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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랑을 믿지 않아요 (3/88)

3. 사랑을 믿지 않아요

“으으으, 아아, 악! 하아, 하아.”

잠에서 깨어난 수안은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불을 켜면 나비 그림자가 생기는 예쁜 보조등이 이곳이 자신의 방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처참했던 과거를 뚝 떼어다 놓은 꿈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엄마.”

이제는 맘껏 부를 수 없게 되어버린 이름을 중얼거리자, 아직도 꿈속에 갇힌 듯 가슴이 저릿했다.

“나쁜 꿈을 꾸었나 했더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군.”

“허업. 왜, 왜 여기 있어요?”

갑자기 들린 말소리에 놀라 쳐다보니, 도훈이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링거바늘 빼주러 들어왔다가 보다시피…….”

그가 손을 들어 보이자, 수안의 손이 같이 딸려 올라갔다.

“갑자기 손을 잡히는 바람에.”

정확히 말하면 손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다.

수안은 제법 길쭉한 도훈의 검지와 중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어, 죄송해요.”

당황한 수안이 냉큼 손을 쫙 펴며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뭐 별로. 그보다 뭘 좀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수안은 고개를 저었다. 허기를 느끼지도 못했지만, 꿈에서 마주한 엄마의 얼굴이 지워지지도 않은 마당에 뭔가를 목구멍으로 집어넣는 행위가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링거 맞았으니까 한숨 자고 나서 죽부터 먹어.”

처음부터 그녀의 의견을 물은 게 아닌 듯, 도훈은 친절하지 않은 말투로 명령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요?”

돌아서 나가려는 도훈을 불러놓고 수안이 더 당황스러워 시선을 피했다.

“어, 그게, 가는 건가 해서요.”

“당분간은 여기 있을 거야. 1층 왼쪽 끝방 쓸 거니까 불편해할 필욘 없고. 또 물어볼 거 있어?”

“그, 결혼은 어떻게 된 거예요?”

“나한테 첫눈에 반해서 했다며?”

내내 이불 위에 머물러 있던 수안의 시선이 도훈에게로 획 옮겨졌다.

“눈 한 번 마주치기 참 힘드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불에 덴 것처럼 냉큼 시선을 옮기는 수안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를 똑바로 마주 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일순 당황하고 말았다.

칼같이 각을 세운 슈트가 사라진 그에게선 그녀가 경계해 마지않는 어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편안한 스웨터와 면바지 차림에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린 그는, 친구인 나미가 잘생겼으니까 성질 더러운 것쯤은 용서가 된다며 열렬히 사모하는 영어쌤보다 열 배는 더 근사해 보였다.

기석에게 끌려가게 될까 봐 겁나서 다급하게 지어냈던 말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도훈과 한방에 있는 것이 갑자기 불편하게 느껴졌다.

빨리 혼자가 되고 싶었다. 미처 꺼내보지도 못한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또 피하는 건가? 하루치 아이콘택트 한도초과? 30초는 너무 짧은 것 같지 않아? 다음엔 1분 정도로…….”

“저기, 아까 제가 서재에서 한 말은…….”

“제법 쇼킹했던 사랑 고백에 대한 얘기라면, 잘 접수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아이콘택트 어쩌고 한 말도 잊고 수안은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잘 접수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그가 대체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실속 없는 아이콘택트만 잠시 이어지다가 또다시 얼굴을 붉힌 수안이 먼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만 쉬어라.”

“저는 사랑을 믿지 않아요.”

도훈이 막 돌아서서 한 발짝을 떼었을 때였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라는 건 알았지만, 도훈이 자신을 사랑에 대한 환상을 품은 감수성 풍부한 여고생쯤으로 여기는 게 싫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한댔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의 주먹이 엄마에게로 날아드는 걸 처음 목격했다.

엄격하고 조금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버지가 괴물로 보였던 순간이었다.

그 후로 부부만의 비밀스러운 행위였던 아버지의 폭력은 수안이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곤 했다.

도망가자고, 할아버지한테 연락해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여러 번 엄마를 졸랐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아버지를, 그 괴물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 말이 어린 수안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엄마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때 느꼈던 배신감과 환멸감은 오래도록 수안을 지배했다. 자연스레 엄마와의 대화도 줄어들게 됐다.

