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랑해요
차도훈, 그를 모르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 현관 앞에서 마주친 게 다였지만, 장례식 둘째 날 식장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참 불쌍하고 착한 아이라고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사람.
잠깐 마주쳤던 그때도 그랬지만, 장례식장에 나타난 그 순간에도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전혀 불쌍하거나 착해 보이지 않았던 사람.
하지만 냉랭한 얼굴로 흐트러짐 없이 절을 올리는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헝클어진 머리를 발견하고 나서, 내내 곤두섰던 수안의 마음은 조금 누그러졌다.
누구보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더없이 말끔했던 기석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던 그의 헝클어진 머리.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에 너무 당황해서 그 먼 뉴욕에서 여기까지 머리가 헝클어지는 줄도 모르고 부랴부랴 달려온 거라 믿고 싶었다.
두 사람의 죽음이 마치 꿈처럼 느껴져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거라 간절히 믿고 싶었다.
조문을 마친 그가 기석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듯 그녀의 곁을 지켜선 모습에 뭔가 울컥했었다.
내 편 하나 없는 숨 막히는 공간에서 유일한 내 편을 만난 것처럼 약간의 안도감이 밀려왔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일 따윈 없었다.
그녀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듯, 그 또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조금 전 손 한 번 잡아본 게 다인 이 사람을 무작정 따라나서는 게 잘하는 짓인지 망설여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외할아버지와 엄마가 믿음을 준 사람이었다.
유산을 포기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마당에 법정후견인인 남편의 등장은 그녀로선 새로운 돌파구나 다름없었다.
기석을 한 번 힐끔 쳐다본 수안은 성큼성큼 서재를 가로지르는 도훈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따라붙었다.
“가긴 어딜 가. 거기 서지 못해?!”
다급해진 기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흠칫 놀라 멈춰 선 수안의 손목이 기석에게 잡혀 거칠게 돌려세워졌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따귀를 때리고 엄마를 울긋불긋 피멍이 들도록 때렸던 손이었다.
닿자마자 솜털이 곤두서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공포와 모멸감에 수안은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백수안. 집에 가자.”
수안은 굳은 듯 잘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온 힘을 다해 가로저었다.
“백수안, 내 말 들어. 저놈은 널 이용하려는 거야.”
씹어뱉듯 말을 토해낸 기석이 수안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손목은 으스러질 듯 욱신거렸고, 제대로 먹지 못해 안 그래도 여윈 몸은 종잇장처럼 휘청댔다.
그러다 결국 발이 얽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던 순간, 그녀의 뒤에서 단단한 팔이 몸을 휘감아 안았다.
“그 손 놓는 게 좋을 겁니다.”
나직해서 더 위협적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수안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어찌나 꽉 감싸 안았는지 등 뒤로 그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공포심에 물들어 거칠게 들썩이던 가슴이 그의 심장박동에 서서히 박자를 맞춰갔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아직 손목은 갈퀴 같은 손아귀에 잡힌 상태였고, 기석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숨이 멎을 만큼 무섭지 않았다.
“내 딸 내가 데려가겠다는데 네깟 놈이 무슨 상관이, 윽, 으으읔.”
수안의 뒤에서 쭉 뻗어 나온 손이 그녀의 손목에 휘감긴 기석의 중지를 잡아 위로 꺾었다.
거세게 잡혀 있던 게 무색하리만큼 정말 허망하게 손목이 풀려났다.
매번 그녀의 의지를 갉아먹던 기석의 무지막지했던 힘이 도훈에게 맥없이 제압당하는 걸 보는 수안의 마음은 그야말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기석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오금이 저렸었다. 함께 식사라도 하는 날엔 여지없이 체했다.
대외적으로 능력 있는 검사였으며, 다정한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해 내던 기석으로 인해 그럴듯해 보이는 어른들에 대한 믿음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게 끊임없이 수안의 인생을 비틀어댔던 이가 저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니…….
도훈의 손에 이끌려 그의 뒤로 숨겨지며 바라본 기석은 그저 나약하고 추잡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기석은 추잡한 인간답게 수안을 보호하느라 무방비 상태인 도훈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아악!”
옆으로 획 돌아가는 도훈의 얼굴에 비명을 내지른 건 수안이었다.
실상 맞은 사람은 별것 아니라는 듯, 턱을 한 번 매만진 게 다였다.
“건방진 새끼, 겁도 없이 감히 나를 건드려? 너 같은 놈 탈탈 털어서 속속들이 까발리는 건 나한테 일도 아니라는 거 몰라?”
