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눈이 참 예쁘네요
“엄마야! 뭐, 왜요? 알려주기 싫음…….”
“핸드폰 달라고.”
커다란 손과 무심한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아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은 수안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빠르게 번호를 찍은 도훈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그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휴대폰을 꺼내 수안의 번호를 저장한 도훈이 그녀의 것을 다시 돌려줬다.
“됐어?”
“네.”
“그래. 난 이제 회사 들어가 봐야 돼. 당분간은 좀 바쁠 거야.”
많은 대화를 나눠본 건 아니었지만, 수안이 알기로 그는 표현력이 풍부한 편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좀’은 조금이라는 뜻보다는 ‘아주 많이’에 가까울 게 뻔했다.
이렇게 마주하는 일도 드물 거라는 의미가 담겼을 게 분명한 그의 말에 수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할 건 없었다. 어차피 진짜 부부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아, 되도록 안 할게요. 뭐, 연락할 일도 없을 거예요.”
연락 않겠다는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해서 그러는 건지, 그의 눈썹이 급격하게 사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전번을 괜히 알려달라고 했나 후회를 할 즈음 한껏 허리를 숙인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헉’ 하고 숨을 뱉어낼 뻔한 수안이 가까스로 입을 막았다.
깊고 날카롭다고만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눈은 아름답다는 표현이 부족하다 느낄 정도로 근사했다.
얄포름한 쌍꺼풀에 어울리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 그리고 그 속에 콕 박힌 짙은 눈동자.
분명 협위를 담고 있는 눈인데, 어쩐지 무섭진 않았다.
“반드시 나한테 먼저 연락하라고. 알았어?”
“근데, 아저씨 눈이 참 예쁘네요.”
“뭐?”
“어, 그게, 네, 알았어요. 연락할게요.”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이 곧 멀어졌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성큼성큼 자리를 벗어나던 도훈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만, 난 네가 가진 지분엔 관심 없어.”
‘그럼 왜?’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나왔다가 멈춰 버렸다.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올 것 같은 비주얼의 탄탄한 어깨와 널찍한 등이 이상하게 쓸쓸해 보였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참 불쌍하고 착한 아이라는 엄마의 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흥분해서 조금 심하다 싶게 쏟아낸 말들이 미안해졌다.
지분에 관심 없다는 그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도훈이 유일한 믿을 구석이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할까?
하긴, 믿건 안 믿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그는 그의 일을 하는 거고, 나는…….
아, 모르겠다. 빨리 나이나 왕창 먹었으면 좋겠다.
도훈의 연락처가 들어앉아서 더 묵직해져 버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수안은 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
다음 날부터 현진은 교문 밖에 주차한 차 안에서 수안을 기다렸다.
학교 밖에서의 밀착경호는 여전했지만, 도훈이 약속한 대로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도훈의 ‘좀’은 아주 많이라는 뜻이 맞았다.
머나먼 뉴욕이 아닌 한국에 있어도 그를 볼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TV 화면이나 웹상에서 도훈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임시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박덕규 부회장과의 대립 구도라든가, 총괄사장으로서의 그의 행보 같은 것들이 자주 보도됐다.
웃긴 건, 그게 웹상으로 가면 태성그룹 총괄사장으로서의 그가 아닌, 차도훈 개인으로 포커스가 맞춰진다는 점이었다.
주로 수행비서들과 이동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무심한 표정이 주를 이뤘지만, 여러 날 여러 각도에서 포착된 도훈이 인터넷 기사를 장식했다.
어쩌다 미세한 표정 변화라도 있을라 치면 댓글들이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무슨 연예인도 아닌데 이러나 기가 찰 정도였다.
그리고 더 기가 찬 건, 간혹 도훈과 함께 포착되는 장지희에 관한 댓글이었다.
비서를 외모로 뽑았다는 외모 품평부터, 그저 비서만일 리 없다는 추측까지, 분분한 의견들을 보고 있자면 수안의 머릿속까지 시끄러워졌다.
누구는 남편인데도 얼굴보다 발소리가 더 익숙해질 판인데, 누구는 비서임에도 연인 행세를 하고 있다니 하면서 손을 바르르 떨었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혼자 흠칫 놀라곤 했다.
‘차도훈 마누라는 따로 있어요.’ 댓글을 썼다가 다다다다 지우고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기도 했다.
위장결혼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슬슬 미쳐 가나 보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풍악을 울렸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도훈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연락을 할 필요도 없었다.
진짜 부부처럼 보여야 한다더니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무렵, 생전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차도훈 세 글자가 그녀의 휴대폰에 떠올랐다.
의식도 못 하는 사이 몇 번의 들숨과 날숨이 그녀의 입술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난생처음 전화를 받아보는 사람처럼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머릿속이 까마득했다.
금세 끊겨 버리는 건 아닐까 마음이 조급해져 얼른 통화 버튼을 눌러놓고 마른침부터 꿀꺽 삼켰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완전 시크하게 첫마디를 꺼내리라 굳게 다짐을 하고 입술을 뗐건만…….
