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아저씨 몇 살? (6/88)

6. 아저씨 몇 살?

그녀에게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했다.

남들 눈엔 어리고 미숙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수안은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기에 제 나이가 결코 적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도훈의 참견 따윈 필요 없었다.

어설픈 부모 노릇에 맛들인 사람처럼 대화 좀 하자는 그의 말에 학교와 과까지 낱낱이 까발린 건, 순전히 라면으로 간만에 배를 채운 뒤라 마음이 한껏 여유로워졌기 때문이었다.

“신경 쓰고 안 쓰고는 내가 결정해. 그리고 요 며칠 넌 신경을 써야 할 만큼 위태로웠고.”

“그거야…… 자포자기 같은 거 아니었어요. 그저 충분히 슬퍼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이제 안 그럴 거예요.”

“그거 다행이군. 그럼 내가 뉴욕에 가 있는 동안 별일 없을 거라 확신해도 되겠지?”

“뉴욕 가요?”

급하게 물어놓고 수안조차도 어리둥절했다. 마치 그가 떠나는 게 싫은 것처럼 반응한 것 같아 괜스레 머쓱했다.

“뉴욕지사 일 마무리되는 대로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돌아올 거야. 왜? 내가 가는 게 싫어?”

“아아니요오. 미쳤어요? 내가 왜…….”

얼굴에 열이 올랐다. 붉어져 있을 게 뻔해 수안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철도 일찍 들고 사춘기도 패스했더니, 나이를 먹기도 전에 갱년기가 찾아온 건가. 왜 이렇게 자꾸 얼굴이 시시때때로 붉어지는 걸까.

애송이같이. 완전 창피하게.

“흠흠, 아까도 말했지만, 나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아저씨 일 보세요. 나는 내가 알아서 잘 살게요.”

“그건 곤란하겠는데.”

단호한 도훈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것도 잊은 수안이 고개를 들어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대체 뭐가 곤란하다는 소린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신경 쓸 필요 없이 잘 살겠다는데 그게 어째서 곤란하다는 걸까?

설마, 정말 남편 행세라도 하려는 걸까?

느끼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깔끔한 그의 이목구비를 살피는 수안의 눈이 살짝 조프려졌다.

솔직히 나이 들어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이마를 가린 앞머리 때문에 지금의 그는 대학생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정말 이 아저씨, 몇 살이나 먹은 걸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백 검사, 네 아버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야. 아마 우리 결혼이 가짜라는 걸 밝혀내기 위해 혈안이 돼서 움직일 거야.”

그런 의미였구나! 나는 또…….

“불편하겠지만, 당분간은 함께 살아야 할 것 같아. 되도록 피할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엔 공식석상에 함께 참석해야 할 일도 생길 거고.”

“…….”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대외적으로 우리가 부부처럼 보여야 돼.”

“으음, 잘 접수했어요.”

며칠 전 임기응변 사랑 고백에 도훈이 보여줬던 반응을 수안이 그대로 되돌려줬다.

“좋아. 뭐 더 궁금한 거 있어?”

“내가 성인이 된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혼 절차를 밟게 되겠지.”

어쩌면 당연한 말인데, 수안은 살짝 짜증이 났다.

자신의 결혼이고 자신의 이혼인데, 자신의 의사는 전혀 반영이 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게 설사 엄마라고 해도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한은 없었다.

“내가 이혼하기 싫다고 하면요?”

여유만만, 유유자적, 그녀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듯 굴던 도훈의 표정이 찡그려지는 것에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처음으로 한 방 제대로 먹인 것 같아 우쭐했다.

“열렬한 사랑 고백에 이어 이젠 이혼하기 싫다고 매달리기까지? 너 도대체 나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 거냐?”

“예에? 미쳤어요?”

“그러니까. 정신과 상담 예약 잡아줘?”

농담임이 분명한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못 할 만큼 바보는 아닌데, 너무 정색하고 저런 말을 하니 전혀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진지에 밥 말아 드신 것 같은 표정도 너무 기가 막힌데, 이젠 숫제 휴대폰까지 뒤지고 있었다.

마치 진짜 상담 예약이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그것도 새벽 1시에.

졌다, 졌어.

유머 코드가 안 맞는 건 도저히 방법이 없다.

“그냥 해본 소리였어요. 유머 코드도 안 맞고, 이혼해야겠네요.”

“까불지 마라.”

완전 애 취급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입이 절로 삐죽거려졌다.

중3 때 학교 담장 넘는 걸 도움받은 이후로,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여직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는 태경도 가끔 그녀에게 그런 비슷한 말을 하곤 했다.

생일도 그녀보다 무려 석 달이나 늦는 녀석이 ‘혼난다. 까불지 마라.’라거나 ‘까불지 말고 오빠 말 들어라.’ 같은 말들을 제법 진지한 얼굴로 해댔다.

하지만 수안은 전혀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도훈의 ‘까불지 마라.’는 뭐가 다른 건지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한마디라도 투덜댔다가는 정말 애 취급당하고 말 것 같아 애써 눌러 참은 수안은 좀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화제로 말을 돌렸다.

