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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눈물 젖은 라면 (5/88)

5. 눈물 젖은 라면

욕실 문이 닫히고도 한참 동안 수안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뭐야아. 왜 코는 만지고 그러는데?”

괜스레 코를 찡긋거린 수안이 손가락으로 비벼댔다. 그러곤 겨드랑이쯤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구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개코야 뭐야?”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구릴 정도는 아니었다.

설사 구린 냄새가 난다고 할지라도 엊그제 사랑하는 가족의 장례를 치른 아픈 마음을 고려해 그런 말은 피해주는 게 예의 아닌가.

깎아놓은 듯 정갈한 외모와는 달리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완전 잘못 봤다.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미소는 때에 따라 아주 사악해지기도 했으며, 놀릴 건수를 잡은 초딩마냥 예의도 없었고 심술궂었다.

코를 잡았을 때 아주 따끔하게 쳐냈어야 했는데.

코가 너무 예민해서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많이 아파하는 강아지처럼 나도 코가 약점이었던 걸까?

수안은 머리에 샴푸를 두 번이나 하고 아주 꼼꼼히 샤워를 하면서, 유치원생 다루듯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메고, 코도 꼬집고, 씻으라고 명령까지 한 그에게 제대로 항의 한 번 못 한 것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느라 엄마의 방에서 만끽하려고 했던 슬픔은 잠시 잊었다.

가슴을 가득 메웠던 허전함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었던 무기력함도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지만, 그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두툼한 베스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도훈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경계하며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가 이지웨어를 갖추어 입었을 즈음, 아주 익숙한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처음엔 그냥 침대로 기어들어 가 잠을 청해보려 했다. 그가 무슨 냄새를 풍기건 손톱만큼도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봐도 냄새를 막을 수는 없었던 데다, 내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던 장기들이 너무나 유혹적인 냄새에 일제히 깨어나기라도 한 듯 난동을 부려댔다.

몇 번을 문 앞까지 오가며 망설인 끝에 수안은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너무 먹은 게 없어서 계단 조금 내려가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극도의 허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목에 걸려 힘겹게 꾹꾹 눌러 삼켜야만 했다.

겨우 죽 한 술 떠 넣고는 아등바등 살아보겠다고 악착을 떠는 것 같아 제 자신이 싫어졌었다.

한 줌 가루가 되어버린 엄마와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먹는 것마저 죄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저놈의 라면 냄새에 눈이 뒤집혀 버렸다.

고소하고 매콤한 냄새를 풍기는 저 라면 한 젓가락만 입에 넣을 수 있다면 당장 영혼이라도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너무 일차원적인 자신의 모습에 좌절했다.

다이닝룸 앞까지 가서도 막상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건 순전히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먹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무조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지, 이런 황당한 상황이 펼쳐질 줄은 미처 몰랐다는 말이다.

“없다고요?”

“없어. 이게 다야.”

도훈의 말이 사실인지 뒤져볼 여력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또, 라면에 영혼까지 팔 결심을 한 애를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할 만큼 양심 없는 사람은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저기, 그거 다 먹을 건 아니죠?”

“다 먹을 건데.”

“두 개, 아니, 세 개는 돼 보이는데요?”

“걱정하지 마. 문제없어.”

걱정이 막 되는데요. 완전 문제 있게 들리는데 어쩌죠?

“어, 억지로 먹을 거면 조, 조금만 덜어…….”

“모자라.”

설마 웃은 거 아니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던 것 같은데.

찜찜한 표정을 지은 수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래요? 생긴 것 같지 않게 상당히 대식가네요.”

슬쩍 보기에도 그녀가 좋아하는 꼬들꼬들한 면발이었다.

더 보고 있다가는 침이라도 뚝 흐를 것 같아 수안은 애써 고개를 돌리고 일어났다.

“그럼, 마아니 드세요.”

‘마아니’와 ‘드세요’ 사이에 ‘처’나 ‘배터지게’를 삽입하지 않은 건, 순전히 19년 동안 갈고닦은 예의 덕분이었다.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수안은 걸음을 옮기기 전에 제법 살벌하게 그를 노려봤다.

오른발을 찔끔 옮겨놨다가 멈춰 서자, 후후 부는 소리가 오른쪽 귀를 스쳐 갔다.

입안에 고이는 침을 꼴깍 삼킨 뒤 왼발을 찔끔 옮겨놓자, 호로록 소리가 왼쪽 귀를 후려쳤다.

한계였다. 뱃속은 요동을 쳤고, 입속에 고이는 침은 곧 흐르기 직전이었다.

화도 났다.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도훈이 일부러 그녀를 골탕 먹이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욕실을 나오기 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모습은 자신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콩 한쪽이라도 있으면 챙겨 먹이고 싶을 만큼 불쌍해 보였다.

동정을 받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없던 동정심도 마구 샘솟게 만들 정도로 애처롭게 생겼는데, 어쩜 저렇게 냉정하게 잘라내느냔 말이다.

