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항도 좀 씻고 하자
대통령경호처 경호관 출신인 최성진은 탁월한 정보력을 무기로 사설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2년 전, 도훈의 의뢰를 받고 태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핵심기술을 유출한 산업스파이를 색출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일이 계기가 되어 현재까지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차도훈 사장은 그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지만, 결코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었다.
성진이 파악한 도훈은 핵심을 짚어낼 줄 아는 빠른 판단력은 기본이거니와, 화를 내거나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는 카리스마를 장착하고 있었다.
막상 의뢰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약속한 보수를 지급할 만큼 매너가 좋았으며, 좋은 성과에 대해서는 금전적인 칭찬을 아끼지 않는, 요즘 보기 드문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도훈은 같은 남자가 봐도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멋진 남자였다.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아니, 최고의 파트너였다.
그래서 개인적인 일이라며 비밀 엄수부터 요구했던 이번 일도 두말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뭐, 무덤까지 가져가래도 오케이할 만큼 높은 수준의 보수를 약속받은 것 또한 빠른 결정에 도움을 주긴 했지만 말이다.
“백기석 쪽은 깨끗합니다. 그래서 주변을 좀 뒤져봤는데요, 2주 전 이자현 수사관의 계좌에서 거액이 이동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이자현?”
“짐작했겠지만, 백기석의 내연녑니다.”
“그럼 거액이 입금된 계좌는 위협운전을 하고 달아났다는 트럭운전사의 것이겠군요.”
“맞습니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게 문젭니다. 조사 들어가기 이틀 전에 이미 중국으로 출국했더군요.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까지는 추적이 됐는데 그 이후는 종적이 묘연합니다.”
도훈의 수려한 눈썹이 미묘한 각도로 휘었다.
포커페이스의 달인임을 고려할 때 저 정도의 각도면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현임이 틀림없었다.
성진은 괜스레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찾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푸둥 쪽에 벌써 우리 직원이 나가 있습니다. 현지 조력자와 연계해 이미 추적 중이라고 보고받았습니다.”
시원시원하게 말을 이어가던 성진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중국 쪽은 워낙 넓기도 하고, 아무래도 국내보다는 행동반경이 자유롭지 못해서 시일이 좀 오래…….”
“경비는 얼마가 들어도 좋습니다. 아시겠지만, 그 사람의 증언 없이는 백기석을 엮기가 힘듭니다. 반드시 찾아주세요.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소장님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경호 쪽 일도 알아봐 주신다고 들었는데.”
“누구를…….”
“백수안이요.”
“아! 그럼 여경호원으로 알아봐야겠군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제가 곧 뉴욕지사 일 정리하러 나가 봐야 해서 되도록…….”
도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킷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얼른 꺼내서 발신자를 확인한 도훈이 검지로 이마를 쓸었다.
“말 꺼내기가 무섭네요. 경호원 건은 되도록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가볍게 고개를 숙여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성진이 돌아섰다.
도훈은 끈질기게 진동하는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사장님, 언제 오실 거예요?]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비서인 지희가 인사도 생략하고 질문부터 던졌다.
[반드시 사장님 결재가 필요한 것들만 남겨두고,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했어요. 아시죠? 빨리 나오셔서 마무리 지어야 빨리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
“협박하지 마. 오늘 장례식 마무리됐어. 상황 봐서 내일 오후 비행기 타려던 참이야.”
[협박이 아니라 사실만 말씀드린 거예요.]
“알았어. 내일 오후에는 틀림없이 비행기 탈 거야.”
확신에 찬 말을 뱉어놓고 다음 날 도훈은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다음 날뿐 아니라, 그다음 날도 도훈은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자신의 철칙을 깨고 도훈은 수안의 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거의 실신한 것처럼 잠만 자다가, 밤만 되면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수안이 걱정돼 도저히 뉴욕으로 날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희 말마따나 하루라도 더 빨리 가서 뉴욕지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수안을 일상으로 돌려놔야 했다.
수안을 보기 위해 2층 계단을 오르다가 사부작거리는 발소리를 들은 도훈은 연이틀 주은의 방에서 흘러나왔던 작은 흐느낌 소리를 기억해 내고는 곧장 그리로 향했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
그저 만사가 귀찮았다. 엄마도 외할아버지도 없는 세상, 살기 싫다 이런 생각 같은 건 한 적도 없었다.
몸에 힘도 없었고, 뭔가를 하고 싶은 의지도 없었을 뿐이다.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잠이 가장 쉬웠다.
