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되돌릴 수 없는 것 (17/88)

17. 되돌릴 수 없는 것

두려움과 긴장감이 분노로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저 입을, 주은에게 상처를 안겼을 저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포악함이 짧은 순간 온 신경을 장악했다.

오로지 눈앞의 여자를 상처 입히고 싶다는 마음만이 수안을 가쁘게 짓눌렀다.

하지만, 마음이 아무리 잘 벼려졌다고 해도 몸의 문제까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때문에 휘청거리던 몸이 급격하게 앞으로 쏠리며 여자를 덮쳤다.

여자의 입에 미처 닿지 못한 수안의 손이 어깨 부근을 턱 짚었다.

경악이 깃든 여자의 눈이 수안의 시야를 가득 채움과 동시에 몸이 앞으로 확 기울었다.

“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의자에 앉은 여자가 뒤로 넘어갔다. 중심을 잡지 못한 수안도 여자와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다리가 덜렁 들리고 관자놀이와 어깨가 바닥에 세게 부딪쳤다. ‘윽’ 하는 신음이 절로 새 나왔다.

가뜩이나 지끈거리던 머리가 울려서 어질어질했다.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는 수안의 아래에서 여자가 힘없이 앓는 소리를 냈다.

‘텅’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부딪쳤으니,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도 다행일 터였다.

여자의 몸이 완충제 역할을 한 덕에 수안은 그나마 고통이 덜했다.

하지만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자가 딱하다거나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채 가라앉지 않은 포악함이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번쩍 치켜든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앙칼지게 날이 선 눈엔 물기가 찰랑찰랑 고였고, 되게 물린 입술엔 핏기가 맺혔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만큼 울분이 솟구쳤지만, 여자를 때릴 수가 없었다.

머리를 움켜쥔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끔찍한 기억들이 겹쳐졌다.

대항할 힘이 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 그건 기석이 즐겨하는 짓이었다.

여자가 정말 미웠지만, 증오해 마지않는 백기석과 같은 부류가 될 수는 없었다.

거친 숨을 몇 번이나 토해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결국엔 주먹 쥔 손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그러곤 퍼뜩 든 생각.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얼른 마음을 추스른 수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현관을 코앞에 두고 억세게 발목이 잡혀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윽!”

“어딜, 도망가?”

의자와 함께 널브러진 채 끙끙대고 있었던 여자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악스럽게 수안의 발목을 틀어쥐었다.

당황한 수안이 버둥거리다가 공교롭게도 잡히지 않은 발이 그녀의 턱으로 날아갔다.

퍽!

“으악.”

여자의 목이 뒤로 꺾이고 발목이 놓여났다.

엉덩이를 비비적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수안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기 직전 돌아본 여자는 턱을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잡히면 끝장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현관문 너머에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여길 벗어나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누군가 버티고 있다면 몸으로라도 밀어붙일 각오로 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수안은 한 발짝도 더 떼지 못하고 놀란 숨을 삼킨 채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최악을 바라지 않았건만, 수안을 기다리고 있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었다.

어스름하게 들이치는 빛을 등지고 선 기석은 음영을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저승사자가 실재한다면 흡사 저런 모습일 듯했다.

“3개월 만에 만난 아빠한테 인사도 안 하니?”

안으로 불쑥 들어서는 기석을 피해 달아나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수안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잡아먹힐까 겁나는 것처럼 창황한 시선을 기석에게서 떼지 못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기석이 등 뒤로 현관문을 닫았다.

철컥 돌아가는 잠금쇠 소리에 어깨를 들썩거린 수안이 뒤로 주춤 물러났지만, 거세게 날아드는 기석의 손을 피하긴 역부족이었다.

짝―!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뺨을 맞은 수안이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귀에서 ‘윙’ 소리가 나고 입에선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건방진 계집애. 네까짓 게 감히, 그놈 편을 드는 것도 모자라서 나한테 반항을 해?”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안의 머리를 기석이 툭툭 쳤다.

“뭐? 첫눈에 반해서 사랑을 해? 그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릴 내가 믿을 거라 생각했니?”

씹어뱉듯 토해내는 말이 뚝뚝 끊어질 때마다 기석의 손길은 점점 더 매서워졌다.

다리를 끌어 모아 몸을 한껏 웅크린 수안은 앓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고통에 울부짖거나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때 기석의 가학성은 더욱더 폭발하곤 했다.

그러니 대항할 수 없다면 묵묵히 고통을 견뎌내는 게 최선이었다.

“기석 씨, 대충 해요. 괜히 흠집 나서 좋을 거, 아악!”

아양을 떨 듯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찰싹’ 하는 마찰음과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얹어졌다.

“입 닫아, 이자현. 나 아니었으면 이 계집애 놓칠 뻔했잖아.”

화끈거리는 뺨을 손으로 감싼 자현이 화를 쏟아내는 기석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봤다.

