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너 예뻐
머리는 지끈거리고 목이 말랐다.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데다 팔이고 다리고 납덩어리를 매달아놓은 듯 묵직했다.
게다가 눈은 떠지지도 않았고, 입가는 말도 못 하게 아팠다. 그래서 아직 원룸에 갇혀 있는 줄 알았다.
어쩔 수 없는 막막함에 한숨이 새어 나오려던 그즈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소장님한테 받은 자료는 경찰에 다 넘겼습니까? ……하아, 이 팀장이 이자현을 직접 만나보세요. ……아니요, 여기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낮은 조명 아래 도훈의 음성이 은은하게 깔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어찌나 안심이 되는지, 하마터면 울음이 왈칵 터져 나올 뻔했다.
“아야!”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가 찌릿한 통증에 절로 앓았다.
“깼어?”
창을 향해 서 있던 도훈이 탁자에 놓인 스트로 텀블러를 들고 수안에게로 다가왔다.
“물 좀 마실래?”
“네.”
잠긴 목소리로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침대에 걸터앉은 도훈이 그녀의 목 밑으로 팔을 넣어 안아 일으켰다. 그러곤 스트로를 입에 가져다 댔다.
“내가 할게요.”
도훈은 텀블러로 뻗는 수안의 손을 피해 멀찍이 들어 올렸다가 다시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댔다.
하는 수 없이 그가 대주는 대로 물을 삼키는 수안의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도훈이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듯한 자세도 그렇거니와, 드레스셔츠 차림인 그에게서 단단한 감촉과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괜스레 정신을 잃기 전에 이마 위로 느껴졌던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생각나, 텀블러를 밀어낸 수안이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왜? 머리 아파?”
대뜸 수안의 손을 밀어낸 도훈이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덮었다.
당황한 수안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런 식의 가벼운 스킨십은 간혹 있어왔는데도, 어쩐지 지금은 조금 생소한 느낌이었다.
조금 더 간질거리고, 조금 더 몽글몽글한 느낌.
대체 뭐가 달라졌기에 이러는 걸까? 그때 이마에 닿았던 건 진짜 뭐였을까?
“어, 저기, 만져 본다고 아픈지 알 수 있을 거 같진 않은데.”
“그야 그렇지.”
암요, 이런 거는 열이 있나 짚어볼 때나 하는 거죠. 근데 수긍을 했으면 손을 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마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던 도훈의 손은 점점 영역을 넓혀 그녀의 눈가와 볼을 지나 입가까지 살피살피 매만졌다.
아마도 상처를 더듬고 있는 듯했다.
근데 이게 뭐랄까, 전혀 아프지 않은데 이상하게 아픈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할까.
부드러운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전기가 통하는 것마냥 찌릿찌릿했다.
진짜 왜 이러지? 나는 코만 예민한 게 아니라, 얼굴 전체가 예민한 걸까.
도훈의 손을 쳐내자니 너무 과민반응인 것 같고, 그렇다고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자니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발작을 한다.
“흠흠, 거울을 좀 볼까 봐요. 눈이랑 입가랑 부은 것 같은데, 보기 흉하죠?”
“음, 좀 그러네.”
어정쩡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수안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버렸다.
어후! 이 아저씨 진짜 어쩌지.
빈말 않는 성격인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배려마저 부족할 줄은 미처 몰랐다.
수안이 입을 뾰로통하니 부풀려서 도훈을 쳐다봤다.
“아저씨, 솔직히 말해봐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이삼 일 정도면 괜찮아질 거야. 거울은 그때나 보는 게.”
“아이 참, 그거 말구요. 아저씨 모솔이죠?”
“뭐?”
“그러지 않고서야 여자 마음을 이렇게 모를 리 없잖아요. 이럴 땐 아무리 보기 흉해도, 빵빵하게 부풀고 얼룩덜룩해서 오색풍선 같긴 한데 이렇게 예쁜 오색풍선은 본 적이 없어. 이렇게 딱……. 아니, 뭐,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그렇게 말해달라는 건 아니고요, 나중에 진짜 좋아하는 여자 만나면 그때는, 아.”
도훈이 그녀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전혀 아프지 않았음에도 수안은 도훈의 접촉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얼굴 전체에, 아니, 자신의 몸 전체에 차도훈 감지센서가 부착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 왜 자꾸 코를…….”
“예뻐서. 오색풍선까진 아니래도, 너 예뻐.”
“가, 갑자기?”
어리둥절해서 눈이 동그래진 수안을 본 도훈의 입술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치켜 올라갔다.
허!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흔치 않은 비주얼인 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도, 새삼스레 가슴이 설렐 만큼 미소 짓는 도훈의 모습은 황홀했다.
솔직히 말하면, 가슴은 이미 예쁘다는 말에 저만치 쿵 떨어졌다가 다시 치받쳐 올라오기를 반복하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미소 한 스푼까지 더해지니 완전 한도 초과였다.
이 아저씨 진짜 어쩌려고 이러지? 아니, 나는 진짜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너무나 공포스럽고 절망적인 순간에 거의 기적처럼 아저씨 얼굴을 마주했기 때문일까.
마치 아기 새가 처음 본 걸 어미로 인식하는 것처럼, 자신의 뇌에 아저씨가 새롭게 인식이 되어버린 걸까?