오기가 생겼다. 순순히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뭐가 됐든, 지금 당장 저 라면을 먹고 싶었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쌩하니 돌아봤다. 라면 한 젓가락을 막 건져 내던 그가 수안을 멀거니 쳐다봤다.

“여긴 내 집이고, 그럼 그 라면도 결국은 내 거란 소린데, 왜 아저씨 마음대로 끓여 먹어요?”

“이거 내가 사온 거야. 저 밑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씨, 진짜!

예상 못 한 대답에 수안의 얼굴은 죽상이 됐다.

“그, 그래도 그렇죠. 그 냄비도 내 거고 물도 내 건데, 어떻게 그걸 아저씨 혼자…….”

“먹고 싶어?”

“아니요! 그냥 아저씨가 자꾸 마음대로 막 하니까…….”

“한 번만 다시 묻는다? 먹고 싶어?”

수안은 입술을 짓씹었다.

맘속으론 ‘네’라고 벼락같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지만, 손톱만큼 남은 일말의 자존심이 대답을 허락지 않았다.

“셋 셀 동안 대답해. 하나…….”

“네, 그래요. 먹고 싶어 죽겠어요. 됐어요?”

냄비를 그녀 앞으로 밀어주는 도훈의 입꼬리가 선명하게 사선을 그렸다. 보조개도 여지없이 쏙 파였다.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라면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안은 빼앗길까 봐 겁나는 것처럼 냉큼 냄비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젓가락을 챙겨서 내밀자 빼앗듯 낚아챈 수안은 라면을 크게 한 젓가락 떠서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곤 곧장 다시 되돌려놓고 말았다.

“앗 뜨.”

“안 뺏어 먹을 테니까, 천천히 먹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컵에 물을 채워 수안의 앞에 놓아줬다.

입안이 화끈거려 벌컥 들이켜자, 의외로 미지근한 물이었다.

찬물이 좋은데.

“찬물은 안 좋아.”

수안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도훈에게서 곧장 한마디가 날아왔다.

“라면도 안 좋은데 준 거니까, 경원 아주머니한텐 비밀이다.”

라면을 한입 가득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부터 쭉 집안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경원 아줌마는 건강한 음식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행히 건강뿐 아니라 맛까지 훌륭하긴 했지만, 가끔은 미치도록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 그런 맛이랄까.

그녀가 꿈속을 헤매고 있는 동안 매번 다른 이름의 죽을 권하는 아줌마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그 영양가 풍부한 죽들은 뜨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라면을 냄비째로 먹은 걸 알면 경원 아줌마는 아마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의식하기도 전에 눈가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눈물이 넘쳐흘렀다.

꺼져 있던 스위치를 툭 켠 것처럼, 갑자기 오래지 않은 추억 하나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엄마와 함께 몰래 라면을 끓여 먹다가 들켜서 정말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를 들었던 일이 떠오르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잔뜩 화가 난 경원 아줌마 눈을 피해 키득거리며 다음엔 절대로 들키지 않게 조심하자 했었는데.

이제 다음은 없었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슬픈 이유란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영혼과 자존심을 헐값으로 넘기고 쟁취한 라면에선 눈물 맛이 짙게 났다.

보다 못한 도훈이 티슈를 뽑아 그녀 앞으로 쓱 밀어줬다.

“흐, 너무, 너무 매워서 그래요. 나 원래 순한 맛 먹는데. 매우니까 자꾸 눈물이, 후루룩, 흑.”

“알았으니까, 콧물이나 닦아.”

아, 진짜! 분위기 깨는 데 뭐 있다. 굳이 콧물 얘기까지 할 건 뭐람.

눈물을 닦아낸 수안은 코까지 야무지게 풀었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감상하는 도훈은 안중에도 없는 듯,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끗이 냄비를 비웠다.

“자, 이제 우리 대화란 걸 좀 해볼까? 다음 주에 수능 성적 발표되는 거로 아는데.”

“네, 근데 난 수능최저학력기준만 맞추면 돼요. 한국대 경영학과에 수시로 지원해서 면접까지 합격했거든요.”

심상하게 말한 수안이 도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음 주부터 학교도 나갈 거니까, 아저씨가 그런 것까지 신경 안 써도 돼요.”

실의에 빠져 대책 없이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기석의 엄격한 가르침 덕에 수안은 자기관리가 철저한 편이었다.

중3 때 단 하루를 빼고 결석은 물론이거니와 지각조차 한 적이 없었으며, 성적은 항상 최상위 수준을 유지해 왔다.

앞날에 대한 계획은 누구보다 철저히 세웠으며, 항시 약간 주눅 들어 있는 통에 잘 나서지 않을 뿐,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힐 줄 알았다.

게다가, 다소 즉흥적이고 우유부단한 데다 대책 없이 순수한 면이 있는 엄마 때문에 철도 일찍 들었다.

기석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민했던 건 늘 수안이었으며, 결국 그즈음 기석이 붙인 감시자를 따돌리고 외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엄마를 그 집에서 벗어나게 만든 것도 수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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