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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설렘 (18/88)

18. 설렘

기석이 악다구니를 써대고 있었지만, 그저 왕왕거리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하, 한 번만 더 때리면.”

수안이 흔들리는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바닥을 짚은 팔이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다시 기석의 눈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을 거예요.”

기석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방 안은 태풍 전야와 같은 고요에 휩싸였다.

눅진하게 가라앉는 침묵이 불러일으킨 긴장감에 멀거니 서 있던 자현이 양팔을 손으로 쓸었다.

숨 막히는 정적을 깬 건 의외롭게도 기석의 웃음소리였다.

“흐흐, 하하, 하하하. 재밌네, 백수안. 이제야 좀 내 딸 같네. 네 엄마는 솔직히 좀 지루했거든. 우린 제법 잘 맞춰가며 살 수 있겠어. 그러자면 우선 귀찮은 문제부터 해결을 해야겠지?”

수안이 예상치 못한 기석의 반응에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그는 봉투에서 꺼낸 서류와 펜을 그녀의 앞에 내려놨다.

“사인해.”

수안의 시선이 서류로 향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여기저기 몸이며 얼굴이 쑤시고 아픈 데다가 극도의 긴장으로 인해 도리어 정신이 혼미했다.

사실 서류의 내용이 제대로 보여서 사인할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민망할 정도로 떨리는 손 때문에 펜을 들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차도훈이 그놈이나 이주은이나 한다는 짓하고는, 쯧. 괜히 일만 번거롭게 만들고. 살펴볼 것도 없다. 사인이나 해.”

수안이 기석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우악스럽게 손이 잡히고 강제로 펜이 쥐어졌다.

“차도훈이 완전히 망가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허튼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여우 같은 이 회장 약점도 쥐고 흔들었던 나야. 애송이 하나쯤 엮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 명심해.”

칼날처럼 날아와 박히는 말들을 들으며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어른거리는 글자들을 보고 있던 수안이 강제로 쥐어진 손을 풀어 펜을 툭 떨어뜨렸다.

“바, 방법이 없는 거죠?”

떨어진 펜이 서류 위를 구를 때부터 구겨지기 시작했던 기석의 미간이 험악할 정도로 치솟았다.

“엮을 방법이 없으니까 저를 납치한 거잖아요.”

예리한 수안의 지적에 허를 찔린 기석이 잠시 멈칫했다.

수안의 말이 맞았다. 차라리 이 회장을 상대하는 게 쉬웠다고 느껴질 정도로 도훈은 엮을 만한 약점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때도 말했지만, 사랑해서 결혼했어요. 그러니까 여기엔 사인 못 해요.”

목소리도 손도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말은 그녀의 의지를 담아내듯 제법 또렷했다.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따귀라도 올려붙이지 않을까 싶었던 기석은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서류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수안아,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문 기석이 볼펜을 집어 들어 손가락 사이에 끼고 이리저리 돌리며 손장난을 쳤다.

“널 보호해 줄 사람은 나뿐이란다. 그러니까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으윽!”

수안의 손을 낚아챈 기석이 볼펜을 강제로 쥐게 한 뒤 꽉 움켜쥐었다.

욱신거리는 고통을 이기지 못한 수안이 얕게 앓는 소리를 뱉어냈다.

“수안아, 네 유일한 가족은 나야.”

다정한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억센 손길이 수안의 손을 서류 위로 억지로 끌어다 댔다.

“차도훈은 필요에 따라 너를 얼마든지 버릴 수 있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다. 알겠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기석의 말에도 손에도 온기가 가득했다. 수안은 그게 더 소름이 끼쳐 오히려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이제 모든 걸 되돌릴 시간이야.”

덜덜 떨리는 손을 물리면 다시 끌어다 대고, 움찔거리며 빼면 우악스럽게 움켜쥐는 실랑이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기석은 숨 한 번 흩트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려울 거 없어. 너는 여기 사인만 하면 돼. 혼인무효소송 들어가면 차도훈 따위는 네 인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어. 넌 그저 내가 설계해 둔 인생을 살면 돼.”

옥신각신하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기석의 말에 흠칫 몸을 굳힌 수안이 고개부터 가로젓고 봤다.

“시, 싫어요.”

퍽!

“아악.”

수안의 부정이 떨어지기 무섭게 관자놀이 부근으로 커다란 손이 날아들었다.

기석의 예고 없는 폭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3년간의 공백이 그녀를 방심하게 만들었는지, 느껴지는 충격은 너무나 참담했다.

“뭐가 문제인지 아니? 네 엄마나 너나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거야.”

살벌하게 벼려진 말 사이사이, 그보다 더 살벌한 손찌검이 이어졌다.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것들이 말이라도 잘 들어야 할 거 아니야. 왜 자꾸 내 앞길을 막으려 드는 거냐고!”

뚝뚝 끊어지던 말이 종내에는 격한 고함으로 변하는 동안, 기석의 손은 화풀이라도 하듯 마구잡이로 휘둘러졌다.

시간도 공간도 순식간에 이지러지고, 그녀는 과거의 한때로 내박쳐졌다. 짙은 공포가 엄습했다.

폭력에 노출된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기석이 만들어놓은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그곳으로는 다시…….

관목들 사이에서 도훈과 웃음을 나누었던 그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조금 속상하고 많이 설레었던 스무 살의 첫날.

가능하다면, 스물한 살의 첫날도 스물두 살의 첫날도 그와 함께 맞이하고 싶었다.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으니 그것만, 그것 하나만 바랐다.

