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고
도훈은 함께 새해를 맞은 날 약속했던 대로 일주일에 서너 번은 수안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워낙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라 수안이 하는 말을 주로 들어주는 편이었지만, 불편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식사를 하고 차를 한 잔 나누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금씩 불어나는 시간만큼 도훈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하나씩 늘어났다.
생긴 건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청양고추를 태양초고추장에 푹푹 찍어먹고도 남을 것 같아서는 매운 것에 맥을 못 췄다.
커피는 극악무도할 정도로 쓰게 먹었고, 웃을 땐 한쪽 입가에만 보조개가 생겼다.
또, 흥미로운 얘기를 들을 땐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에 대해서 알아가는 건 점점 즐거운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도훈도 그녀와의 식사 시간을 어느 정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부부까지는 아니어도 점점 가족의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꺼낸 졸업식에 참석해 줄 수 있냐는 말에, 도훈이 흔쾌히 그러마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런데 졸업식이 다 끝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톡은 읽지도 않았고, 전화는 계속 불통이었다.
처음엔 화가 났다가 이제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도훈은 못 지킬 약속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약속한 건 절대로 어기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생각했던 저녁 식사 약속을 그는 단 한 주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녀와의 약속을 어긴다는 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는 소리임이 분명했다.
“야아∼ 백수안, 그런 사람이 누구냐고?”
나미의 팔이 수안의 목을 덥석 감았다.
“어, 그게, 같이 사는 사람.”
나미에게 어디까지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 목소리가 자꾸 기어들어 갔다.
“뭐? 가치가 뭐 어쨌다고?”
“유나미, 또냐? 수안이 좀 그만 괴롭히라니까.”
나미의 팔이 맥없이 풀려 나간 자리를 태경의 굵직한 팔이 대신했다.
“이씨, 안 괴롭혔거든. 너는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안이 편만 드는데?”
“몰랐냐? 내가 수안이 구세주잖아.”
“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수안이 아니었으면 한국대 가지도 못했을 거면서. 누가 누구 구세준지 모르겠네.”
태경과 나미 사이에 늘 있는 다툼이었다.
흐지부지하고 마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절교까지 운운하며 격해질 기미가 보이면 수안이 나서서 중재를 하곤 했다.
오늘도 쉬이 끝나지 않을 말싸움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수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미와의 말다툼에 정신이 팔린 태경의 팔에서 슬그머니 풀려나자마자, 수안은 휴대폰을 확인하다가 까치발을 해서 교문 쪽을 기웃거렸다.
“저기, 나 아무래도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야아!”
“뭐야?”
“이럴 사람이 아닌데, 아저씨한테 무슨 일이…….”
“백수안?”
뒤쪽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수안이 고개를 획 돌렸다.
“백수안 맞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수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깔끔한 바지정장에 코트를 걸쳐 입은 그녀는 세련된 단발과 화사한 화장 때문에 나이를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요. 누구세요?”
“아유, 못 찾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이다. 나랑 좀 같이 가자. 차도훈, 아니, 사장님한테 빨리…….”
“아저씨가 왜요? 아저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어? 어.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여자가 수안의 손을 움켜쥐고 무작정 끌어당겼다.
놀란 태경과 나미가 수안의 다른 쪽 손을 잡아챘지만, 도훈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수안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며 대충 인사를 건넨 뒤, 여자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인데요? 장 실장님은요? 현진 언니는 어디 있는데요?”
“사장님하고 다 같이 있어.”
여자는 현진이 늘 차를 세워놓곤 하던 교문 쪽이 아닌 학교 뒤쪽 주차장으로 수안을 끌고 갔다.
“잠깐, 잠깐만요. 현진 언니가 아저씨랑 같이 있다고요? 왜요? 그리고 당신은 누구죠?”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얼른 사장님한테 가봐야 해. 얼른 타.”
덩치도 크지 않은 여자의 힘이 어찌나 무지막지한지, 수안의 소심한 반항은 먹혀들지 않았다.
어느새 끌려가 짙게 썬팅된 차의 뒷좌석에 강제로 떠밀려 태워졌다.
곧장 수안의 옆으로 올라탄 여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출발을 명령하자, 차는 급하게 학교를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신중한 도훈이 낯선 사람을 그녀에게 보낼 리 없다는 생각에 수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 누구예요? 아저씨가 보낸 거 아니죠? 당장 차 세워요.”
“진짜 짜증 나게 구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다 네가 자초한 거야.”
초조한 티가 역력한 여자의 얼굴이 짜증스레 일그러졌다.
잠긴 차 문을 열려고 문 쪽을 향해 앉은 수안의 어깨 너머에서 쭉 뻗어 나온 하얀 물체가 그녀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매캐한 냄새가 확 덮쳐 왔다. 숨이 턱 막혔다.
흐려지려는 의식을 부여잡고 벗어나려 발버둥 쳐봤지만, 그녀로선 역부족이었다.