기석이 젠틀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착각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였다.

대학을 막 졸업한 사회 초년생인 자현의 눈에 더없이 커 보였고 완벽하게 멋져 보였던 기석은 순수한 열망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었다.

사랑이라고 믿었었다. 아니, 분명 사랑했었다.

이주은보다 먼저 만나지 못한 게 한스럽다는 기석의 말에 그와 자신은 어떻게든 맺어져야 할 운명이라 생각했었다.

유부남이라는 그의 상황은 그녀에게 주체하기 힘든 갈망을 불러일으켰고, 기석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랑을 갈구했다.

그게 사랑인지 집착인지 자신조차도 헷갈려갈 즈음, 접대를 핑계로 난잡한 술자리를 즐기는 기석을 목격하고 말았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아니었다.

네가 뭔데 참견이냐는 뻔뻔함과 매서운 폭력.

그녀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사랑은 이미 끝난 뒤였고,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로 날아들었던 그 순간 젊음을 고스란히 바친 순정마저도 시궁창에 처박혀 버렸다.

그럼에도 자현은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기석의 야망은 익히 아는 바였고, 그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더 높은 곳에 오를 게 분명했다.

그게 어디가 됐건, 또는 언제가 됐건, 그 옆자리는 자신의 차지여야 했다. 그래야 어느 정도 계산이 맞았다.

어떡해도 돌려받지 못할 청춘에 대한, 처참하게 더럽혀진 사랑에 대한 보상이 그 정도는 돼야 맞았다.

그가 사랑이 아니듯, 그녀 또한 이제 온전히 사랑일 수만은 없었다.

흠, 이깟 손찌검쯤 얼마든지 참아준다 이거야. 화려한 미래가 보장된다면 못 견딜 것도 없지.

“미안해요. 내가 잠깐 방심했어. 그래도 이제 화 좀 가라앉혀요. 당신 요 며칠 저 계집애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우리 빨리 끝내고 좀 쉬어요. 응?”

어르고 달래듯 조심조심 말을 건넨 자현이 그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가슴을 살짝 밀착시켰다.

화로 들끓던 기석의 시선이 블라우스를 팽팽하게 부풀린 자현의 가슴으로 향하는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한차례 헛기침을 뱉어낸 기석이 한쪽 입꼬리를 설핏 끌어 올렸다.

모로 누운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수안이 피식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여자의 유혹에 금세 수그러드는 기석의 모습에 실망했다가, 아직도 실망할 만큼의 기대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잘못을 빌고 또 빌었던 엄마의 얼굴이 자현의 얼굴과 대조되어 눈앞에 둥실 떠오르는 순간, 억세게 머리채가 잡혔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터라 ‘윽’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한가하게 웃음이나 흘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러니? 수안아.”

두피가 아플 정도로 머리채를 움켜쥔 기석이 자신을 향해 수안의 얼굴을 고정시켰다.

그러곤 아픈 줄도 몰랐던 그녀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의 손짓이 너무나 다정해서, 수안은 도리어 숨이 막혔다.

“이런, 피가 났구나. 그러게 못된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뭐, 사춘기의 반항 한 번쯤은 눈감아줘야겠지?”

뽑힐 것같이 욱신거리던 머리칼이 놓여났다.

힘없이 축 처지는 머리 위로 기석의 손이 두어 번 툭툭 내려앉았다.

그 작은 다독임에도 익숙한 공포를 기억하는 몸이 움찔움찔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거 알아. 이주은과 차도훈의 농간에 놀아난 거야. 그렇지?”

쪼그려 앉은 기석이 수안의 턱을 잡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대답 안 하니?”

기석의 재촉에 수안은 도리어 입술을 꼭 맞붙였다.

예전 같았으면 더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석이 원하는 대답을 착실하게 안겼을 테지만, 이제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석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그녀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지만, 잘못한 것도 없이 용서를 빌고 애원하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신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도훈에게 맥없이 제압당하던 기석을 본 순간, 도훈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내 집에서 나가라고 말했던 그 순간, 수안의 마음은 이미 전과 달라져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껍질을 깨고 겨우 한 발짝 뗐을 뿐이었지만, 다시 껍질 안으로 끌려 들어가 웅크리기엔 욕심도 희망도 너무 많이 커져 버렸다.

이왕 깨고 나온 거, 더 망가지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부딪쳐 봐야 했다.

그래야 죽음 앞에서도 그녀의 미래만 걱정했을 엄마에게,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곁을 내준 도훈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음을 굳힌 수안이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기석을 똑바로 마주했다.

짙게 일그러지는 기석의 미간에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수안은 마주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원하는 게, 뭐예요?”

“하! 어디서 건방지게 눈을 똑바로 뜨고…….”

퍽.

큼지막한 손이 귀 옆을 후려쳤다. 꼬꾸라질 듯 머리가 꺾이고 귀가 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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