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내 남편이거든요
지레 찔렸는지 지희가 샐쭉하게 물어왔다.
마음이 아닌데 겉으로만 대접받아 뭐 하나 싶어 수안은 고개를 저어버렸다.
“다행이네. 안 그래도 미국에 오래 살다 와서 존대가 서투르거든.”
흥, 아저씨한테는 잘만 하더구먼.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수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행사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수선한 장내를 정돈한 진행자의 소개를 받은 도훈이 박수 소리와 함께 단상으로 올라섰다.
곧이어 말쑥한 생김새와 찰떡같이 어울리는 묵직하고 그윽한 음성이 좌중을 압도했다.
그룹의 총괄사장직을 맡기엔 분명 어린 나이였지만, 모인 사람 어느 하나 그의 나이 따윈 신경도 못 쓸 만큼, 올라선 자리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매사에 자신감 있는 그의 몸가짐이야 매스컴에서 이미 접했던 터라 새로울 게 있을까 했는데, 직접 마주한 모습은 또 달랐다.
저런 사람이었구나! 저렇게 눈빛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압도하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새삼 깨달은 사실에 가슴이 쓸데없다 싶을 만큼 두근댔다.
“멋있지?”
푹 빠져들 것처럼 도훈만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들려온 지희의 질문에 수안은 어깨부터 움찔했다.
질문에 놀란 게 아니라, 질문의 저의에 놀란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남편을 자랑하는 것 같은 뿌듯함이 담긴 저 뉘앙스는 뭐란 말인가.
수안은 대답도 못 하고 지희를 멀뚱히 쳐다봤다.
“멋있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거든. 앞으로 달라질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게 저 남자의 진짜 매력이야. 어떨 것 같아?”
수안은 눈살부터 찌푸렸다.
아무리 가짜 결혼이라지만, 저 앞에 우뚝 선 남자는 법적으로 엄연히 자신의 남편이었다.
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여자가 마치 제 남자인 것처럼 매력 운운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뭐가 말인가요?”
상당히 뾰족하게 쏘아진 말투에도 지희는 별것 아니라는 듯 피식 입꼬리만 말아 올렸다.
“저 남자가 사랑을 하면 어떨 것 같으냐고?”
“이보세요, 당신이 말하는 그 남자가 내 남편이거든요.”
“흠, 그래서? 그게 뭐?”
지희의 말은 거기서 끝났지만, 비웃음을 머금은 입만 봐도 그녀가 삼켜 버린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널 사랑하기라도 한대?’
차도훈과의 사랑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바라본 적도 없었는데, 지희의 비웃음에 가슴 한구석이 울컥했다.
정말 차도훈이랑 이 여자 사이에 뭔가 있어서 저러는 건가, 톡 까놓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수안은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았다.
그걸 묻는 순간 이 여자에게 도훈과 수안이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관계라는 확신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말 놓는 것까지야 서투르다니까 어떻게 봐준다 쳐도,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건 안 된다는 뜻이라고요. 내가 당신 보스의 아내라는 거 잊지 마요.”
이제 한 시간 후면 스무 살이 되는 자신의 나이 같은 건 알아챌 수도 없게끔 최대한 진중한 표정을 꾸며내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하지만 지희는 듣는 둥 마는 둥 산만하게 주변을 살피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안녕하세요, 전무님. 비행기 연착 소식 듣고 혹시 참석 못 하실까 사장님께서 걱정이 많으셨어요.”
지희가 수안을 지나쳐 가며 과하게 반가운 척을 했다.
천방지축 어린애라 해도 지희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도훈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보여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너 따위가 회장 손녀면 뭐? 이미 죽고 없는 회장이 뭘 해줄 수 있다고. 그깟 재산 좀 가지고 있다고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는데?
확연한 비웃음을 모를 수 없었다. 수안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너무나 선명해 도리어 유치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희가 간과한 게 있었다.
이런 때를 대비한 건 아니었겠지만, 이 회장은 회사 중역들과의 식사 자리에 자주 그녀를 참석시켰고, 일 얘기를 무슨 옛날이야기 하듯 설렁설렁 풀어놓곤 했다.
‘박덕규 그 사람이 말이야, 전엔 안 그랬는데 욕심만 나날이 늘어서는 주식 가지고 장난질을 치고……. 김 전무 그놈이 성격은 지랄 같아도 허튼짓할 놈은 아니거든. 홍콩 건도 안 된다는 거 기어이 밀어붙이더니 아주…….’
그러니까 결론은, 지희에게 무시를 받을 만큼 수안이 그렇게 맹탕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회사 돌아가는 사정까지는 정확히 몰라도, 도훈에게 아군이 될 사람인지 적군이 될 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등 뒤에서 지희의 과한 환대를 받고 있는 저 양반은 아군!
그럴듯한 미소를 장착한 수안이 드레스 자락을 수습하며 돌아섰다.
지희의 말을 듣고 있던 김 전무의 눈이 수안을 살피느라 가느스름해졌다.
“아! 전무님, 이쪽은 전 회장님 손…….”
“수안아.”
김 전무가 수안을 가리키며 앞을 막아선 지희를 슬쩍 밀어내며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전무님, 그간 안녕하셨죠?”
다정하게 인사말을 건네자마자 김 전무가 수안의 손을 덥석 잡고 토닥거렸다.
김 전무의 등 너머 형편없이 일그러졌던 지희의 얼굴이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런 신경전은 원래가 유치해서 느껴지는 감정 또한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통쾌함이라니.