“에이, 말도 안 돼. 내가 무슨 새도 아니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린 말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도훈이 불쑥 허리를 숙여 그녀를 마주했다.
“으악, 왜, 왜, 왜요? 왜 이래요?”
“뭐가 말이 안 돼? 새는 또 무슨 소리고?”
경악하는 수안을 여상한 태도로 침대에 다시 눕힌 도훈이 심드렁하니 물어왔다.
“그냥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나 중환자도 아닌데, 자꾸 이렇게 안 해줘도 돼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고. 좀 더 자기나 해.”
“몇 신데요?”
“11시 좀 넘었어.”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며 시간을 알려준 도훈이 조명이 밝혀져 있는 소파로 다가가 태블릿을 들고 앉았다.
시간을 초단위로 쪼개 쓰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저기서 일을 할 모양인 듯했다.
항상 단정하던 앞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의 목깃에는 옅은 얼룩마저 보였다.
아마도 자신에게서 묻은 얼룩이리라.
불편해 보이는 소파는 아니었지만, 긴 다리를 꼬고 앉은 그에겐 그리 편해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 보이는 그에게 그만 가보란 말을 해야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웠다.
불과 몇 시간 전 마주했던 기석의 얼굴이 불쑥불쑥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도훈이 곁에 없으면 불안해서 잠은커녕 눈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이렇게 무작정 의지하게 되는 건 정말 싫은데, 하루만, 오늘 딱 하루만 도훈이 주는 평안함에 안주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이기적이 되어보기로 했다.
“아저씨, 나 잠이 안 와요.”
태블릿을 내려놓은 도훈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어디 불편해?”
“아니요, 그냥 좀…….”
자는 동안 도훈이 가버리지는 않을까, 혹시나 기석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든다는 소릴 차마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근데 나 어떻게 찾았어요?”
얼른 말을 돌린다는 게 도훈이 기적처럼 나타났던 그 순간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너한테 위치추적기 부착해 놨잖아.”
“진짜요?”
진짜겠냐?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 수안을 보며 도훈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피가 말랐던 그 순간을 어찌 다 설명할까.
백기석의 지시를 받은 이자현이 수안을 납치했을 거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중요한 건, 이자현이 수안을 데려간 장소였다.
도훈과 최 소장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투입했지만, 허탕만 치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도훈은 생애 처음으로 심장이 졸아드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위치추적기를 부착해 놓지 못한 걸 몸서리치며 후회했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기석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수안을 숨긴 곳은 이자현이 기석의 아파트로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낡은 오피스텔이었다.
이자현의 모친 명의로 되어 있었기에 최 소장도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곳이었다.
“폰도 뺏겼었는데, 위치추적기 어디에 달아놨었는데요? 그런 거 달아놨으면 말이라도 해주지. 그럼 좀 덜 무서…….”
터진 입가가 아파 입도 크게 못 벌리고 주절주절 떠들어대던 수안이 금기어라도 꺼낸 것처럼 흠칫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때의 그 끔찍한 공포와 두려움을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도 꺼려졌지만, 가뜩이나 애 취급인 도훈에게 동정까지 받게 될까 봐 속으로만 삭였던 감정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나약함을 들켜 버린 게 영 탐탁찮은 수안이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꼼지락꼼지락 자세를 바꿀 때였다.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렸나 싶었는데 어느새 도훈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곤 멍이 진 손을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백수안, 그냥 어리광 좀 부리지.”
역시나 애 취급.
“나 어린애 아니거든요.”
“어린애 취급하는 거 아니야.”
이런 마음으로 얘를 어린애 취급하면 자신은 범죄자나 다름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던 단계는 지나가 버렸음을 울먹이는 수안을 품에 안았던 그 순간 깨달았다.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처럼 뻥 뚫려 있던 가슴이 그녀를 품는 순간 비로소 완전하게 채워졌음을 느꼈을 때, 자신의 마음이 이미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아버렸다.
“오늘 겪은 일, 누구라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야. 외상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클 테고. 그런 걸 속으로만 묻어두는 건 좋지 않아.”
“그런 거 없어요.”
“흠.”
“그냥 조금 놀란 정도예요.”
“그렇군.”
간결하게 말을 뱉어낸 도훈이 쥐고 있던 수안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그럼 굳이 내가 여기 있을 필요도 없겠네.”
“네? 아… 네에.”
“그래, 그럼. 늦었으니까 자도록 노력해 봐.”
그래, 그럼?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냥 알았다는 소린 거야? 아니면 여기 있을 필요 없으니까 가겠다는 소린 거야?
어느 순간부턴가 수안에겐 도훈의 ‘그래’가 뜻을 분간하기 힘든 가장 애매모호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간결한 그 한마디에 세상 심란해지는 걸 도훈은 알기나 할까?
게다가 오늘은 돌아서는 모습에서 찬바람이 쌩하니 일었다.
아무래도 저 ‘그래’는 그만 가보겠다는 소리인 듯했다.
별안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조금 전에 무슨 말이 오가다가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건지 생각하면 할수록 아득해지기만 했다.
뭐가 잘못된 거야? 왜 간다는 거야? 가면 나는 어쩌라고?
혼자 남겨지면 끔찍한 공포가 덮쳐 올 것 같아 다급해진 수안은 아랑곳없이, 도훈은 느긋하게 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울상이 된 수안이 급하게 팔을 뻗어 접힌 소맷부리를 덥석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