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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지고 싶지 않아 (8/88)

8. 지고 싶지 않아

일주일에서 하루가 더 늦어버렸다.

정말 화장실 갈 시간까지 아껴가며 일했음에도 워낙 벌여놓은 일이 많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을 더 많이 잡아먹었다.

수안에게 약속했던 일주일이 지나 버렸다는 것도 비행기를 타고서야 깨달았다.

하루 더 늦어졌다고 해서 수안이 따지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았지만, 괜스레 초조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공항으로 마중 나온 전무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내고 곧장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꼬맹이가 잘 먹고, 잘 자고, 안 울고 있었는지 확인해야 다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장님, 어차피 저녁 시간 다 돼가는데, 오늘은 아예 하루 쉬는 거로 일정 조정할까요?”

“아니, 집에 잠깐 들렀다가 회사 들어가 볼 거야. 나 신경 쓰지 말고 장 실장은 숙소 들어가서 쉬라니까.”

“저를 쉬게 하고 싶었으면 사장님부터 쉬셨어야죠. 제가 또 의리 빼면 시첸데, 사장님만 전쟁터에 몰아넣을 수는 없죠. 안 그래요?”

조수석에 앉은 지희가 뒤를 돌아보며 찡긋 윙크를 날렸다.

와튼 스쿨에서 MBA 과정을 밟을 때 인연을 맺게 된 지희는 자기중심적이고 자유분방한 면이 있었지만, 업무 처리 능력 하나는 확실했고, 도훈과도 손발이 잘 맞았다.

하지만 이 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도훈의 한국행이 결정됐을 때, 그는 지희를 본사 발령에서 제외시켰었다.

열두 살 때 이민을 해 뉴욕의 코리아타운에서 쭉 살았으며 영주권까지 획득한 지희에게 한국은 타국이나 다름없을 거라 생각했다.

한국에는 이미 비서진이 구성되어 있었고, 굳이 지희에게 한국행을 권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희가 자신이 상사로 모시고 싶은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다며 비서실장 자리를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정말 뉴욕을 떠나도 괜찮겠느냐 물었더니, 부모와 떨어졌다고 울 나이는 아니라는 말에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말았다.

“오! 집이 멋진데요.”

점점 가까워지는 이 회장의 저택을 본 지희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짐만 내려놓고 두 시간 안에 갈 거니까, 장 실장은 이 차 타고 회사로 가도록 해.”

“어머, 집 구경도 안 시켜주시는 거예요?”

“구경할 만한 것도 없고, 사적인 공간이야.”

“매정하시네요. 16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기념으로 가정식 백반 정도는 대접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말이에요.”

지희는 여우 같은 구석이 있었다.

표정과 말을 자유자재로 꾸며내 상대방의 마음을 조정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한껏 서글픈 표정으로 힘없이 중얼거리는데, 차마 매정하게 끊어낼 수가 없었다.

급하게 결정된 일이라 미처 집을 구하지 못한 지희가 당분간 호텔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집 구경은 안 돼. 저녁 식사는 제공하지. 내려.”

“사장님, 땡큐.”

도훈의 뒤를 따라 주차장 계단을 오르는 지희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방방 뛰고 있는 자신의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사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저 배어 나오는 기쁨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도훈의 사적인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싶어서 와튼 스쿨 시절부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절대로 뚫리지 않을 철옹성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는 정말 포기해야 하는 건가 심사숙고 중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첫발을 떼게 될 줄 꿈엔들 알았을까.

부모님이 계신 뉴욕을 떠날 결심을 한 제 자신이 이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매정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도훈이 햇솜보다도 더 폭신폭신한 속내를 숨기고 있을 거라는 건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로움을 부각시켜 약간의 동정심을 이끌어내려 한 자신의 계획이 이렇게 잘 먹혀들 줄은 미처 몰랐다.

‘흠, 이 집도 곧 차도훈 게 될 거란 말이지. 저렇게 다 가진 남자가 내 인생에 나타나다니, 난 정말 행운아야.’

감격에 겨워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주방 쪽에서 나타난 인자한 인상의 중년부인이 도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어서 와. 이제 완전히 들어온 거지?”

“네, 아주머니. 별일 없었죠?”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은 것 빼곤 별일 있을 게 뭐 있어. 북적거리던 집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허전한지 원.”

하소연하듯 구시렁거리던 경원 아줌마가 기어코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코를 훔쳤다.

