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보!
엄마와 함께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로 굳게 결심한 게 있었다.
주눅 들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것도, 눈치를 보며 지레 몸을 사리는 것도 모두 고치고 말리라.
물론, 오랜 시간 성격처럼 굳어져 버린 성향들을 단번에 고치긴 힘들어서 여전히 눈치 보는 일도 주눅 드는 일도 잦았지만, 예의도 없는 데다 자기 과시에 여념이 없는 이 여자에겐 결코 주눅 들고 싶지 않았다.
“아줌…… 허! 회장님 손녀라더니 제법 당돌하네.”
“그래서 당돌한 건 아니고요.”
“하, 얘 웃긴 구석이 있네. 어쨌든 회장님하고 네 어머니 일 유감이야. 어린 나이에 상심이 컸겠구나 싶어서 위로해 주려고 나이 물어봤다가 내가 아주 별소릴 다 들어본다. 허, 아줌마라니.”
“그 위로 받을지 안 받을지는 그쪽이 누군지, 왜 이 방에 있는지 듣고 결정하도록 하죠.”
“어머, 얘가 점점. 너 사춘기니? 왜 이렇게 배배 꼬였어? 우리 사장님, 너 때문에 골치깨나 썩게 생겼네.”
삐딱하게 선 지희가 팔짱을 척 끼며 수안을 꼬나봤다.
양팔에 밀려 올라간 가슴이 한껏 도드라졌다. 자신이 성숙한 여자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내가 누군지 궁금해?”
성큼 다가서는 지희의 시선은 수안보다 5㎝쯤 더 위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 작은 키도 아니었고, 키 때문에 고민해 본 적도 없었건만, 이 순간만큼은 눈앞의 여자보다 0.1㎝라도 더 크지 못한 게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게 아니면 차도훈과 내가 무슨 관계인지가 궁금한 건가?”
‘어린애 주제에’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하여튼 불쑥 코앞으로 다가온 지희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른 건 몰라도 아마 이거 하나는 확실할 거야. 너보다는 내가 차도훈과 훨씬 가까운 사이라는 거.”
아이라인이 짙게 드리운 지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던 수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슬쩍 뒤로 젖혔다.
지희에게서 얕은 콧방귀 소리가 들려왔다.
“좀, 떨어져 줄래요?”
“왜? 부담스럽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해해. 내 옆에 있으면 은근 긴장되고 그런다더라.”
“아이 참, 그런 게 아니라요, 그쪽 냄새 되게 구리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바짝바짝 붙지 좀 마요.”
멍하게 벌어졌던 지희의 눈이 일그러진 건 순식간이었다.
눈코입이 또렷한 미인형 얼굴이 금세 험악하게 돌변했다.
순간 섬뜩함을 느낀 수안이 다시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어떤 예고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행해지던 폭력에 익숙해진 수안의 본능은 이런 식으로 별것 아닌 것에도 경계심을 드러내게 했다.
“두 사람, 거기서 뭐 해?”
갑자기 들려온 도훈의 목소리는 너무 반가워서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기민하게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지금이 바로 지희에게 깊은 깨달음을 안길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었다.
실행은 빠를수록 좋았다. 생각이 많아져서 망설임이 짙어지면 이도저도 못 하기 십상이다.
가방을 팽개친 수안은 억지 미소를 머금고, 저만치 떨어진 도훈을 향해 달렸다. 그러고는 냅다 품으로 뛰어들었다.
‘억’ 소리가 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쨌든 수안의 등 뒤로 도훈의 팔이 감겨왔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이제 도훈이 엉뚱한 소리를 하기 전에 크게 한 방 날릴 차례였다.
“잘 다녀오셨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여, 보.”
차마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턱쯤에 시선을 두고 한 말에 도훈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익숙지 않은 여보는 중간에 뚝 끊겼다가 부자연스럽게 이어졌지만, 지희에게 전달되기엔 충분했으리라 짐작했다.
“이게 무슨…….”
낮게 중얼거리는 도훈의 말을 막기 위해 수안은 한껏 발돋움해 단단한 목을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재빨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진짜 부부처럼 보여야 한다면서요.”
그의 시선이 지희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두꺼운 코트 너머로 맞닿아 있음에도 도훈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는 걸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도훈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차도훈과 훨씬 가까운 사이라던 지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애인이 될 확률이 높은 사이라면. 막 썸타기 시작한 사이라면.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도훈은 지금 곤란한 상태인 게 분명했다.
