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수안이 위험하다
그리 거세게 부딪친 건 아니라 도훈은 약간 비틀대는 정도에서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휴대폰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 도로 위로 떨어졌다.
“어이쿠! 저런. 그러게 왜 자꾸 일어나래? 가뜩이나 차에 치여서 머리도 어질어질하니 죽겠구먼.”
머리를 부여잡고 어지러운 듯 비틀대다가 다시 주저앉으려는 남자의 팔을 강한 손이 거세게 움켜쥐었다.
“이왕 일어난 거 그만 차에 탑시다.”
“내, 내가 차를 왜 타? 젠장, 어디다 명령이야? 내가 우스워? 응? 돈 많은 놈들은 다 이러나? 이거 잘하면 협박도 하겠어?”
“그게 통할 것 같으면 이제라도 좀 해볼까요?”
“에에, 무, 뭐를요?”
정중한 말투와 간담이 서늘해지는 눈빛 사이의 괴리감이 남자를 절로 주눅 들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눈빛이 저만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반말은 저도 모르게 쏙 들어가 버렸다.
“협박.”
도훈의 나직한 한마디가 남자의 귓가를 스친 뒤 곧 흩어져 버렸다.
흠칫한 남자가 입을 벌린 채 쳐다보는데도 아랑곳없이 도훈은 도로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서 살폈다.
액정이 박살 난 휴대폰은 완전 먹통이었다.
남자가 아무리 찧고 까불어도 변함없던 도훈의 얼굴에 미세하지만 균열이 생겼다. 굳어진 그 표정에 남자는 섬뜩함을 느꼈다.
에이 씨, 완전 최신 폰이던데, 설마 물어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 데도 연락 못 하게 하래서 일부러 망가뜨린 건데, 폰 값은 그 검사 놈한테 받아내면 되려나?
허흡, 아니지, 지금 폰 값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젠장, 뭔 눈빛이 저렇게 살벌해.
자신을 바라보며 까딱하는 도훈의 고갯짓에 남자는 몸부터 흠칫 떨었다.
“뭐, 뭐요?”
“쇼 타임은 끝났습니다. 그만 차에 타죠.”
눈빛만큼이나 단호하고 강압적인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남자가 한 발 주춤 물러났다. 꼭 맹수한테 물려봐야 맹수가 무섭다는 걸 아는 건 아니었다.
“쇼라니, 내가 언제, 허업.”
훌쩍 다가서서 조수석 문을 열어젖히는 도훈 때문에 놀란 남자가 거친 숨을 들이켰다.
“내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여기서 가장 가까운 경찰서로 갈 겁니다. 거기서 조사받고 있으면…….”
“자, 잠깐.”
도훈이 시간을 확인하며 빠르게 말을 쏟아내자, 다급해진 남자가 말을 툭 잘라냈다.
“사고는 그쪽이 냈는데, 왜 내가 조사를 받아? 지금 돈 좀 있다고 공권력을 막 제 입맛대로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인가 본데, 경찰? 하! 이거 어쩌나. 내 뒤는 검사 양반이 봐주고 있다고.”
순간 도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그저 단순한 자해 공갈협박범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검사 양반이라는 말에 도훈의 신경이 순식간에 곤두서 버렸다.
“검사라면 나도 좀 아는데.”
“흠, 알아봤자 일개 평검사겠지. 나는 자그마치 부장검사야. 뭐, 그보다 높아?”
슬쩍 떠보는 도훈의 말에 남자가 비아냥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도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남자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백기석 검사가 시킨 건가?”
백기석이라는 이름에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남자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버티고 선 도훈을 밀치더니 냅다 줄행랑을 쳤다.
도훈은 잡고 있던 조수석 문을 놓치며 잠깐 휘청했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는 차 문을 닫았다.
달아나는 남자를 뒤쫓아 잡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은 남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서 새나간 건지 몰라도, 도훈이 수안의 졸업식에 참석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낸 백기석이 남자를 보낸 게 분명했다.
짐작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수안이 위험하다.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졸업식임을 고려해 학교 안에서의 밀착경호를 지시하려다가 그만둔 자신의 결정이 후회스럽기 그지없었다.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건네고, 괜찮으면 사진 한 장 찍는 그런 평범한 졸업식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괜한 욕심이 불러일으킨 위험이었다.
얼른 운전석에 올라 급하게 차를 출발시키며 부지불식간에 휴대폰을 찾아 한 손을 더듬대던 도훈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쯧, 핸드폰도 일부러, 젠장.”
엄청난 빠르기로 도훈이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졸업식을 마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줄지어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차 옆에서 서성이고 있는 현진을 발견한 도훈이 주차랄 것도 없이 대충 차를 세우고 달려갔다.
“아, 사장님 오셨어요.”
“수안이는?”