꿈속 어딘가를 헤매다가 깨면 현실도 꿈인 것처럼 몽롱했고, 꿈도 현실인 것처럼 또렷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는 그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게 선명해지는 낮 동안은 화장실 가는 것 외엔 거의 잠만 잤다.
누군가 계속 드나들며 흔들어 깨우기도 하고 음식을 권하기도 했지만, 얇은 막에 휩싸인 듯 잘 들리지도 않았고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야행성 동물이 되어버린 것처럼 밤이 깊어지면 정신이 말짱하게 깨어났다.
낮에도 그렇지만, 밤에는 더 할 게 없었다.
시간도 잊은 채 멍하니 천장만 응시하고 있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집 안 곳곳을 배회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엄마의 방으로 향했다.
딱히 뭘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엄마 침대에선 다시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리로 발걸음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오라는 잠은 안 오고 눈물만 났다.
방 안 전체에 감돌고 있는 엄마의 향기에 울컥했고, 몸을 감싸는 포근한 이불의 감촉에 뭉클했다.
에라, 모르겠다. 작정하고 울어버렸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울다보니까 더 슬퍼졌다.
장례식장에서 울지 못했던 게 억울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가 새벽녘에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걸 이틀째 반복하다 보니 사흘째 되는 날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엄마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막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몸을 한껏 웅크렸을 때였다.
난데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이불이 야멸치게 걷혀졌다.
“일어나.”
벽에 부딪쳐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열고, 바람이 일 만큼 거칠게 이불을 걷어낸 것치곤 상당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위기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을뿐더러,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자신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수안은 동그랗게 몸을 만 채 아직 빼앗기지 않은 베개 밑에 머리를 묻었다.
“백수안, 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가장 싫어. 그리고 넌 내 시간을 이틀이나 낭비하게 만들었고. 이런 행동은 너한테 하등 도움이 안 돼.”
‘무슨 상관이람. 바쁘면 신경 끊고 그냥 제 갈 길 가시라고요.’
이 아저씨는 사춘기 때 억눌려서 제대로 표출 못 한 반항기가 고도로 응축된 여고생의 못된 심보를 알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일어나.”
‘흥! 나쁜 말 하기 전에 얼른 나가시죠.’
“셋을 셀 거야. 그 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날 원망할 생각 하지 마. 하나.”
도훈이 카운트를 시작했건 말건, 수안은 머리를 파묻은 베개를 더욱더 꼭 끌어안으며 몸을 말았다.
“둘, 셋.”
마지막 카운트가 끝나자마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몸이 갑자기 붕 떠올랐다가 도훈의 어깨에 척 걸쳐졌다.
“어어.”
제대로 먹지도 못한 데다 거꾸로 매달려져서 그런지 현기증이 몰려오며 눈앞이 흐려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뭐 하는 짓이냐 따져 묻지도 못했는데, 들어 올려진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거의 내동댕이쳐지다시피 바닥에 내려졌다.
그리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확 쏟아져 내렸다.
“꺄아악, 어푸, 허업. 아아악, 이게, 풉, 뭐 하는…….”
“경고했잖아.”
시원스레 내리꽂히던 샤워기 소리가 멈췄다.
그녀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도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씽긋 웃어 보였다.
엊그제는 분명 콕 찍어놓은 듯 보조개가 들어가는 저 미소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할 수 없이 얄밉게 보였다.
“정신 차렸으면 이제 씻고 나와.”
미소 같은 건 지을 생각도 못 하도록 아무 데나 확 물어뜯어 버리고 싶은 마음에 수안은 제법 살벌하게 도훈을 노려봤다.
수안이 누군가를 노려보는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석 외엔 노려봐야 할 만큼 미워하는 사람도 없었던 데다, 증오해마지않는 기석은 용기가 부족해 차마 노려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화가 나서 도훈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뭔데 씻어라 마라 하는데요? 내가 뭘 어쨌다고,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제법 앙칼지게 따져 물었는데, 건너온 답은 아주 가관이었다.
“아직 모르나 본데, 너 냄새가 아주 구려.”
매섭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한쪽으로 쏠려 있던 눈동자가 중심을 잃고 헤맸다. 혈색 없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 때문에 잊고 있었던 수치심이 빠르게 수안을 덮쳐 왔다.
“그러니까 반항도 좀 씻고 하자, 꼬맹아.”
코를 잡혔다. 순식간에 놓여났고 아프지도 않았지만, 뭔가 찌릿 하는 느낌에 수안은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언제 봤다고 허락도 받지 않고 손도 잡고 코도 잡았던 도훈은 늘 있는 일인 양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서 욕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