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주은과의 인연으로 수안에게도 더없이 다정한 디자이너 선생님이 그녀와 안성맞춤이라고 권했던 미니드레스는 정말 입어보나마나 딱 수안의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어린애가 가지고 노는 공주인형이 입을 법한 옷으로밖에 안 보였다.
지금도 어린데, 얼마나 더 어려 보이려고 저런 옷을 입나 고개부터 저어졌다.
좀 더 어른스러워 보였으면 좋겠다는 수안의 요구에 알만하다는 미소와 함께 권해준 게 바로 이 드레스였다.
미니드레스도 참 예쁘다 했는데, 가슴 바로 위까지 하늘거리는 얇은 천이 덧대어진 블랙의 드레스는 웬만한 건 저리 가라 할 만큼 근사해 보였다.
어린애가 엄마 옷 훔쳐 입은 것처럼 보이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던 마음도 선생님의 흡족한 끄덕임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거울에 비춰본 그녀는 백수안이면서 백수안이 아닌 것 같았다.
하얗고 잡티 없는 피부는 칠흑같이 검은 드레스와 대조되어 더욱 빛이 났고, 머리칼을 틀어 올려 드러난 목은 고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나쁘진 않지, 라고 생각했던 몸매는 적당히 핏 되는 머메이드 라인을 만나 아름다운 곡선을 자아내고 있었다.
창피한 소리지만, 제 모습에 제가 더 놀라 ‘어’ 하는 감탄사와 함께 얼뜨기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분명 그랬는데, 눈부신 조명이 만들어낸 착각이었을까? 역시 어린애가 엄마 옷 훔쳐 입은 것처럼 보이는 걸까?
아무런 말도 없이 깊게 바라보는 도훈의 눈길에 수안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너, 뭐야?”
“안 어울리는 거 아니까 더 이상 뭐라지 마요.”
“그게 아니라, 뭘 이렇게 다…….”
“아이고, 차 사장님, 반갑습니다.”
걸쭉한 남자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마주 선 도훈과 수안의 사이로 난입했다.
도훈이 알은체를 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선 남자는 만면에 웃음을 두른 채 손부터 넙죽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임이 분명한데, 도훈은 수안을 자신의 뒤로 옮겨놓느라 남자의 말쑥한 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아, 네, 김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바쁘실 텐데 어려운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차 사장님께서 주최하는 자린데 열 일을 제쳐 두고라도 와야죠.”
뒤늦게 잡힌 손이 민망하지도 않은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김 대표가 도훈에게 반 이상은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수안을 고개까지 기울여 쳐다봤다.
“근데, 저 숙녀분은 누구신가? 어쩐지 낯이…….”
“안녕하세요, 김 대표님. 백수안입니다.”
도훈이 말릴 겨를도 없이 냉큼 앞으로 나선 수안이 적절한 각도로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아!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아유, 이젠 아가씨 태가 물씬 나서 몰라볼 뻔했네. 아니지, 그러고 보니 차 사장님하고……. 내가 이거 말을 편하게 할 일이 아니구먼. 혹시 기분 나빴다면 이해해요, 수안 양.”
도훈이 사력을 다해 막고 있어서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이 뉴욕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는 시나리오가 그룹 차원에서 알려진 상태였다.
도훈과 수안의 관계를 알아야 할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김 대표 또한 그 알아야 할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닙니다. 컸다고 할아버지 손녀가 아닌가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장례식장에서 뵈었을 때도 제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이제라도 감사했다는 말씀 전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쏘는 듯한 도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수안은 모른 척 김 대표만 바라보며 우아하고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기석에게서 도망쳐 나온 뒤로, 도훈이 뉴욕지사에 있었던 내내 수안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주은을 대신해 이 회장과 함께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했었다.
수안을 데리고 다닌 이 회장의 속내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알려주는 것들은 제법 흥미로웠고, 수안은 그걸 능숙하게 익힐 만큼 영리했다.
김 대표도 이 회장이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대성캐피탈이라는 번듯한 간판 하나 내걸었다고 말이 좋아 대표지, 막대한 현금과 부동산을 보유한 사채업자나 다름없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김 대표는 막대한 현금과 부동산 중 일부를 태성에 투자했고, 수안을 제외하면 그가 태성의 최대 주주였다.