“그게 아직…….”
“어? 언니, 왜 여기 있어요? 수안이랑 같이 안 갔어요?”
도훈과 현진의 시선이 태경과 함께 교문을 나오다가 쪼르르 달려오며 말을 건네는 나미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수안이가 어딜 갔는데?”
묻는 현진은 다급했고, 다가서는 도훈의 기세는 사나웠다.
“어, 어떤 여자가 사장님이 보냈다면서 데려갔는데요.”
미간을 일그러뜨린 현진이 도훈을 돌아봤다. 한차례 마른세수를 하는 그의 얼굴에 낭패감이 깃들었다.
“핸드폰 있습니까?”
“아, 예. 여기요.”
“최 소장님 번호 눌러줘요.”
현진은 통화 버튼을 누른 휴대폰을 도훈에게 건넸다.
“최 소장님, 차도훈입니다. 수안이 납치됐습니다. 백기석 현재 위치 확인해서 이 번호로 연락 좀 주세요. ……거기로는 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이자현, 그 여자 위치도 확인해 주세요. ……네. 최대한 빨리요.”
***
온전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섬뜩한 추위부터 몰려왔다.
몸을 한껏 웅크린 수안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만 좀 일어나지 그러니. 추워죽겠다.”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자신을 암흑 속으로 몰아넣었던 단발머리의 여자.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묵직했다. 눈꺼풀조차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수안은 사력을 다해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딘지, 단발머리 여자는 대체 누군지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앞코가 뾰족한 여자의 구두였다.
수안은 관자놀이가 쿡쿡 쑤셔오는 걸 무시하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제 마음 같지 않았지만, 다행히 손발이 묶이거나 눈이 가려진 건 아니었다.
달랑 하나뿐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를 지나쳐 주변을 휘둘러봤다.
크지 않은 창으로 스며든 어슴푸레한 빛이 자그마한 원룸을 채우고 있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지, 수안이 쪼그려 앉은 바닥은 차디찼다.
“좀 썰렁하지?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니까 되도록 빨리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술이 새로 이사한 집 소개라도 하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당신, 뭐예요?”
겨우 한마디를 뱉어놓고 수안은 욱신거리는 머리 때문에 입술을 짓씹어야 했다.
“흠, 암만 봐도 닮은 구석이 없다 했더니, 징징대지 않는 거 보면 확실히 기석 씨 딸이 맞는 것 같네.”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수안은 흠칫 몸을 떨었다.
혹시나 했던 짐작이 역시나가 되는 건, 어쩐지 좀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니?”
귀찮은 듯 심드렁한 물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수안의 귀에는 자신이 누군지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힘없이 고개를 저어버리고 말았다.
기석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여자의 정체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수안의 시선은 이내 여자에게서 벗어나 6평 남짓 되는 원룸을 훑었다.
여자가 등지고 있는 창은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몇 층일까? 이 여자뿐인가? 밖에 다른 사람이 있으려나? 신발, 내 신발은 어디 있지?’
시선의 이동에 따라 의식도 물 흐르듯 흘렀다.
무뎌진 감각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필요 이상으로 뛰어대고 있었다.
쿡쿡 쑤셔대는 머리, 쿵쿵 뛰어대는 심장, 쌕쌕대는 숨결, 제 마음 같지 않은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딱!
현관문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던 수안의 눈앞에서 여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어딜 봐? 사람 앞에 놓고 멍 때리는 건 이주은이랑 똑같네.”
“엄마를, 알아요?”
입을 한 번 삐죽거린 여자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한 남자를 공유한 사인데,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 안 그러니?”
수안은 툭 터져 나오려는 거친 숨결을 막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여자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나온 순간 두 사람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엄마가 당신을 만났어요?”
“이제 와 그게 중요하니? 어차피 세상에 없는.”
“엄마가 당신을 만났냐고 묻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과 그…….”
“기석 씨와의 관계를 알았냐고? 물론이지. 그게 서로 편할 거 같아서 내가 친절히 알려줬지. 기석 씨하고 있을 때 이주은 전화 오는 거 정말 짜증 났거든.”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릅뜬 눈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리문 이가 으드득 소리를 내면서 어긋났다.
다른 건 보이지도 않았다. 붉은 립스틱이 칠해진 여자의 입술만 눈에 들어와 박혔다.
저 입이 쏟아냈을 끔찍한 말들에 엄마는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그 상처를 그대로 떠안고 갔을 엄마가 수안의 가슴을 헤집었다.
“……어요? 왜 그랬어? 사람도 아니야. 어떻게, 어떻게 그래.”
웅얼거리듯 시작된 말은 점점 더 커지다가 종내에는 악을 쓰듯 터져 나왔다.
부지불식간에 솟구쳐 일어난 수안이 여자의 입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