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제발 입고 있어
기껏 피해 왔더니 왜 따라온 건데?
놀란 숨을 삼킨 수안이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어깨 위로 커다란 재킷이 푹 덮였다.
“안 추워요. 나, 안 추운데요.”
“입고 있어. 그리고 숍 바꿔.”
재킷을 벗으려던 수안의 손이 순식간에 갈 곳을 잃었다.
사람 하나는 더 세워도 될 만큼의 간격을 두고 옆으로 나란히 서는 도훈을 보는 눈이 샐쭉해졌다.
가까이 서기도 싫다 이거지.
그래, 뭐, 어른 흉내 낸 것처럼 어색한 거 인정.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딴 포대자루 같은 옷으로 가려야 할 만큼 그렇게 막 별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자기는 뭐 얼마나 잘나서…….
흠집을 찾아내려고 세모꼴로 떠졌던 눈이 금세 힘을 잃고 축 처져 버렸다.
넥타이를 조금 끌어내린 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선 도훈은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명품 재킷 없이도 무척이나 잘나 보였다.
단단해 보이는 어깨와 가슴, 잘록한 허리와 그 아래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에 쭉 뻗은 다리까지.
뭐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그야말로 완벽했다.
거기다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여유로움이나 자신감은 그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도훈의 머리부터 반짝반짝 빛이 나는 구두까지 모두 훑어본 수안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저걸 어떻게 이겨. 휴우! 완전 망했어. 그냥 그 미니드레스가 더 나을 뻔했어.
거울을 보며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어’ 하는 감탄사를 뱉었던 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못 봐줄 정도로 별로예요?”
“뭐?”
별 볼 것 없는 바깥 풍경에 고정되어 있던 도훈의 시선이 수안에게로 옮겨왔다.
멋쩍어진 수안이 있으나마나한 얇은 천 위 가슴 언저리쯤을 손으로 매만졌다.
“아무래도 좀 어른스러워 보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골라 입은 건데, 그렇게 별로예요?”
“몸매를 다 드러내는 게 어른스러워 보이는 건가?”
“다 드러내긴 무슨. 이 정도면 완전 클래식한 축에 속하는 디자인이거든요.”
지희만 해도 앞섶이 푹 파여서 가슴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였다.
실크 재질의 드레스 자락이 몸에 밀착되어 엉덩이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걸 똑똑히 목격했었다.
“흠, 클래식이 다 얼어죽었나 보군.”
“저 안에 있는 여자들 대부분이 이것보다 훨씬 야한 드레스 입은 거 봤을 거 아니에요.”
“누가 뭘 입었건 관심 없어. 내가 보호해야 하는 건 다른 여자들이 아니거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요? 난 보호받아야 할 만큼 연약하지 않다고요.”
“그 소린 네가 성인이 된 뒤에 다시 듣도록 하지.”
“꼰대.”
“뭐야?”
“재수 없어.”
“백수안, 까불지 마라.”
또 저 소리.
지금 이 순간 가장 듣기 싫은 말 앞에서 수안의 인상이 절로 일그러졌다.
지희한테는 까불지 마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더 기분이 나빠졌다.
수안은 신경질적으로 도훈의 재킷을 벗어재꼈다. 그에게 내던지듯 툭 건네고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이 옷이 뭐? 남들은 다 예쁘다 했는데, 왜 아저씨만 별로라고 하는 건데요? 진짜 부부처럼 보여야 한대서 내가 얼마나 신경 썼는데, 잘했다고 칭찬은 못 해줄망정 숍 바꾸라는 소리나 하고. 아저씨도 뭐, 그렇게 막 끝내주는 건 아니거든요. 내 눈엔 완전 별로라고요.”
“허!”
기가 막힌 헛웃음을 뱉어낸 도훈이 수안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어깨 위로 재킷을 걸쳤다.
입지 않으려고 밀어내는 그녀를 제지하며 앞섶을 그러모아 멱살을 잡듯 움켜쥐었다.
“보기 싫으면 아저씨만 안 보면 되지, 왜 자꾸 이걸…….”
“별로 아니야. 너, 별로 아니라고. 그러니까 제발 입고 있어.”
화가 난 듯 조금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나온 말에 그를 올려다보는 수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또 그 눈이었다. 그의 어딘가를 살살 긁어대며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눈.
알 수 없는 간질거림에 피하고 싶은 마음이 반이라면, 제게로 꽉 묶어두고 싶게도 만드는 그 눈을 바라보며 도훈은 잠시 숨을 멈췄다.
애들은 자고 나면 큰다더니.
행사장 앞에서 수안을 맞닥뜨렸을 때 그를 덮쳐 온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얘가 진짜 애도 아닌데, 보지 못한 몇 주 사이에 교복과 찰떡궁합이었던 여고생은 어디로 가고, 매혹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여자로 변해 버린 걸까.
당혹스러웠다.
행사장 안엔 한겨울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실내 온도를 한층 더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도 남을 의상을 걸친 여자들이 수두룩했다.
경쟁이라도 하듯 어깨와 다리를 노출한 여자들에 비하면 수안이 입은 드레스는 정말 고상한 축에 속했다.