서서히 밀려오는 암흑과 함께 공포가 그녀를 덮쳐 왔다.
***
초조한 듯 손목시계를 쳐다본 도훈이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오전회의가 늦어지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지체됐다.
쥬얼리샵에 들러서 주문해 놓은 목걸이를 찾고 나니, 아무래도 졸업식 시작 시간은 맞추기 어려울 듯했다.
오늘따라 길게 느껴지는 신호를 주시하고 있던 도훈이 조수석에 놓인 벨벳상자와 꽃다발을 힐끔 쳐다봤다.
보통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로 일그러지곤 했던 미간이 오늘은 다른 이유로 살짝 일그러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졸업 선물로 적당하냐는 고민은 이미 제쳐뒀다. 이 회장과 주은 대신이니 이 정도는 돼야 맞다 스스로 타당성을 부여했다.
곤란한 건 선물의 종류가 아니었다.
선물을 직접 구매한 것도 처음이거니와 직접 전달해야 하는 상황 또한 처음이었다.
수안이 탐탁지 않아 했던 크리스마스 선물도 비서실에 지시한 것이었으니, 선물에 대한 고심이나 노고로 따진다면 진정한 의미의 선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힘든 법이다. 워낙 포커페이스라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을 뿐, 도훈이라고 별다를 바 없었다.
몇천 억이 오가는 서류에 사인을 할 때조차도 긴장하지 않았던 그가 졸업선물과 꽃다발을 옆에 두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참 나, 사람 꼴 우스워지는 거 한순간이군.”
누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린 도훈이 바뀌는 신호에 맞춰 출발한 앞차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차를 출발시켰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도훈의 차 앞으로 별안간 시커먼 형체 하나가 뛰어들었다.
도훈의 놀라운 반사 신경이 빛을 발해 차는 곧 급정지를 했지만, 시커먼 형체는 앞 범퍼에 부딪친 뒤 바닥으로 쓰러졌다.
핸들을 양손으로 꽉 움켜쥔 채 차창 너머를 주시하는 도훈의 미간이 깊게 일그러졌다.
착각인지 몰라도 벌어진 상황이 너무 작위적이었다.
횡단보도 바로 앞에 정차해 있던 차가 지나간 뒤에 마치 그의 차를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뛰어든 타이밍도 그렇거니와, 아직 속도가 붙지 않은 차에 ‘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부딪친 것 또한 일부러 연출된 것 같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어쨌건 사람이 쓰러졌고 일단은 내려서 확인을 해야 했다.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한 도훈은 휴대폰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아이고, 아이고, 사람 죽네.”
차 문을 열자마자 과하게 앓는 소리가 도훈의 귓전을 때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의도된 사고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에 점점 확신이 더해지고 있었다.
“많이 다쳤습니까?”
속내야 어떻든 쓰러진 남자를 향해 몸을 굽힌 도훈의 말투는 정중했다.
하지만 남자를 살피는 눈빛만은 먹잇감을 주시하는 맹수의 그것처럼 예기가 번뜩였다.
사기와 공갈협박으로 잔뼈가 굵은 남자마저 움찔하게 만드는 눈빛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할까.
현직 부장검사가 잔챙이 범죄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선처를 약속하며 이 일을 제안했을 때 눈치를 딱 챘어야 했다.
뭐? 사고 난 척 드러누워서 시간만 좀 끌어주면 된다고? 늘 하던 짓거리니 어려울 것도 없을 거라고? 미친.
이 세계에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최소한 상대해야 할 인간이 만만찮다는 얘기 정도는 해줬어야지. 저 눈빛을 마주하고서 어떻게 공갈협박을 하냐고.
앓는 소리를 내느라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일어날 수 있습니까?”
도훈의 정중한 물음에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뜬 남자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이미 벌어진 일, 이제 와 흐지부지하고 말 순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아이고, 나 죽네. 사람을 쳐놓고 입만 나불거리면 다야? 아이고, 허리야, 어구, 다리야. 비싼 차 타고 다니는 인간들은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지.”
남자는 도훈의 시선을 한사코 외면하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잔머리깨나 굴리는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묘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맹수와의 일대일 맞대응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그의 작전은 얼추 먹혀들어 주변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 같은 서민 나부랭이는 아예 뵈지도 않는 거야. 그러니 이렇게 차로 막 깔아뭉개지. 벌건 대낮부터 술이라도 처먹었나? 어떻게 멀쩡하게 지나가고 있는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아이고, 아이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힘입어 계속 목소리를 높이던 남자가 훌쩍 몸을 일으킨 도훈을 곁눈질했다.
화라도 내주면 좋겠건만, 무심한 표정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일어나기 힘들면 구급차 부르도록 하죠.”
바닥에 드러누운 채 입만 살아 움직이던 남자가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일말의 동요도 없이 휴대폰을 꺼내 드는 도훈에게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