“어, 그, 백수안인데요.”
어우, 진짜, 자알 한다. 이게 뭐야. 시크가 다 얼어 죽었나 보다.
왜애 아예, 이제 곧 스무 짤 백수아안입니다, 그러지 그랬어.
제 머리를 마구 두들겨 봐야 이미 때는 늦었다.
이놈의 통신기술은 뭐 한다고 이렇게 주야장천 발달을 해서 미세한 숨소리 하나도 초고속으로 전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흠. 그래, 알아.]
비웃음이 분명한 첫 음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직접 들을 때와는 또 다른 그윽한 목소리에 부산했던 움직임을 멈췄다.
[음, 잘 지내지?]
한집 사는 부부 사이에 있을 법한 말은 아닌 걸 뱉어놓고 물은 사람이나 들은 사람이나 숨소리를 죽였다.
“나야 뭐 그럭저럭. 아저씨는요?”
[나도 뭐…….]
짧은 웅얼거림 뒤로 전화가 끊겼나 싶게 잠시 말이 없었다.
이렇게 할 말 없는 부부는 세상천지에 차도훈과 백수안 딱 둘뿐일 것 같았다.
침묵이 숨 막히진 않았지만, 그래도 귀에 가져다 댄 휴대폰이 민망하지 않게 무슨 말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 수안은 분주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무엇을 발견한 건지 그녀의 눈에 순간 이채가 감돌았다.
“아! 크리스마스 선물 잘 받았어요.”
잘 받은 것치곤 제법 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침대 옆에 처박혀 있는 무지막지하게 큰 곰인형을 바라보는 눈이 마냥 샐쭉했다.
푸대접 받은 태가 역력한 곰돌이는 선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머리에 두른 핑크핑크 왕 리본조차 떼지 못한 채였다.
머리 위에 버겁게 올라앉은 리본이 참 처량해 보였지만, 곰돌이 걱정을 하고 있기엔 그녀의 억울함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가짜 결혼이라지만, 남편한테 처음 받은 선물이 무식하게 크기만 한 곰인형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누굴 진짜 열 살짜리 어린애로 아나.
[잘 받긴 했지만 고맙지는 않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매스컴에서 연일 천재적인 두뇌를 소유한 젊은 경영인이라고 추켜세우더니, 빈말은 아니었던가 보다.
평범한 말속에 숨은 뜻까지 알아차리는 걸 보면.
“인형 받고 좋아 죽을 나이는 아니니까요.”
[그렇군. 그럼 옷 선물은 어때?]
은근하게 묻는 말에 수안의 입꼬리가 씰룩 춤을 췄다.
이제라도 그녀의 나이에 걸맞은 제대로 된 선물을 해주겠다니,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근데 이 아저씨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게 분명했다.
천재면 뭐 하나. 여자 마음을 개똥만큼도 모르는걸.
“그런 건 보통 말 않고 서프라이즈로 짜잔, 선물해야 빛이 나는 거거든요.”
휴대폰 너머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잘못을 지적받아 민망한 건가? 아니면 너무 많은 걸 바란다고 실망한 건가?
“그렇다고 내가 그런 걸 바란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나중에라도 아저씨가 애인한테 써먹으면 좋겠다 싶어서…….”
[백수안, 미안한데, 빛나는 건 다음에 하자. 31일 밤에 자선행사가 있어. 내가 주최하는 거고, 네가 얼굴을 비춰야 하는 자리야.]
“아, 알죠. 연말이라 행사 많을 텐데, 왜 아무 소리가 없을까 궁금해하던 참이었어요.”
[그래. 내가 그런 걸 잘 몰라서 장 실장 보낼게. 준비할 거 있으면…….]
“아니요. 엄마가 다니던 데 알아요. 어차피 현진 언니랑 함께 움직여야 하니까, 내가 알아서 준비할게요.”
도훈의 말을 낚아챈 수안이 다른 소리 못 하도록 단호하게 말을 끊어냈다.
잠시 머뭇거리던 도훈은 ‘그래’ 하는 간단한 대답을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
“그래밖에 모르는 바보.”
까맣게 변한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수안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녀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장 실장을 보낸다는 소리를 하느냔 말이다.
절대로 두 번 다시는 어린애 취급 못 하도록 뭔가 확실히 보여주리라.
아직은 고3 학생 신분에 시험 볼 때도 그저 그랬던 열의를 차도훈 입이 떡 벌어지게 할 일을 꾸미는 데 불태웠다.
하지만 불태운 열의가 무색하게 행사장 앞에서 수안을 마주한 도훈의 입은 도리어 굳게 다물어지고 말았다.
대신에 멋들어진 눈썹만 사선을 그리며 치솟았다.
수안은 큐트한 살구빛 미니드레스 대신 선택한 블랙 머메이드 드레스의 허리 라인을 머쓱하게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