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널 위해서
마냥 간질거려야 할 ‘여보’ 소리가 어쩐지 좀 섬뜩하게 들렸다.
당황해서 기침을 토해낸 수안이 멋쩍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수안을 내려다보는 도훈의 눈썹이 심술궂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여보오?”
아우, 정말, 여보 소리는 하지 말걸.
대화고 뭐고 당장은 민망해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버거웠다. 잠시만이라도, 단 몇 분만이라도 수안은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했다.
“어, 저기, 배, 배고프지 않아요? 으음, 아줌마 낙지볶음 했나 부다. 밥상 차려놨는데 늦게 가면 아줌마 막 화내는데. 어, 얼른 씻고 와야겠어요.”
슬금슬금 뒷걸음치던 수안이 뒤로 돌아서기 무섭게 와다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백수아안.”
“히잇.”
우뚝 멈춘 채 곧추선 뒷모습이 마치 놀라서 움츠러든 새끼고양이 같았다.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도훈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씰룩거렸다.
“흠흠, 가방 안 가져가?”
“이, 이따가…….”
“무슨 학생이 가방을 내버리고 다녀.”
“아이 참, 내버리긴 누가…….”
불퉁하게 구시렁거리던 수안이 하는 수 없이 미적미적 되돌아갔다.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도훈의 곁을 지나 내팽개쳤던 가방을 둘러메고 다시 그의 곁을 스쳐 지날 때였다.
갑자기 도훈의 손이 번쩍 들렸다.
들릴 듯 말 듯 억눌린 신음 소리를 토해낸 수안이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도훈의 눈에 날이 섰다. 수안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때리려 한다고 오해를 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가 폭력에 대처하는 방법은 최대한 몸을 움츠린 채 참아내는 게 고작일 터였다.
누구로 인해 이렇게 행동하게 됐는지 모르지 않았다.
날렵한 턱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생생한 분노가 그를 덮쳤다.
빌어먹을. 이 작고 여린 애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짙은 한숨을 뱉어낸 도훈이 조심스럽게 수안의 머리 위로 손을 내렸다.
다시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런 접촉들에 익숙해지길 바라며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참 멋없는 칭찬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건강하게 잘 있었던 것도, 제 역할에 충실하려 애쓴 것도 기특하다는 의미를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낯간지러운 말은 잘 못 하는 그가 건넬 법한 최고의 칭찬이었다.
하지만 팔랑거리던 눈꺼풀이 걷힌 맑은 눈이 이내 일그러지는 걸 보면, 열아홉 소녀에겐 그다지 듣기 좋은 칭찬은 아니었던가 보다.
“나 강아지 아닌데요.”
뭐, 딱히 다른 것 같지도 않구먼.
빤히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가 괜스레 불편해진 도훈이 손가락을 세워 그녀의 얼굴을 훑어내려 버렸다.
“아니, 왜 자꾸…….”
“배고프다. 얼른 씻고 내려와라.”
또다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그를 바라보던 수안이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섰다.
그의 손이 닿았던 자신의 머리를 슬쩍 매만지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설핏 감돌았다.
***
“안 돼.”
뭘 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잘했다는 칭찬 도장도 받았고, 강아지 취급도 받았고, 뜬금없는 머리 쓰담쓰담에 봄기운이 살랑대는 것 같았던 분위기는 저녁 식사 후 마주 앉은 자리에서 대번에 칼바람 몰아치는 한겨울로 돌변해 버렸다.
“아저씨 뉴욕 가 있는 동안, 아버지 그림자도 못 봤어요. 밀착경호는 너무 오버라고요. 경호를 아예 안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느슨하게 해달라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면 어떡해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도훈이 답답한 듯 소파 주위를 오락가락했다.
백기석의 그림자도 못 봤다는 수안의 말은 틀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수안의 경호원이 학교 근처에서 배회하는 백기석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는 사실을 최 소장으로부터 이미 보고받은 상태였다.
게다가 지금은 백기석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태성의 본사로 돌아온 이상, 이 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쏠려 있던 언론의 관심은 그룹 경영승계 문제로 옮겨갈 게 뻔했다.
이 회장의 유일한 상속녀인 백수안이 그 관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룹 총괄사장직을 맡게 될 자신은 언론 노출이 불가피하겠지만, 수안만은 되도록 노출시키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수안이 알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야? 조금 불편한 건 감수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어른의 말투였다.
차라리 흥분해서 화를 냈더라면, 뒤에서 수군대거나 시비를 걸어오는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꺼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 냉담한 얼굴 앞에선 모든 게 한낱 투정쯤으로 들릴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잘 알아요. 남들 시선이 있는 곳에선 나한테 아무 짓도 못 해요. 그러니까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이라도 못 하게 해줘요.”