수안이 처음으로 기석에게 뺨을 맞기 전까지, 그들은 한 집안에서 가족이 아닌 채로 가족처럼 살아갔다.

“그 말,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막 때리는……. 하아. 그런 게 사랑이라면 난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

아직도 아버지를 사랑하느냐고, 그게 정말 사랑이냐고 여러 번 엄마에게 묻고 싶었지만, 수안은 끝내 묻지 못했다.

엄마가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 그런 게 사랑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나는, 처참하고 불온한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그에게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픈 얘기를 쏟아내느라 힘겨웠던 수안의 거친 숨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시한 위로의 말이나 어른들은 어른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소리를 듣게 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의외로운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더 하고 싶은 말 있어?”

“예? 어, 아니요.”

“그래.”

어이없게도 도훈은 대화의 끝을 알리는 한마디를 남긴 뒤 유유히 돌아섰다.

“아, 그리고.”

도훈이 잊고 있었지만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운을 뗐을 때, 수안은 드디어 예상했던 말들이 쏟아지려나 보다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훈에게 뭔가 기대했던 걸까? 뜻밖의 실망감이 안 그래도 기운 없는 몸을 축 늘어지게 만들었다.

“적당한 호칭 좀 생각해 봐. 사랑해서 결혼한 남자한테 저기, 저기요는 좀 아니지 않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에 수안은 정말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쳐다봤다.

허, 미소라니…….

도훈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설핏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입가에 살짝 파이는 보조개와 날카로운 눈매가 나른하게 휘면서 언뜻 잡히는 애교살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사랑해서 결혼한 남자라는 말은 틀렸다는 지적을 끝내 하지 못했다.

***

곧장 서재로 향한 도훈은 솜털 보송한 얼굴로 여러 번의 이별을 경험한 중년의 여자처럼 말하던 수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열아홉 살,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나이였다.

게다가 수안에겐 평생을 놀고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재산이 있었다.

자신의 관리하에 있는 한 재산은 계속 불어날 확률이 높았고, 그것은 수안의 앞날에 분명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터였다.

이 회장과 주은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뭐든 지원해 주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된 도훈에게 이 회장은 다정하진 않았지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주은은 늦둥이 동생을 얻은 것처럼 애정을 듬뿍 쏟아주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현재의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건만, 제대로 갚아보기도 전에 그들은 너무도 빨리 그의 곁을 떠나가 버렸다.

그 대신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이 회장과 주은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그들이 간절히 바랐던 백수안의 행복은 이제 그의 바람이 되어버렸다.

수안이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주은에게 들어서 대강 알고 있었다.

주은의 간절한 부탁에 많이 망설였던 이유도 거기에서 기인했다.

이미 힘든 일을 겪어낸 애한테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를 불행에 대비해 위장결혼의 오명을 씌운다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주은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꽤 단순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그녀의 생각엔 허점이 있다는 걸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의 부탁을 끝내 거절할 수 없었던 건, 더 확실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주은이 안심할 수 있는 안전장치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수안에겐 알리고 싶지 않다는 주은의 어이없는 말에도 동의를 했던 것이었다.

주은이 무슨 낌새를 느끼고 그와 수안이 고작 1년짜리 서류상의 부부가 되길 원한 건지는 몰라도,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그는 완벽을 기하는 타입이었다.

수안이 성인이 되기까지 앞으로 6개월 남짓.

간교한 백기석을 상대하려면 서류상 혼인신고만으론 어림도 없을 터였다.

계속 한집에 머물러야 할 테고, 공식석상에 참석해 부부인 양 연기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잔뜩 시들어가는 눈으로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던 애한테 근심 하나를 더 보태는 건 아닌가 싶어서 영 내키진 않았다.

하지만 수안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면 이 점에 대해 다시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깊어지는 상념에 널찍한 서재를 꽤 여러 번 오락가락했을 즈음 기다리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최성진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짧게 올려친 머리가 강단 있어 보이는 체격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남자가 서재로 들어섰다.

“여기까지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찾아낸 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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