“우리 결혼, 엄마가 부탁한 거죠?”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도훈을 현관 앞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날.

엄마는 간절한 표정으로 도훈의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도훈은 엄마를 보고 있지 않았다.

윤곽이 뚜렷한 턱엔 잔뜩 날이 서 있었고, 보기 좋은 입술은 지나치게 꽉 다물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무언가를 부탁했고, 그는 그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잡힌 손을 빼내지 않고 있는 걸 보면, 그가 보기보다 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랬지.”

“왜 받아들였어요?”

싫어했잖아요.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할 다른 방법이 없었어.”

결국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였다.

이럴 땐 참 나이라는 걸림돌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건만, 그걸 어느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건 참 거지같았다.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까?”

“아저씨가 왜요? 엄마가 부탁한 건데. 나랑 이혼하고 나면 졸지에 이혼남이 되는 건데, 오히려 내가 미안해하는 게 맞죠. 이혼남 되는 거 괜찮아요?”

그는 어깨부터 으쓱해 보였다.

“네가 괜찮다면 난 상관없어.”

“나야 뭐, 분명 돈 많고 매력적인 이혼녀일 테니까 괜찮을 거예요. 이런 이혼녀 흔치 않죠.”

그녀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내려앉았다.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미소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속 어딘가를 살살 긁어대는 불편한 미소.

도훈은 그게 묵직한 책임감에서 오는 불편함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게. 라면 먹으면서 콧물 질질 흘리는 이혼녀는 분명 흔치 않지.”

“아, 진짜. 아저씨 은근 얄미운 거 알아요?”

“글쎄, 그건 좀 고상한 평인 것 같은데. 보통은 재수 없다고 하더라고.”

“어머! 그걸 대놓고 말하는 사람이 있나 봐요.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꽤 용기 있는 사람이겠네요.”

“그게 용기씩이나 필요한 말인가?”

“아저씨 얼굴 보면서 말하려면요.”

“내 얼굴이 뭐?”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수안의 청아한 눈이 도훈을 빤히 쳐다봤다.

또다시 살살 긁어대는 것 같은 간질거림이 도훈을 불편하게 했다.

난생처음 먼저 상대방의 시선을 피했다.

웬만한 사람은 감당하기 버거운 서슬 퍼런 이 회장의 눈조차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던 도훈이었다.

눈빛이 살아 있다며 껄껄껄 웃어재꼈던 이 회장의 음성이 아직도 생생한데, 서슬은커녕 불순한 의도조차 없는 여자애의 눈에 꼬리를 만 개처럼 시선을 피했다는 사실이 저조차도 믿기지가 않았다.

“음, 혹했다가 헉 하는 얼굴이요.”

시선을 피했다는 사실에 충분히 혼란스럽다 생각했던 마음은 수안의 아리송한 말에 더욱 갈피를 못 잡았다.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에 수안은 장난스럽게 코를 찡끗거렸다.

“잘생김에 혹했다가 눈빛 보고 헉 한다고요. 아저씨가 이렇게 눈에 힘주면 허튼짓하면 죽어, 딱 그런 눈빛이잖아요.”

“허어!”

수안이 뭘 의도했건, 미간에 힘을 주는 모양새가 마치 허튼짓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은 느낌이라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내 눈빛이 무슨……. 넌 그런 나를 뭘 믿고, 이 결혼 괜찮겠어?”

뜻밖의 질문이었을까. 아연한 눈빛으로 잠시 말이 없던 수안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도 다른 방법이 없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상속 포기가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는데, 그런다고 아버지한테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더라고요.”

수안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장례식 내내 차라리 도망가 버릴까 고민했어요. 흐, 근데, 엄마와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그 사람한테 맡겨놓는 건 너무…….”

목이 메는지 수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서로 얽혀 꼼지락거렸다.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지만, 아저씨는 엄마와 할아버지가 믿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나도 한 번 믿어보려고요.”

“그래, 현명한 판단이야.”

위로나 입에 발린 약속 같은 건 해본 적 없는 도훈이 건넬 수 있는 최고의 답이었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 건데, 나중에 아저씨 자리 뺏을지도 몰라요. 진짜 열심히 쫓아갈 거니까, 긴장 타고 있으라고요.”

“흠, 그래. 기대, 아니, 긴장하고 있을게. 부지런히 쫓아와.”

커다란 도훈의 손이 수안의 머리 위로 곧장 뻗어왔다.

놀란 수안은 거의 본능적으로 목을 한껏 움츠러뜨렸다.

잠시 멈칫했던 도훈이 그대로 손을 내려 수안의 머리를 자분자분 쓰다듬고는 멀어졌다.

“그러려면 우선 제대로 살아남아야겠지? 잘 먹고, 잘 자고, 그만 울고. 알았지?”

도훈의 손이 닿은 머리 위가 뜨끈한 것 같았다.

잘 먹고, 잘 자고, 그만 울라는 말이 꼭 무슨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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