“아유, 배고프지? 수안이도 올 때 다 됐으니까 같이 저녁 식사 하면 되겠네. 얼른 씻고 나와.”

“네. 우선 짐 옮겨놓고 손만 씻고 나올게요.”

“근데, 이 아가씨는 누구야?”

도훈의 뒤쪽에 선 지희를 발견한 경원 아줌마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는데, 마침 도훈의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제 비서실장이에요. 집밥이 먹고 싶다고 해서……. 전 잠깐 전화 좀. 네, 최 소장님. 말씀하세요.”

도훈이 전화 통화를 위해 서재로 이동하자, 지희와 경원 아줌마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안녕하세요. 비서실장 장지희예요. 앞으로 자주 드나들게 될지도 모르니까 잘 부탁드릴게요.”

지희가 활짝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지희의 얼굴과 내밀어진 손을 번갈아 바라보던 경원 아줌마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았다가 놓았다.

“비서가 사장님 댁에 자주 드나들어야 할 일이 있을까 싶네요.”

“글쎄요. 그건 사장님이 알아서 결정하실 일이고. 사장님 방이 어딘지나 알려주시겠어요? 짐 좀 옮겨놔야겠네요.”

지희에게선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났다. 그냥 딱 봐도 불여시였다.

하지만 도훈에게 비서실장이라고 소개까지 받은 데다, 저녁 식사에 초대한 손님을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마지못해 도훈의 방을 알려줬다.

도도한 미소를 머금은 지희는 캐리어 두 개를 양손에 나누어 쥐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어갔다.

타이트한 스커트에 감싸인 엉덩이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걸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경원 아줌마는 식사 준비를 마치기 위해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캐리어를 방 안쪽으로 들여놓은 지희는 깔끔하지만 어쩐지 정감이 없어 보이는 방을 쭉 둘러봤다.

휑한 전경이 딱 마음에 들었다.

도훈에게 채워야 할 부분이 있고, 그 역할을 자신이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희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내친김에 짐 정리라도 해볼까 싶어 드레스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난데없이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아저씨, 내가 오…….”

흠, 태성그룹의 유일한 상속녀로구만.

“네가 백수안이구나! 안녕? 나는 장지희야.”

화장기 없는 뽀얀 피부에 옅은 홍조가 깃들어 반짝반짝 빛이 나던 얼굴이 금세 굳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뭐, 제법 미인이긴 한데 그래 봤자 어린애지. 겁먹은 강아지처럼 동그래진 눈에 가득 들어찬 경계심만 봐도 어린 태가 확 느껴졌다.

“누구, 세요?”

“글쎄, 차도훈 애인?”

붉고 선명한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그대로 쫓고 있던 수안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동요한 빛을 숨기기 위해 가방끈을 꽉 움켜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저 여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안이 판단한 도훈은 애인이 있음에도 그녀와의 위장결혼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애인이란 단어를 입에 올린 당당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눈은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사업가로 성공하려면 사람의 눈빛에서 많은 걸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고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거짓을 말할 때나 불안함을 느낄 때의 눈동자의 움직임에 대해 알려주기도 하셨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장지희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맞았다.

그런데도, 거짓임을 아는 데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어머, 표정 봐. 하하하, 정말 놀랐나 보네. 흐흐, 농담, 농담이었어. 흠, 아직은 아니니까.”

뭐, 이런 황당한…….

저 여자가 도훈과 그녀의 관계를 알고도 그런 농담을 한 거라면, 그건 엄연한 도발이었다.

너를 밀어내고 도훈을 차지하고 말 거라는 도발.

하지만 모르고 한 농담이라면 그건 분명 도훈의 잘못이었다.

대외적으로 진짜 부부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이 집까지 데려올 정도로 가까운 여자에게 결혼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누구세요?”

수안은 다시 한번 그녀의 정체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 갔다 오나 보네. 한국은 아직 방학 아닌가? 몇 학년? 중3? 고1?”

코트 속에 입고 있는 교복을 살피는 지희의 눈에 얕잡아 보는 듯한 빛이 살짝 어렸다.

타이트한 비즈니스 정장 차림으로 남다른 볼륨감을 과시하고 있는 자신이 더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내가 몇 학년인 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그러는 아줌마는 몇 살인데요? 먼저 밝히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요?”

유치한 줄은 알았지만, 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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