그런데 그의 눈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자신도 이런 눈으로 보는데, 다른 남자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를 생각하니 혐오감이 왈칵 밀려왔다.
그룹 총괄사장에 취임한 뒤 처음으로 주최하는 공식행사였고, 차기 회장을 결정짓게 될 주주총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선행사라는 겉포장을 빌어 핵심 주주들과 중역들을 포섭하는 자리였다.
백수안한테 정신 빼고 있을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대로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의식이 온통 수안에게로 날아갔다. 주주고 중역이고 다 필요 없었다. 이 행사장 안에 남자가 몇 명인지 그것에만 신경이 곤두섰다.
뭐가 됐든 한시라도 빨리 음흉한 눈길로 수안을 훑는 남자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이건 순전히 보호의 의무에 입각한 마음일 뿐이었다.
수안이 저런 순진해 빠진 눈으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볼 일이 아니란 말이다.
“별로 아닌데 왜…….”
“그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제발 그냥 말 좀 들어.”
날이 서 있는 듯하면서 약간 시무룩하게 들리는 그의 말에 수안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여전히 재킷을 꼭 움켜쥔 도훈과 멀뚱히 바라보는 수안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고스란히 들리는 거리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눈만 깊게 맞추고 있었다.
침묵을 깬 건 행사장에서 흘러나온 카운트다운 소리였다.
아무래도 곧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올 모양이었다.
몇 초 차이로 뭔가 확 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했다.
덩달아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던 수안의 귀에 얕은 환호성과 어수선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몇 초 차이로 막 스무 살이 된 수안이 저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재킷의 앞섶을 놓아준 도훈은 손가락으로 수안의 코끝을 톡 치면서 새해 인사를 건넸다.
“해피 뉴이어.”
“왜 자꾸 코를…….”
아플 정도는 아니었는데 괜스레 민망해진 수안이 코를 손으로 문지르며 투덜댔다.
“소원 있으면 말해.”
“들어주게요?”
“봐서.”
“쳇!”
정말 몇 초 차이로 뭔가 달라진 것처럼, 서로 날을 세웠던 순간이 있었던가 싶게 툭툭 주고받는 대화에 부드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뭐, 그냥…….”
말을 하려다 말고 얼버무린 수안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눈꺼풀만 살포시 들어 그를 힐끔거렸다.
제법 엄청난 소원인지 커다란 재킷에 감싸인 수안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이제껏 아무리 작고 앙증맞은 걸 봐도 귀엽다 표현 한 번 하지 않던 도훈의 성정에도, 지금 수안의 모습은 참 예뻤다.
저 입에서 어떤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다 해도 다 들어주고 싶을 것 같았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겠다고 덤비는 얼간이들의 심정이 새삼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수안이 뭘 알고 이러는 거라면, 얘는 아주 선수였다.
사람 마음을 꽉 틀어쥐고 마구 흔들어대면서도 난 몰라요, 하는 순진한 눈망울을 꾸며내는 거라면, 얘는 아주 숨은 고수였다.
그러니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줄 각오로 귀를 쫑긋 세울밖에.
“새해에는 남편 얼굴 좀 자주 봤으면 좋겠다, 그거 하나예요.”
구시렁거리듯 흘러나온 말에 도훈은 눈살부터 찌푸렸다.
복잡할 거 하나 없는 말인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냥 그렇다고요. 아저씨 바쁜 것도 알고, 나도 뭐 그렇게 한가한 편은 아니라…….”
“매일은 힘들어.”
“네?”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는 같이 저녁 먹도록 하자.”
“흐흐, 넵.”
키득거리다가 차려 자세로 대답을 한 수안이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입에서 시작된 웃음이 양 뺨으로 번지더니 눈까지 예쁘게 휘었다.
야트막한 관목들을 배경으로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은 수안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덩달아 웃고 싶어지는 그런 웃음에 도훈도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 보고 웃은 날이었다.
***
“백수안, 사진 찍자니까 뭐 하고 있어?”
“어? 아니, 그냥 좀…….”
“태경이 기다리다가 목 빠지게 생겼다.”
중앙현관 옆 교정에서 태경이 목을 쭉 빼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모님은?”
“사진 찍고 벌써 가셨지. 태경이네 엄마, 아빠도 바빠서 먼저 가셨다더라. 잘됐지 뭐. 우리끼리 점심 먹고 노래방까지 콜?”
“나도 올 사람 있는데, 안 그래도 된다니까 왜…….”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 수안을 생각해서 부모님들을 먼저 보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럴 필요 없다 누누이 말했는데도 졸업식을 축하해 주러 온 부모님을 먼저 돌려보냈다니, 이모저모 미안한 마음만 가득해졌다.
“그래도 되거든. 우리 아빤 졸업식 날 꼭 짜장면 먹자고 하는데, 나 그거 싫단 말이야.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올 사람 있다고 거짓말할 필요도 없다 이 말씀이야.”
“아니야. 진짜 올 사람 있어. 좀 많이 바쁜 사람이라 시간 맞춰는 못 와도 꼭 온다고 했단 말이야.”
“누구? 친척?”
“아니. 있어,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