유언장이 공개되던 날 기석에게 나가라고 요구하면서도 겁에 질려 미처 느끼지 못했던 통쾌함을 뒤늦게 이런 하찮은 순간에 느끼고 있었다.
“그러는 넌, 잘 지냈고?”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염색하셨네요? 20년은 젊어 보이세요.”
“허허허, 띄우기는. 그나저나 제대로 신경을 못 써줘서 나중에 회장님 뵐 면목도 없겠다 했더니, 건강해 뵈기도 하고, 새색시 태가 물씬 나는 게 아주 보기 좋구나.”
“그래 보인다니 다행…….”
“전무님, 사장님도 단상에서 내려오신 듯하니, 이만 자리를 이동하시는 게…….”
“장 실장님, 전무님과 나는 알아서 이동할 테니 장 실장님은 행사 진행이나 신경 써줘요.”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수안의 말까지 끊고 톡 끼어드는 지희를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나이 어린 자신을 상대로 이런 유치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게 맞았다.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해 줘라.
이 회장의 많은 가르침 중 하나였고, 수안이 가장 착실하게 지키는 가르침이었다.
고로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 사람을 존중할 필요는 없었다. 그게 물러설 때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금 움직이지 않으시면 사장님과 말씀을 나누시기 힘…….”
“장 실장님, 사장님 마침 이쪽으로 오는데요.”
단상에서 내려온 도훈은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곧장 수안을 향해 오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죠?”
수안의 질문에 지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저는, 원래 정해진 동선이…….”
“우리가 무슨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도 아니고. 장 실장 뉴욕지사에서 함께 넘어왔다더니, 아직 본사 일이 서툰 건가? 사장님은 저렇게 잘 적응하고 있는데 비서가 이래서야 쓰나.”
김 전무까지 말을 보태자 화사했던 지희의 얼굴은 금세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말씀 나누세요. 저는 이만…….”
지희가 물러나고 바턴터치를 하듯 도훈이 성큼 다가와 섰다.
도훈과 김 전무가 잠시 환담을 나누는 동안 수안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도훈의 곁을 지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지희와의 일을 되짚어보는 수안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했다.
오히려 도훈의 곁에 서니 지희의 존재감이 더 강렬해졌다고 해야 할까.
도훈을 향한 지희의 호감은 모를 수가 없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마음을 드러내는데 아저씨는 정말 모르는 걸까, 모른 척하는 걸까?
만일, 알면서도 모른 척 곁에 두는 거라면, 아저씨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는 의미일까?
여러 의문들이 부유하듯 떠올랐다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엉겨 붙었다.
그중 가장 심각한 의문은, 왜 그런 걸 이토록 신경 쓰고 있냐는 것이었다.
어차피 몇 개월 뒤면 법적으로 묶인 관계마저 아닌 게 되어버릴 사이였다.
위장결혼 놀이에 아무리 심취했대도 이런 마음은, 이런 느낌은 생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왜 자꾸…….
“왜?”
“네?”
“왜 표정이 그러냐고?”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몰라 손으로 더듬기부터 했다.
조금 따끈한 거 말고는 만져 봐야 알아낼 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왜 그러냐 물어본 사람에게서 답을 찾아보려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표정은 왜 그런데요? 그리고 왜 이렇게 바짝…….”
그녀가 잠깐 넋 놓고 생각에 빠진 사이 이미 자리를 옮긴 듯, 김 전무는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둘만 남은 자리에 눈살을 찌푸린 도훈이 부담스럽게 바짝 붙어서 있었다.
마침 그녀의 뒤로 거대한 인조나무가 버티고 있어서 수안은 도훈과 나무 사이에 거의 갇혀 버린 형상이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빼봐야 보이는 거라곤 꼭 들어맞는 셔츠에 감싸인 도훈의 널찍한 가슴이 다였다.
그의 체취가 그녀를 온통 감싸고 있는 듯했다. 선명한 존재감이 그녀를 압도했다.
갑자기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졌다.
숨이 벅찰 정도의 긴장감이 그녀를 에워쌌다.
두려움, 이건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렇다고 화가 난 기석의 발치에 주저앉아 날아들 주먹에 가슴 졸이던 그런 두려움은 아니었다.
가슴이 쿵쾅대고, 손에 땀이 고이고, 머리가 아찔하게 흐려졌다.
도훈을 밀어내고 싶었지만, 어디다 손을 대면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백수안, 어디가 안 좋아? 얼굴에 핏기가…….”
“하지 마요.”
자신의 얼굴로 뻗어오는 손에 놀란 수안이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그를 말렸다.
멈칫 굳어진 도훈을 보는 수안의 눈이 혼란스럽게 일렁였다.
“어, 자, 잠깐 숨 좀 쉬, 아니,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빠르게 얼버무린 수안이 최대한 몸이 닿지 않게 그를 지나쳐 종종걸음으로 행사장을 벗어났다.
막상 갈 곳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그녀는 실내정원처럼 꾸며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쪽 연회장과 저쪽 편을 잇는 구름다리였다.
중간중간 커다란 창이 있어서 바깥바람을 쐬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핑계였을망정 정말 바람이라도 쐐야 숨이 제대로 쉬어질 것 같아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바람이 훅 밀려들어 왔다.
“하아, 하아, 뭐야? 왜 이러는 건데?”
“뭐가?”
“히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