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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래 (20/88)

20. 그래

“왜? 할 말 있어?”

잡힌 소맷부리를 확 잡아채 버리면 부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가늘고 하얀 손가락을 바라보는 도훈의 시선은 차기만 했다.

용건이 뭐냐 묻는 말은 어찌나 시리게 들리는지, 하마터면 서러워서 울컥할 뻔했다.

“어 그게…… 폰, 내 폰 못 찾은 건가 해서요. 태경이랑 나미랑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텐데, 연락도 해줘야 하고, OT 알림 그런 것도 폰으로 올 텐데…….”

“네 건 못 찾았고, 내일 오전 중으로 김 비서가 새 폰 가지고 올 거야.”

“김 비서님이요?”

“그래. 뭐 더 궁금한 거 있어?”

도훈의 날카로운 눈길이 어서 놓으라는 듯 잡힌 소맷부리를 힐끔 쳐다봤다.

수안은 쭈뼛쭈뼛 눈치를 보면서도 구명줄마냥 꼭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더요? 음, 나 퇴원은 언제쯤 하는지…….”

“내일쯤 김 박사님이 따로 말씀 있으실 거야. 경원 아주머니 오실 거니까 퇴원은 따로 걱정할 거 없고.”

“아! 경원 아줌마.”

“뭐, 문제 있어?”

“아니요, 아닌데…….”

수안이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동그랗게 부풀린 눈으로 그를 말끄러미 쳐다봤다.

“그럼 이것 좀 놓지.”

어쩜 이렇게 사람이 매정할 수 있을까.

나미가 백발백중 통할 거라며 열을 올렸던 눈빛은 도훈에게 씨알도 안 먹혔다.

아기 고양이가 울고 갈 눈이라며, 너 눈 그렇게 뜨면 뭐든 안 들어줄 수가 없다고, 그래서 태경이도 네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까지 하는 거라며 뾰로통하니 투덜대던 나미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게 아니었다.

이 눈은 아무래도 친구들한테나 통하는 눈이었나 보다.

체념과 원망, 설움이 깃든 눈이 새치름하니 처졌다. 절대로 풀어질 것 같지 않던 손가락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소맷부리가 놓여나자마자 아주 미련 없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도훈.

터진 입술을 아픈 줄도 모르고 꽉 깨문 수안이 그예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늦은 시간이고 더없이 조용한 병실이라, 그녀의 움직임이 느껴졌을 텐데도 도훈은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것처럼 돌아보지 않았다.

거침없는 손길로 소파 앞 탁자에 놓인 서류와 태블릿을 정리한 도훈이 한쪽에 놓인 재킷을 막 집어 들려고 할 때였다.

“아저씨!”

수안이 절박하게 도훈을 불렀다. 하지만 도훈은 잠시 멈칫했을 뿐,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추지도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간결하게 ‘왜?’ 하고 물은 게 다였다.

“나한테 뭐 화났어요?”

“아니.”

“혹시 내가 일 방해해서 그런 거면…….”

“아니. 이깟 일은 상관없어. 문제는 너야, 백수안.”

손에 쥐었던 재킷을 내팽개친 도훈이 그제야 수안을 돌아봤다.

의도한 건진 몰라도 양손을 허리에 걸친 채 버티고 선 모습이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내가 뭘요?”

안 그래도 화끈거리던 눈에 눈물이 고인 건 순식간이었다.

난데없이 미움받는 것 같아 서럽고 아팠다.

“아저씨까지 왜 그러는데요? 간신히 참고 있는데 왜 자꾸……. 내가 뭐랬다고, 내가 진짜 뭐랬다고, 흐, 흐아아앙. 가지 마요, 아저씨. 옆에 있겠다며어? 나 무섭단 말이야. 흐으으으.”

“하아! 그래, 잘했어.”

흐윽, 우리 아저씬 정말 축지법을 익혔나 보다. 어느새 또 여기까지 와버린 걸까?

게다가 여전히 뭘 잘했다는 건지 모르겠는 칭찬에 답삭 끌어안기까지.

이러면 더 울고 싶어지는데, 나는 어쩌라고.

“흐윽, 진짜 안 울랬는데, 아저씨한테 동정받는 거 싫어서 정말 열심히 참았는데. 흐아앙.”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에도 북받치는 설움은 쉬이 멎을 줄을 몰랐다.

“누가 그런 쓸데없는 걸 열심히 하래?”

“동정받기 싫다구요.”

품에 갇혔던 머리를 반짝 쳐든 수안이 그를 흘기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수안이 불굴의 의지를 내비치거나 말거나, 도훈은 그저 그 모습 그대로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다가 코끝을 톡 칠 뿐이었다.

“흐응. 진짜, 애 취급은 더 싫구요.”

가뜩이나 서러워 죽겠는데, 또 어린애 취급인가 싶어서 수안은 울컥해 그를 밀어냈다.

밀리지 않을 거란 건 예상했지만, 어쩌면 이렇게 돌덩일까. 도훈의 가슴에 닿았던 그녀의 손만 괜히 민망했다.

“동정이건 애 취급이건, 이제 그거 못 해.”

무슨 뜻인지 아리송한 말에 수안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미 그렇게 돼버렸어.”

귀여운 주름이 생긴 미간을 무람없이 문지른 도훈이 이마 위로 흩어진 그녀의 잔머리를 쓸어 넘긴 뒤, 입술을 살포시 내리눌렀다.

흐느낌도, 눈물도, 숨결도 일시에 멈춰 버렸다.

제게 일어난 일이 무언지 깨닫기도 전에 눈치 빠른 심장이 혼자만 난리법석이었다.