“뭘 하든 상관없지만, 수안이한테는 접근하지 마십시오.”
“뭐야, 인마? 수안인 내 딸이야.”
“이젠 제 아냅니다. 그리고 수안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디로도 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위장결혼이라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네놈이 어떤 꼼수를 부렸건 반드시 밝혀내 줄 테니까…….”
“사랑해요!”
악에 받친 기석의 말을 토막 낸 수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무, 뭐?”
미간을 한껏 좁힌 기석도, 수안을 등지고 있던 도훈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심지어 강 건너 불구경 중이었던 재식마저도 안경을 추켜올리며 수안을 주시했다.
마디가 하얗게 불거진 수안의 손이 도훈의 재킷 끝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제법 명료했다.
“처, 첫눈에 반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랑 엄마한테 결혼시켜 달라고 제가 졸랐어요. 너무, 사, 사랑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살짝 더듬긴 했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수안이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명료하지만 기석의 가슴쯤에 두고 있던 시선도 좀 더 위로 옮겼다.
“저는 아버지와 같이 가지 않아요. 내 남편과 함께 여기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만, 내 집에서 나가세요.”
“뭐, 뭐라고? 백수안 너…….”
수안에게로 성큼 다가서는 기석을 도훈이 온몸으로 막아섰다.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만 가시죠.”
이를 갈며 도훈을 노려보던 기석은 그의 기세에 눌려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옆에 놓인 의자에 화풀이를 한 뒤 서재를 나갔다.
수안은 기석이 간 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 그의 뒤에 숨어서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제법 당돌한 구석이 있다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말 몇 마디에 온 힘을 다 써버린 건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수안의 몸이 도훈의 발치로 떨어졌다.
“백수안, 정신 차려!”
***
수학 문제를 풀면서도 밖에서 나는 소리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수안의 귀에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샤프펜슬이 뚝 떨어져 책상 위를 굴렀다.
꾸부정하게 굽어 있던 허리가 꼿꼿하게 일어섰다.
함께 외출했던 아빠와 엄마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안의 표정이 제법 비장했다.
“중요한 자리라고 몇 번을 말했어. 차장검사님이 물어보는데 제대로 답도 않고, 한 번을 웃지도 않고, 너 미쳤니?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어?”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 기석의 목소리에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수안이 멈칫 굳어졌다.
“미안해요. 그런 거 아니에요. 배가 좀 아파서 웃을 수가, 아악!”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배가 아프건 머리가 아프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웃으라면 웃고, 말하라면 말해야 하는 거야. 아무리 멍청해도 최소한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악에 받친 기석의 말에 섞여 둔탁한 소리와 억눌린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문 앞에 붙어선 수안은 이를 악물고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었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짓씹은 입술이 붉게 터졌다.
“잘못했어요.”
“듣기 싫어! 듣기 싫다고. 매번 잘못했다고 하면서 고치질 않잖아. 올해 안에 부장검사 되려면 네가 더 잘해야 된다고 했잖아! 웃는 게 그렇게 어려워? 어?”
더 이상은 주은의 신음 소리를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수안은 짓눌릴 것 같은 공포를 무릅쓰고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주은과 발을 번쩍 치켜든 기석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었다. 번들거리는 기석의 눈에 흠칫 몸을 떨었다가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맞잡았다.
“지, 진짜예요. 엄마가 아침부터 계속 배가 아프다고 했어요.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는데, 모임에 나갈 준비 하느라 미룬 거예요. 엄마 정말 많이 아프댔어요.
거센 손길에 확 밀쳐졌다. 분노에 휩싸인 기석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린 수안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수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처음이었다. 엄마가 맞는 건 여러 번 목격했지만, 그게 자신에게로 향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 터라 수안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건방지게 어딜 끼어들어?”
이미 이성을 상실한 기석의 목소리는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잔인하게 들렸다.
쥐죽은 듯 조용한 공간에 기석의 거친 숨소리만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네가 감히…….”
분이 채 풀리지 않은 기석은 씹어뱉듯 말을 하며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기석을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멀건이 쳐다보고만 있는 수안을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킨 주은이 꼭 끌어안았다.
앓는 듯한 신음 소리가 수안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수안인… 우리 수안인 안 돼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결 사이로 힘겹게 한마디씩 토해내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슬쩍 돌아본 엄마의 눈이 붉었다.
아직 못다 한 기석의 분풀이가 계속 이어졌다.
‘그만! 이제 그만해. 제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둬, 이 나쁜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