현재 임시 회장을 맡고 있는 박덕규를 견제하려면, 도훈이 반드시 포섭해야 할 사람이라는 걸 수안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확실한 내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위장결혼 놀이에 미쳤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도훈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었고, 이게 절호의 기회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우리 남편 잘 봐달라는 말도요.”
표시 안 나게 속으로 몇 번의 심호흡을 거듭했는지 몰랐다.
별것 아닌 말임에도 전혀 입에 붙지 않은 단어 하나 들었다고, 제발 어색하지 않길 빌고 또 빌어야 했다.
다행히 그 간절함이 통했는지, 호들갑이 일상인 나미가 들었다면 여우주연상 감이라 엄지를 추켜세우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럴듯하게 들렸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한번 미쳐 보자 하는 심정으로 도훈을 향해 눈을 찡끗해 보인 연출은 제가 생각해도 완벽했다.
김 대표 입에서 ‘허허허’ 하는 흐뭇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 걸 보면, 그녀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 듯했다.
“허허허, 수안이가 아주 내조를 제대로 하는구먼. 차 사장님 바쁜 건 내가 잘 아는데 신수가 더 훤해졌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그래.”
저렇게 찰떡같은 리액션을 해주시니, 이제 수안은 새색시처럼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꼴 일만 남았다.
이럴 때 장대 같은 남편분께서 협조를 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니 그녀 혼자 고군분투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수안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도훈의 팔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신수가 훤하다 칭찬을 아끼지 않은 도훈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가는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주름진 김 대표 얼굴만 웃느라 활짝 폈다.
“신혼이라, 좋을 때군. 허허허. 아무래도 먼저 들어가 보는 게 좋겠군요. 안에서 다시 보도록 합시다, 차 사장님, 수안 양.”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까딱해 보인 김 대표가 행사장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수안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토해냈다.
“백수안 너, 누가 이러랬어?”
슈트에 감싸여서도 또렷이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의 움직임에 놀란 수안이 얼른 그의 팔에서 손을 떼어냈다.
칼날같이 쏘아오는 목소리는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안해요, 아저씨. 일부러 그런 게, 아니, 일부러 잡은 게 맞긴 한데, 이 정도는 해야 진짜 부부처럼 보일 테니까……. 우리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얼른 들어, 헛!”
돌아서자마자 손목이 틀어 잡혀 도훈에게로 확 당겨졌다.
훅 끼쳐 오는 그의 체취가 코끝으로 아찔하게 스며들었다.
“너 대체……. 잠깐 조용한 데로 가서 얘기 좀 해.”
심각한 말을 쏟아낼 듯 상기되어 있던 도훈이 점점 분주해지는 주변을 둘러본 뒤 수안을 잡아끌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행사장 입구에서 막 벗어났을 즈음이었다.
“사장님, 사장님? 여기 계시면 어떡해요.”
경쾌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지희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5분 뒤엔 연단으로 올라가셔야 해요.”
지희의 재촉에 도훈은 수안을 바라봤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못마땅한 빛이 역력한 도훈의 눈이 수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수안이 그에게 잡힌 손목을 장난스레 흔들다가 빼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네? 뭐가 안…….”
“사장님, 이러다 정말 늦으세요.”
다시 한번 재촉하는 지희를 도훈이 손부터 들어 보이며 제지했다.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 백수안, 오래 안 걸려. 잠깐만 장 실장하고 있어.”
완전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이었다.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그래가지곤 어른스러워 보이는 건 물 건너가기 십상이었다.
지희와 함께 있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뭐가 못 미더운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도훈을 안심시키기 위해 수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도 곧바로 발을 떼지 못한 도훈이 얇은 천에 감싸인 수안의 어깨와 그 언저리를 점검하듯 훑다가 돌아섰다.
마치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을 바라보듯 휑한 눈길로 도훈의 뒷모습을 좇는 수안의 귓가로 지희의 쨍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안 들어갈래? 나는 안에서 체크할 것도 있고 해서…….”
고개를 돌린 수안이 지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데 여기 이러고 서 있나 하는 눈빛이라 도리어 민망해진 지희가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는 척 시선을 피했다.
그제야 수안의 눈에 들어온 지희의 차림새.
아무리 행사를 위한 의상이라지만, 비서의 차림새라기엔 너무 과하게 가슴골이 파인 붉은 드레스를 지희는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 옆에 있으니 자신은 정말 어울리지도 않게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뭐, 반말이 좀 그런가? 사모님 대접 해줘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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