당분간 부부 행세를 해야 하는 가짜 아내와 썸타는 여자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고민에 휩싸인 게 분명했다.
예의 없는 여자를 향한 적절한 한 방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갑자기 어린애의 치기 어린 심술쯤으로 느껴졌다.
그의 품에 뛰어드는 순간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했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장난이었다고 할까?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해야 하나?
아우 씨, 여보는 하지 말걸.
도훈의 목을 감고 있던 수안의 팔에서 슬금슬금 힘이 빠져나갔다.
발돋움하고 있던 뒤꿈치가 제 마음만큼이나 격하게 아래로 쿵 떨어졌다.
수안의 팔이 도훈의 목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기 직전, 그녀의 등 언저리에 엉성하게 놓여 있던 커다란 손이 별안간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번엔 수안의 입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삼스럽게 놀랍지? 늦어서 미안. 많이 기다렸어?”
허리에 감긴 손도 부담스러워 미치겠는데, 감기지 않은 다른 손은 그녀의 머리칼까지 쓸어 넘기고 있었다.
몸을 던져 안길 땐 미처 이런 것까진 예상을 못 했던 터라, 당황한 수안은 그저 벙해졌다.
“그렇게까지 많이는, 아, 아니, 기다렸어요. 그랬나 봐요.”
“흠, 그래.”
도훈이 무람없이 수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을 타고 좋은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정말 혹해 버릴 것 같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의 목에서 팔을 풀어낸 도훈이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돌려세웠다.
잠시 잊고 있었던 지희가 수안보다 더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
“두 사람 벌써 인사는 나눈 건가? 여긴 내 와이프 백수안, 저쪽은 비서실장 장지희.”
와이프라는 생소한 말에 몸서리를 친 수안이 도훈을 힐끔 올려다봤다.
도훈은 늘 그렇듯 무심한 표정이었고, 수안은 그게 왠지 안심이 됐다.
“와이프요? 선배가 쟤랑 결혼했다고요? 그런 말 한 적 없잖아요.”
지희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선배라는 예전 호칭으로 도훈을 불렀다.
“장 실장한테 내 개인적인 일을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
“우리가 몇 년을 함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쟤랑…… 거짓말이죠? 내내 뉴욕에 있었잖아요. 결혼할 시간도…….”
“장 실장, 개인적인 일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
나직한 목소리가 차게 울렸다. 무심하던 눈빛에 날이 섰다.
금세 얼어붙어 버린 분위기에 수안의 몸도 움츠러들었다.
“내가 필요 이상 선을 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잘못 파악한 건가?”
‘헉’ 하게 생긴 눈빛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허튼짓하면 죽일 것 같은 눈빛이라고 말은 했지만, 제대로 실감은 못 했던 수안이 깊은 깨달음을 얻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아주 풀풀 흐르는 냉기에 숨조차 크게 내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사장님, 저는……. 아닙니다, 사장님.”
조금의 여지도 없는 경고였다.
이 이상 선을 넘으면 비서실장 자리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의 경고를 영악한 지희가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물러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도훈이 저 계집애와 진짜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지금은 따지고 들 때가 아니었다.
5년을 넘게 도훈을 봐왔다.
속내를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그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음을 여자로서의 육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현재 도훈과 백수안의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도훈은 잡음 없는 경영권 승계를 위해 수안이 상속받은 지분이 필요할 테고, 백수안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든든한 법정후견인이 필요할 터였다.
결국, 결혼의 진위 여부를 떠나 저쪽도 비즈니스 관계일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다.
언제고 틈은 생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희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은근한 끈기를 발휘할 줄 아는 타입이었다.
“두 분 오붓하게 저녁 식사 하게 저는 아무래도 이쯤에서 빠져 드리는 게 좋겠네요. 사장님, 양해해 주신다면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출근하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그렇게 해.”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인 지희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그들을 지나쳤다.
그런 그녀를 좇아 시선을 옮기던 수안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살짝 처졌다.
본격적으로 싸운 것도 아닌 데다 지희가 알아서 물러나는 상황인 데도, 어쩐지 싸움에서 진 것처럼 찜찜했다.
이게 다 이놈의 아저씨 때문이었다.
아무리 위장결혼일망정 자신의 비서한테조차 알리지 않았다는 건 분명 잘못이었다.
앞으로의 날들을 생각하면, 심도 깊은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우린 대화가 좀 필요한 것 같지 않아?”
오! 이런 게 바로 이심전심인가?
“안 그래? 여보!”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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