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기다림
무엇도 아닌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서 수안은 하릴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너를 경호할 사람이 올 거야.”
“경호요? 나 위험한 상황이에요?”
“만일을 대비하는 거야. 불편해도 네 안전을 위한 조치니까 그대로 따르도록 해.”
“내가 아저씨 부하직원이 된 것 같네요. 하마터면 재수 없다고 할 뻔했어요.”
“까불지 말고 대답이나 해.”
다시 한번 코가 잡혔지만, 수안은 이번에도 도훈의 손을 쳐내지 못했다.
그저 그의 손이 지나간 뒤에 화끈거리는 것 같은 코를 가린 게 다였다.
그러고는 어린애처럼 또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의 고갯짓을 확인한 도훈은 더 이상 용건이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다. 이만 올라가서 자라.”
“네? 네.”
수안이 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코 말이 많거나 편한 타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훈과의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대로 헤어지는 게 조금 섭섭할 정도였다.
일단, 어른 남자는, 특히나 외양이 그럴듯한 남자는 경계부터 하고 보는 수안으로선 의외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수안은 원래 다른 사람의 판단에 편승하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이 회장과 주은이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경계하고 주의 깊게 살펴야 맞았다.
하지만 도훈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경계는 물론이거니와 살피는 것도 잊었었다.
거기에 보태 그와의 대화가 끝난 것에 아쉬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엄마와 외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마음이 허해져서 이러는 거겠지? 그 이유 말고는 상당히 찜찜한 현재의 상태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차도훈과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협력관계여야 했다.
완전히 믿어서도 안 되고, 사적인 감정을 공유해서도 안 된다.
혹했다가 헉 하는 일 없도록 마음을 굳게…….
“아, 그리고.”
“네?”
아우 씨, 부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대답이 이렇게 재빨라.
입꼬리 너, 왜 자꾸 씰룩대는 건데. 정신 못 차리지?
“뭐 더 할 말 있어요?”
최대한 심드렁하게, 최대한 무심하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꾸며내느라, 수안은 자신의 어깨가 한껏 긴장해서 치솟은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내 눈빛이 그렇게 무서워?”
“아니요. 아닌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긴장해?”
“아아, 이건 그냥, 추워서 그래요. 추워서.”
그제야 도훈의 시선이 닿은 자신의 어깨가 움츠러든 걸 깨달은 수안이 추운 시늉을 하느라 손으로 양팔을 비벼댔다.
최적의 난방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어서 실내는 약간 더운 편이었지만, 도훈은 고개만 한 번 갸웃했을 뿐 수안의 어설픈 거짓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사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실내 온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백수안 그…….”
“그, 뭐요?”
“그 호칭 말이야. 그게 최선이야?”
“호칭? 뭐, 아저씨요? 그게 왜요?”
“그게 좀……. 아니다. 됐다, 그만 자라.”
아저씨라는 호칭이 정말 왜 이상한지 모르겠다는 듯 그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제 입장에선 졸지에 애 딸린 보호자가 된 것 같아 영 억울했다.
하지만 수안의 입장에선 열 살이나 많은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치졸한 속내를 꺼내놨다가는 진짜 아저씨라는 놀림을 받을 것만 같아서, 애써 말을 삼켜 버렸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로 할까요? 적당한 게 생각이 잘 안 나서……. 여보나 자기, 이런 게 나을…….”
“큽. 꼬맹이, 헛소리하지 말고 그만 가서 자라.”
근엄한 척 목소리를 깔았지만, 수안은 도훈의 음성에 떨림이 섞여 있는 걸 알아챘다.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다이닝룸을 나서는 그의 어깨가 흠칫했던 것도 보고 말았다.
‘저 아저씨 은근 귀여운 구석도 있었네.’
수안은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머릿속에 저장하듯 곱씹으며, 뉴욕에서 일주일 안에 돌아오면 모든 아저씨들의 꿈의 호칭인 ‘오빠’로 격상시켜 주리라 다짐했다.
그때부터 기다림이 시작됐다.
달력을 힐끔거리기도 하고, 뉴욕은 몇 시인지 검색해 보기도 하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게 기다림인 줄도 몰랐다. 왠지 초조하고 허전해서 이게 뭔가 곱씹어볼 즈음 일주일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흠, 아저씨 확정.”
“어? 뭐, 뭐가 확정인데?”
수능 성적표를 받아 들고 한껏 예민해진 나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안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것도 아니야.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눈을 가느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수안을 살피던 나미가 난데없이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미안. 코앞의 현실에 눈이 멀어서 네 슬픔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이 못난 친구를 용서해라. 응? 그깟 대학이 뭐가 중요하다고, 정말 미안.”
나미는 매번 싫다 하고 수안은 매번 귀엽다고 하는 폭신하고 통통한 볼이 수안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미 특유의 달짝지근한 냄새에 미소가 절로 맺혔다.