입술은 곧 떨어졌지만 흔적이 낙인처럼 남아서 수안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버렸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품으로 당겨 안아 다독이는 도훈의 한숨 소리가 짙었다.

“겁먹게 해서, 아프게 해서, 좀 더 빨리 찾아내지 못해서 죄책감 들려고 하는데, 그거 없애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그러니까 무섭다고 엄살도 떨고, 빨리 좀 오지 그랬냐 투정도 부리고.”

뭐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가슴이 웅웅 울리는 걸 보면 꽤나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모든 감각이 촉각에만 집중된 듯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도훈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의 감촉만 선명했다.

생애 가장 멍청해져 버린 뇌는 이마와 뽀뽀 두 단어 외에는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날뛰다시피 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만도 버거워서, 도훈이 눕혀주는 대로 침대에 눕고, 뭘 묻기에 건성으로 답을 했다.

“그럼 옆으로 조금만 움직여.”

“네? 네에.”

도훈의 주문에 태엽 감긴 장난감처럼 착실하게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전개됐다.

“어어? 허업, 흡.”

당황한 수안이 왜 이러느냐 묻기도 전에 침대 위로 올라온 도훈이 목 밑으로 팔을 넣어 그녀를 안았다.

“재워달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면 어떡하나?”

기다란 손가락이 수안의 눈꺼풀을 아래로 훑어 내렸다.

잠시 눈꺼풀 안으로 숨어들었던 눈동자가 이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내가…….”

“그래, 네가 재워달라고 했지.”

귀가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웃음기 하나 없는 도훈의 목소리가 어쩐지 즐거운 것처럼 들렸다.

“그, 그래도 이렇게는…….”

“자장가 같은 건 바라지 마. 그런 낯간지러운 짓은 못 해.”

“아니, 그게 아니라요…….”

“쉿! 그만 자. 피곤하다.”

눈을 감은 도훈이 수안을 더 당겨 안으며 등을 토닥거렸다.

수안이 거친 숨을 삼키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건 아니라고, 이렇게는 안 된다고, 좁은 침대에서 딱 붙어서 어떻게 자느냐고 야무지게 따져 물으려고 했다.

그런데 올려다본 도훈의 얼굴이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깎아놓은 듯한 턱 위로 부드럽게 다물린 입술과 높게 솟은 콧날 너머에 짙게 드리운 속눈썹이 그린 듯 아름다웠다.

그의 품에 안긴 긴장감에 눈꺼풀마저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은 자신과는 달리 도훈은 너무나 평온했다.

곰인형을 안고 있어도 저렇게 편해 보이진 않겠다.

‘내가 무슨 친동생이야? 우리 완전 피를 나눴냐고? 그래도 명색이 부분데, 이렇게 끌어안고도 아무 느낌 없는 거냐고?’

“백수아안, 손 좀 가만히 둬.”

입을 삐죽이면서 그의 가슴께에 놓인 오른손을 꼼지락거리자, 나직하게 잠긴 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이대로는 못 자요.”

“나만 할까.”

한숨처럼 말을 뱉어낸 도훈이 토닥이던 손길을 멈추고 똑바로 눕더니, 한 팔을 이마 위로 올렸다.

아, 저놈의 이마.

다시 그 입맞춤이 생각나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의 입맞춤.

정신을 잃기 전에 이마에 닿았던 게 뭔지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좀 전에 이마에 닿았던 느낌과 일치했으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새삼 설레진 않았다. 이마에 입 맞추는 것쯤, 도훈에겐 머리를 쓰다듬거나 코끝을 튕기는 행위와 별다를 바 없는 게 분명했다.

아이에게 귀엽다고 뽀뽀를 하거나, 강아지가 예쁘다며 입을 맞추는 것과 전혀 다를 것 없는 행위에 그녀 혼자만 설레발 친 꼴이었다.

억울한 마음이 울컥 치솟았지만,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깟 어린애 장난 같은 뽀뽀가 무슨 대수라고 따지고 든단 말인가. 정작 따져야 할 건 주책없이 뛰어대는 제 가슴이었다.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 잦아지면서 처음에 가졌던 약간의 호감이 점점 농도를 더해간 건 사실이었다.

별로 말이 없는 그가 불편하지 않았고, 아주 가끔 가뭄에 콩 나듯 내보여지던 유머와 장난기도 좋았다.

더군다나 삼시세끼 밥 챙겨 먹듯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근사한 외모는 연애 경험 없는 소녀에게 달콤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믿어야 할 사람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간 한정이지만, 이 정도면 남편 잘 얻었다며 혼자서 실없는 생각도 했더랬다.

딱 그 정도의 호감이었는데, 아니, 딱 그 정도의 호감이라고 생각했는데, 감당 안 되는 이 두근거림은 대체 뭔데?

수안은 그새 잠이라도 든 건지 팔로 눈을 가린 채 고른 숨을 내뱉고 있는 도훈을 힐끔거렸다.

“아저씨, 내 말초신경은 좀 예민한가 봐요.”

잠든 줄 알았던 도훈이 팔을 살짝 치켜들고 무슨 엉뚱한 소리냐 묻는 듯 수안을 쳐다봤다.

“그냥 그렇다구요. 그러니까, 머리 쓰다듬는 것도, 코 이렇게 하는 것도 하지 말아요. 잘못하면 콱 물어버릴지도 몰라.”

“흠, 못된 강아지네.”

이마에 뽀뽀하지 말란 소리는 차마 하지도 못하고 으르렁거리듯 코를 찡끗 대자, 한 번 피식 웃어 보인 도훈은 다시 팔을 제자리로 돌려놨다.

정말 이러고 잘 모양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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