다.”

잠시 말을 끊은 재식이 무심해 보이는 도훈의 눈치를 살핀 뒤 보고를 이어나갔다.

“구속영장실질심사 들어갔고, 이변이 없는 한 백기석은 내일 오전 중으로 풀려날 겁니다. 아무래도 수안 양이…….”

“안 됩니다. 그 상황을 되짚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담한 척 굴었던 수안은 밤새 놀라서 깨어났다가 다독이는 손길에 간신히 다시 잠에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몸 곳곳에 입은 타박상은 시일이 지나면 말끔하게 나을 상처였지만, 심리적으로 입은 상처는 쉽게 치료되지도, 말끔하게 잊히지도 않을 터였다.

온전히 보호해 주지 못한 것도 안타까워 미칠 지경인데, 끔찍했을 그 순간을 다시 곱씹게 할 수는 없었다.

이 회장을 닮아 제법 강단 있어 보이는 수안은 사실, 조그만 위협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모르긴 몰라도 백기석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수안은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을 터였다.

게다가 납치나 폭행 혐의로 기석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는 힘들었다.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일에 수안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기석과 마주한 수안이 벌벌 떠는 꼴을 또다시 보게 된다면, 이번엔 이성을 온전히 붙잡아둘 수 없을지도 몰랐다.

“백기석 접근금지가처분신청이 가능한지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이자현과 자리 좀 마련해 주세요.”

“네, 사장님.”

경찰의 양해를 얻어 취조실로 들어섰을 때, 탁자 아래로 손을 늘어뜨린 자현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최 소장은 분명 30대 후반이라고 했는데, 하루 사이 초췌해진 얼굴 때문인지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뭘 알고 싶은지 몰라도, 난 더 이상 할 말 없어.”

앙칼지게 쏘아붙이고 있었지만, 자현의 목소리엔 은근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자현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던 도훈이 탁자 위로 명함 한 장을 내려놨다.

차도훈이라는 이름과 휴대폰 번호만 표기된 명함을 힐끔 쳐다본 자현이 무감한 표정의 도훈을 올려다봤다.

원룸에서 수안을 품에 안았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표정에 자현은 잠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감정이 풍부했던 그 눈이 가짜였던가 싶을 만큼 자신을 바라보는 도훈의 눈빛은 건조하고 매서웠다.

어느 순간부턴가 음흉함이 담겨지기 시작한 기석의 눈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눈빛에 자현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매료됐다.

저런 눈빛을 가진 부류들을 잘 안다. 남을 지배하는 데 익숙한 인간들.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발아래 엎드려 애정을 갈구하게 만드는 매혹적이지만 위험한 눈빛.

기석의 눈도 한때 저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어린 나이였고, 세상물정을 몰랐고, 검사인 기석은 휩쓸리듯 마음을 사로잡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뭐가 잘못된 건지 되짚어볼 여유 없이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리고 남은 건,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이용해 보려는 이런 치들뿐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꿈꿨던 삶을 많이 벗어났음을 알았지만, 이젠 다시 되돌아갈 방법조차 몰랐다.

그러니 발 담근 곳이 진흙탕 속인 걸 알면서도 그냥 가볼밖에 다른 수는 없었다.

“수안이 그 계집애 말 듣고 왔나 본데, 충격받아서 착각하는 거야. 그러니까 아무 죄도 없는 우리 기석 씨는 건드릴 생각 하지 마.”

자현은 명함을 툭 밀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눈살을 찌푸린 도훈의 관자놀이에 불끈 핏대가 섰다.

“미래를 약속받았습니까?”

도훈을 외면하고 있던 자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츠러들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이번 건만 잘 넘겨주면 집행유예든 뭐든 빨리 빼내주겠다고, 자신이 밖에 있어야 뭐든 할 수 있다며, 기석은 협박인지 애원인지 모를 메모를 변호사를 통해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것만으론 안심이 안 됐는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며, 이번 일 마무리되는 대로 식 올리자는 달짝지근한 미래까지 덧붙여 놨었다.

그걸 정말 믿느냐고?

이젠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오로지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녀에겐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다.

“필요하게 될 겁니다. 넣어둬요. 약속받은 미래가 불확실해질 때 연락해요.”

명함을 다시 반듯하게 밀어준 도훈이 아무 미련 없는 듯 돌아섰다. 순간 당황한 건 자현이었다.

“자, 잠깐만요. 지금 그 말, 내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건가요?”

내내 고수하던 반말 대신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존대 때문이었을까.

취조실 문을 그대로 나서려던 도훈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백기석이 내일 풀려날 겁니다. 그러면 남는 건 이자현 씨뿐이라, 내가 지금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탭니다.”

화가 났다 하기엔 무표정한 데다 상당히 건조한 말투였지만, 자현은 그의 눈빛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자현 씨가 제대로 죗값을 치르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생각입니다. 과연, 백기석도 이자현 씨를 구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까요?”

울림이 깊은 질문을 던진 뒤 도훈은 취조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번들거리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자현은 결국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꽉 움켜쥐었다.

***

수안이 멍든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최대한 가리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나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봉지를 얼른 뒤로 숨기며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뭐야? 뭔데 숨겨?”

“어? 어. 별거 아냐.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떡볶이랑 순대 좀 사왔는데……. 집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이런 건 아무래도…….”

“이런 집엔 뭐, 사람이 안 살고 특별한 게 살까 봐? 떡볶이랑 순대가 뭐 어때…… 백수안, 너 얼굴이 이게 뭐야? 어떤 놈이 이랬어?”

나미의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툴툴거리던 태경이 수안의 얼굴을 보고는 흥분해서 달려들었다.

머리로 가리면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거란 수안의 생각은 보기 좋게 어긋나 버렸다.

집의 규모에 놀라 허둥대느라 미처 수안을 살피지 못했던 나미도 뒤늦게 놀라 거친 숨을 삼키며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이럴까 봐 다음에 보자고 한 건데.

아침에 병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도훈은 이미 가고 없었다.

밤새 다독이는 손길을 느꼈기에 많이 섭섭하진 않았다.

사실 섭섭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도훈이 이미 예고했던 대로 김 비서가 최신 폰을 들고 다녀간 뒤, 경원 아줌마가 병실로 들이닥쳤다.

밤새 더 부어오른 수안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쳐 죽일 놈을 연발하다가 결국엔 눈물바람 하는 경원 아줌마를 달래느라 아주 곤욕을 치렀다.

그러곤 순번을 탄 듯 김 박사가 회진을 들어왔다.

며칠간 안정을 취하라는 당부와 함께 오후 퇴원을 허락받았다.

퇴원해서 집으로 오는 동안 걱정하고 있을 태경과 나미에게 톡을 했다.

형편없는 얼굴 때문에 창피하기도 하고, 또 해명하기도 마땅치 않아서 만나는 건 며칠 후로 미루고 싶었는데, 아무렇지 않다는 수안의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기어코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며 우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 몰골을 해서 밖에 나돌아 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두 사람의 반응을 보니 괜히 불렀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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