학교에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렸던 순간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고통에 잠식되어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차라리 의식이라도 흐려졌으면 좋겠다고 자포자기한 순간 기적처럼 초인종이 울렸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기석도 수안도, 심지어는 폭행 장면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자현마저도 일순 굳어져 버렸다.

절실함의 차이였을까.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을 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움직인 건 수안이었다.

“살려, 읍.”

하지만 잽싸게 팔로 그녀의 얼굴을 휘감은 기석에 의해 입이 막혀 버렸다.

“자현아, 얼른 가봐.”

마구 몸부림을 치는 수안을 꽉 끌어안다시피 제압한 기석이 자현에게 고갯짓을 했다.

매무새를 다듬은 자현이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실내 소독 나왔습니다.”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숨을 토해낸 자현이 기석을 한 번 힐끔 돌아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좀 곤란해요. 다음에 할게요.”

“사모님, 그러지 마시고 문만 열어주세요. 잠깐이면 끝납니다. 바퀴벌레 나온다고 민원이 하도 많이 들어와서 저희가 아주 죽겠습니다.”

“이 집엔 바퀴벌레 없어요. 그냥 가시라고요.”

“죄송하지만 그럼 사인이라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거 안 받아가면 제가 곤란해지거든요. 문 조금만 열어주시면 틈새로 실내소독확인서 넣어드릴 테니까, 소독 원치 않는다고 기재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얼른 사인해 주고 보내. 백수안, 가만있지 못해?”

몸부림치는 수안을 감당하기 힘든 듯, 작게 소곤거리는 기석의 숨결이 거칠어져 있었다.

기석의 다그침에 다시 한번 옷을 정돈한 자현이 조심스럽게 잠금쇠를 돌렸다.

쾅!

자현이 미처 문을 열기도 전에 활짝 열어젖혀진 현관문이 벽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놀란 자현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다가 현관 턱에 걸려 볼썽사납게 주저앉고 말았다.

불쑥 안으로 들어서는 훤칠한 사내를 보고 흠칫 놀란 기석이 재빨리 수안을 휘감고 있던 팔을 풀었다.

흐느낌과 앓는 소리가 뒤섞인 숨결이 수안에게서 툭 터져 나왔다.

긴장감이 일시에 풀려 버리자,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흑, ……저씨.”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단숨에 수안과의 간격을 좁힌 도훈이 기석을 거칠게 밀어내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른 품에 파묻혀 수안은 잘게 떨며 여리게 흐느꼈다.

곧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만들어내는 발자국 소리가 작은 원룸 안을 가득 채웠다.

“백기석 씨, 백수안 씨 납치 및 감금 폭행 현행범으로…….”

“잠깐. 뭔가 착각했나 본데, 현행범은 저쪽이오. 나는 이자현의 협박 전화를 받고 딸을 구하러 온 것뿐이오.”

“기, 기석 씨, 그게 무슨…….”

“가벼운 스토킹으로 끝냈어야지. 어쩌자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우리 수안이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잖아!”

안타까움이 짙게 베인 것 같은 기석의 말에 도훈의 품에 파묻힌 수안이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다 거짓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극심한 고통과 피로감으로 인해 말하기조차 힘이 들었다.

피가 터지고 붓기 시작한 입술 새로는 끊길 듯 이어지는 흐느낌과 앓는 소리만이 간신히 새어 나올 뿐이었다.

“알아. 다 알고 있으니까 그만해도 돼.”

낮게 가라앉은 도훈의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화를 억누른 것 같은 목소리는 다정함 없이도 그저 따스하기만 했다.

수안을 품 안으로 더 당겨 안은 도훈이 기석을 둘러싸고 있는 형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황상 두 사람 다 연행해야 할 겁니다.”

“차도훈 너 이……. 하아. 이봐, 나 서울지검 백기.”

“저희 쪽에서 따로 조사한 것도 있으니, 곧 사람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태성그룹의 상속녀와 관련된 일이니 만큼 그룹 차원에서 세밀하게 살필 계획입니다. 부디 철저한 조사 부탁드립니다.”

“아, 물론 그래야죠. 들었죠? 백기석 씨, 얼른 일어나세요.”

기석의 말을 끊은 도훈이 최대한 정중하게 건넨 말에 형사 중 한 사람이 호쾌하게 동의하며 기석을 잡아 일으켰다.

“이거 놓지 못해?! 나 서울지검 부장검사 백기석이야! 그리고 쟤는 내 딸이라고. 미쳤다고 내 딸을 납치해? 모두 저 여자 짓이라니까!”

“흠, 검사님이라면 잘 알겠구만 왜 이러실까. 진술은 서에 가서 하시고, 초면에 반말은 삼가시고. 알겠습니까? 영감님.”

끌려가지 않으려는 기석과 형사의 실랑이가 계속 이어졌지만, 이미 의식의 반은 놓아버린 수안의 귀엔 그저 소음일 뿐이었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름과 동시에 귓가로 스며든 도훈의 나직한 속삭임만이 온전하게 남았다.

“병원으로 갈 거야. 겁먹지도 말고, 걱정하지도 말고. 옆에 있을게.”

일정 브리핑을 하는 것 같은 무뚝뚝함이 조금은 서운할 법도 하건만, 옆에 있겠다는 마지막 말이 빚어낸 울림에 수안은 피가 엉킨 입으로 그예 미소를 짓고 말았다.

살짝 지은 미소만으로도 입가가 욱신거리는 걸 보면 생각보다 상처가 깊은 듯했다.

가물가물 까라지는 와중에도 보기 흉하겠구나 싶어서 조금이라도 가려볼까 비비적대는데, 이마 위로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뭐가 닿은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주책없이 가슴이 설레었다. 흐려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들어놓고 싶을 만큼, 딱 그만큼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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