도훈이 탁자를 손으로 짚으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핏줄이 불거진 남자다운 손에 어울리는 기다란 손가락이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 손가락을 따라 수안의 가슴도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가 된 것처럼 두방망이질했다.
“아저씨한테는 내가 가진 지분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요.”
엄마의 손을 잡아끌고 그 집을 도망쳐 나올 때 결심한 게 있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 엄마가 죽을 만큼 맞으면서도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는 걸 봤을 때, 자신 또한 그러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 절대로 남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일은 없도록 하리라 다짐했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설계하고 가꾼 꽃길만 사뿐히 걷다가, 제 의지를 상실한 채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기만 했다.
극진히 보호받고 완벽하게 세팅된 인생을 살다가, 바른 선택인지 아닌지 구분도 못 하고 제 인생을 내던져 버리는 얼간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네가 가진 지분 때문에 내가 경호를 붙였다?”
“아닌가요? 아저씨가 관심 있는 건 내 안전뿐이잖아요. 내 생활이 어떻게 되건 관심 없잖아요.”
탁자에서 손을 떼어낸 그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커다란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절로 위축되는 것 같았다.
“안전이 우선돼야 다음도 있는 거야.”
“그럼 당분간은 이불 속에만 있어야겠네요.”
불퉁해서 한 소리에 도훈이 미간부터 찌푸렸다.
“그런 뜻 아닌 거 알면서, 어린애처럼 비꼬지 마.”
이번엔 수안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은근히 기분이 나빴던 ‘까불지 마라.’보다 ‘어린애처럼’이라는 말은 두 배는 더 기분이 나빴다.
동등한 입장에서의 대화라고 생각했던 건 순전히 그녀만의 착각이었던가 보다.
도훈은 그녀를 시종일관 어린애 취급 하고 있었다.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해 보려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아저씨는 뭐, 너무너무 어른스러워서 결혼한 것도 숨기고 여자를 막 데려오고 그랬나 봐요?”
“숨기긴 누가…….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아저씨는 완벽하게 못 하면서, 나한테만 이것저것 다 감수하라고 하니까 그렇죠.”
“널 위해서 그러는 거 아냐.”
평상심을 유지하던 도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래 봐야 남들 또박또박 얘기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포커페이스의 달인인 데다 감정 절제의 끝을 달리는 도훈으로서는 엄청난 변화나 다름없었다.
그룹의 사활을 건 미팅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분분할 때조차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던 도훈이었다.
그런데 겨우 고등학생 여자애를 상대로, 그것도 날을 세운 눈이고, 굳게 맞잡은 손이고, 떨림이 덕지덕지 묻은 겁쟁이를 상대로 감정 조절을 못 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애의 뭐가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는 건지 알아봐야 했다. 아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어쨌든 넌 내 책임이니까, 널 위해서라면 뭐든…….”
“내가 언제 책임져 달랬는데요? 그게 다 법정후견인으로서의 권한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요. 괜히 날 위하는 척 위선 떨지 마요.”
꽉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말이 아니라 대판 몸싸움이라도 한 것처럼 거칠었다.
악착스러워 보여야 할 열 오른 볼이 이상하게도 솜사탕처럼 여릿해 보였다.
옴팡 힘을 주고 있음에도 원래 악한 기운이 없었던 눈은 간식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강아지의 그것처럼 앙증맞았다.
흥분한 어린애의 투정이려니 반은 접고 들어간다고 쳐도, 억울하고 기분 나쁠 소리임에도,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도훈은 맥부터 빠졌다.
“아저씨가 모르는 게 있는데요, 난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약하지 않거든요. 체력단련도 꾸준히 하고 있고, 호신술도 배우고 있다고요.”
체력단련도 호신술도 이 회장과 살기 시작하면서 꾸준히 해온 것치곤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수안은 시침을 뚝 떼고 얼굴을 치켜들었다.
한차례 마른세수를 한 도훈의 시선이 수안의 가녀린 어깨와 가는 손목 여릿한 몸체를 훑고 지나갔다.
영 못 미더운 눈치였지만, 막상 입에서 나온 말은 수긍의 뜻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 안에서만 경호 안 붙이면 되겠어?”
이렇게 쉽게?
투지에 불타 야무지게 다물려 있던 수안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네. 하, 학교 안에서만…….”
“알았어. 그렇게 지시해 놓도록 하지. 뭐 더 할 말 있어?”
“아니요. 그거면, 아, 맞다. 연락처! 아저씨 전번 좀 알려주세요. 그, 꼭 연락할 거는 아닌데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수안의 앞으로 쭉 내밀어졌다.
수안은 흠칫 놀라기부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