장례식장에 두 번이나 오가며 울지 않는 수안을 끌어안고 대성통곡까지 했으면서, 이 착하고 여린 친구는 아직도 위로가 부족했다 여기는 것 같았다.
“용서 못 하겠는데. 대학이야, 나야? 둘 중에 하나만 골라.”
목 뒤로 감긴 나미의 팔이 흠칫 굳어졌다.
정말 대학과 친구 중에 무얼 고를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간 말이 없었다.
“풋!”
꾹꾹 눌러 참으려 해도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미가 너무 좋아서. 곱디고운 친구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수안의 웃음소리에 그제야 장난인 걸 깨달은 나미가 냉큼 팔을 풀고 흘겨봤다가, 이내 다시 끌어안고 짤짤짤 흔들어댔다.
“뭐야아. 백수안, 죽고 싶지?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켁켁. 나, 나미야, 이것 좀, 켁.”
넘치는 우정만큼이나 과한 힘을 자랑하는 나미의 팔이 갑작스레 풀려났다.
“유나미, 작작 좀 해라. 애 잡겠다.”
머리 하나만큼 높은 위치에서 태경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뜩이나 삐쩍 곯아서 위태위태한데 그만 좀 괴롭혀라.”
“내가 뭐얼? 수안이 이 계집애가 먼저 장난쳤거든.”
투덜대는 나미를 돌려세워 어깨를 감싼 태경이 남은 팔로 수안을 끌어다 어깨 위에 팔을 턱 걸쳤다.
수안이 슬쩍 팔을 걷어내려 하자, 태경이 ‘억’ 소리가 나도록 당겨 감쌌다.
“야, 배 안 고프냐? 피자 먹으러 갈까?”
“태경이 네가 사면 가고.”
입은 벌써 헤벌쭉해진 나미가 새침하게 말을 건넸다.
“그래, 이 오빠가 쏠 테니까 어서 가기나 하자고.”
“저기, 나는 아무래도…….”
“어! 저 언니 또 저기 서 있네. 춥지도 않나 봐.”
월요일부터 수안의 경호를 맡고 있는 현진은 지나치게 임무에 충실한 타입이었다.
수안의 지속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현진은 자신이 마지노선으로 정한 중앙현관을 끝끝내 고수하고 있었다.
좀, 아니, 아주 많이 불편했다. 아이들 시선도 너무 신경 쓰였고, 그녀가 추위에 떨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피고용인에게 과도한 충성을 종용하는 막돼먹은 재벌가 공주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현진이 과도한 충성심을 보이는 고용인은 수안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애원하고 사정해도 고집불통 경호원 언니는 중앙현관에서 한 발짝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추운 겨울날 눈에 확 띄는 칼같이 날을 세운 검은 정장 차림을 고수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중이었다.
현진의 고용인, 그러니까 차도훈과 하루라도 빨리 단판을 지어야 했다.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확실한 이유 중 하나였다.
“휴우, 미안. 나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피자는 다음에, 아니, 그냥 나 빼고 먹는 게 좋겠다.”
“너 빼고 무슨 재미로. 저 언니한테 말하고 피자만 먹고 들어가면 안 돼?”
나미가 뚱한 표정으로 졸라댔다.
“피자 가게 앞에 저러고 서 있으면 나 얹힐지도 몰라. 다음에 꼭 같이 먹자.”
수안이 서둘러 인사를 건네며 태경의 팔을 밀어내자,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마음이 불편해진 수안은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언니, 정말 죄송한데요, 그냥 차에서 기다리시면 안 돼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준비하고 준비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놨을 때, 현진은 다시 말 붙이기도 겁날 정도로 딱 잘라서 밀착경호를 지시받았다는 말을 했다.
화가 나다 못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주일 안에 돌아온다던 밀착경호를 지시한 양반은 열흘이 다 돼가도록 깜깜무소식인 데다, 수안은 그의 연락처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형식뿐인 결혼이라지만, 아내가 남편 연락처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아니, 그리고 어떻게 열흘 가까이 외박을 하면서 연락 한 번 없을 수가 있어.
오늘도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말리라 각오를 다지며 차에서 내리는데, 주차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낯선 차 한 대가 수안의 시선을 끌었다.
이유도 없이 가슴부터 뛰었다. 화가 났던 마음은 금세 다른 감정으로 물들었다.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치켜 올라갔다.
현진에게 인사도 않고 재빠르게 한 발 두 발 걸음을 떼다가 숫제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닿도록 계단을 뛰어올라 집 안으로 들어서서는 곧장 1층 왼쪽 끝방으로 내달렸다.
방 앞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른 수안이 짧게 두 번 노크를 하곤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아저씨, 내가 오…….”
“네가 백수안이구나! 안녕? 나는 장지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