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뜻밖의 남편
장례식이 끝나갈 즈음부터 시작된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제법 탐스러운 첫눈이었지만, 조용한 서재에 둘러앉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것엔 관심이 없었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서재 안에는 유언장을 낭독하는 태성그룹 법무팀 이재식 팀장의 목소리만 유유히 떠돌고 있었다.
유언장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도훈은 검은 상복에 감싸여 더 왜소해 보이는 수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3년 전 스치듯 인사를 나누었을 때도 철없는 어린애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지금 역시도 나이에 걸맞지 않는 어른의 눈을 하고 있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았던 아이는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처럼 파리했다.
재식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기나 한 건지, 탁자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은 흐리멍덩해 보이기까지 했다.
도훈은 입새로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꾹 눌러 참으며, 맞은편에 앉아 재식의 말에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백기석을 바라봤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수안과는 달리, 기석은 침통한 표정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내와 장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연출해 냈다.
3년간의 별거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백기석.
그리고 공교롭게도 수안이 성인이 되기까지 불과 몇 개월을 남겨둔 시점에서 일어난 불의의 교통사고.
결코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도훈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주은의, 내 와이프의 유언장이 있다는 겁니까?”
당황한 듯한 기석의 물음에 단조롭게 이어지던 재식의 말이 끊겼다.
3년 전 주은에게서 직접 유언장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도훈도 적잖이 당황했었다.
마치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주은은 불안해했고 지쳐 보였다. 그래서 차마 그녀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간절한 부탁이 지금 그가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였다.
“네.”
재식의 단정한 한마디에 살짝 미간을 일그러뜨렸던 기석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뒤늦게 당황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분히 이주은다운 짓이었다.
소심한 반항과 속임수는 이주은의 특기였다.
매번 간파당하고 제대로 한 방 날리지도 못하고 꺾여 버리면서도 한 번을 얌전히 순종하는 법이 없었다.
유언장도 아마 소심한 반항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도망칠 정도로 싫은 남편한테는 단 한 푼도 나눠주고 싶지 않다는 심보였겠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이주은의 행태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태성의 공주님으로 자라 세상물정 모르는 단순한 여자는 모든 걸 수안에게 상속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 그가 살고 있는 도곡동의 아파트를 제외한 나머지 재산 모두를 수안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이 재식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가소롭게도 끝까지 순진한 공주님 흉내를 내며, 버리고 떠난 남편에게도 80평짜리 아파트를 남겼다.
3년을 버틴 결과가 겨우 80평짜리 아파트 한 채라니, 웃기는 소리였다.
그 아파트뿐 아니라, 이 회장의 모든 것이었던 태성그룹과 이주은의 모든 것이었던 백수안까지,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참이었다.
자신을 닮아 영악한 수안이 걸림돌이 되긴 하겠지만, 그래 봐야 어차피 미성년자였다.
성가신 늙은이가 죽고 없는 마당에 이젠 모든 게 자신의 편이었다.
재식의 유언장 공개가 대충 마무리되어 갈 즈음, 회심의 미소를 속으로 삼킨 기석이 내내 움츠리고 앉아 있는 딸을 쳐다보며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흠흠, 우리 수안이의 친권자로서 앞으로 모든 재산 관리는…….”
거칠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 건 기석이 미처 말을 다 끝맺지 못한 시점이었다.
작지만 제법 선명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리였다.
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인 수안에게로 향한 건 당연지사였다.
내내 흐리멍덩했던 그녀의 눈이 미약하지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한 수안은 간절한 눈빛으로 재식을 바라봤다.
“저기, 이 팀장님, 저는 상속, 흣.”
그때 단단하고 커다란 도훈의 손이 쑥 뻗어와 무릎 위에 놓인 수안의 손을 덮었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놀란 숨을 삼킨 수안은 상속을 받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려던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차려야 할 이때,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신경회로가 엉망으로 꼬여 버린 기분이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제 앞날 먼저 챙기느라고, 불효막심하게도 외할아버지와 엄마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아버지라는 탈을 쓴 괴물이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슬픔을 연기해 내는 걸 보면서, 저 손아귀에 다시 들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만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심을 거듭하고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결국 유산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유언장이 발표되는 내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용기를 끌어 모았던가.
그런데 뭐야, 왜 남의 손은 맘대로 잡아서 굳게 먹은 마음을 마구 흩어놓느냔 말이다.
게다가 이 남자, 자신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녀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제 손이라도 되는 듯 아무렇지 않게 푹 감싸고는 이 팀장 아저씨에게 눈빛만으로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수안은 얼른 정신을 다잡았다. 이 순간 중요한 건, 차도훈이 무슨 의도로 자신의 손을 잡았는지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와 엄마가 남긴 막대한 재산과 함께 아버지에게 꿀꺽 삼켜지기 전에 제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했다.
“팀장님, 저는, 읏.”
애써 틔운 말문이 또다시 막혀 버렸다.
빼내기 힘들 정도로만 덮고 있던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욱신거릴 정도로 한차례 꽉 움켜쥐었다.
당황한 건 둘째 치고 손이 상당히 아팠다. 도훈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을 담아 미간을 한껏 찡그리자, 그가 고개를 한 번 쓱 그어 보였다.
아무래도 말하지 말라는 제스쳐인 듯했지만, 도훈의 깊은 눈매와 냉랭한 표정 때문에 수안에게는 ‘입 다물지 않으면 죽을 줄 알아.’쯤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갈퀴로 긁듯 간신히 끌어 모았던 용기가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수안은 뭘 어찌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되어 안경을 추켜올리는 재식을 바라봤다.
“백 검사님, 그리고 수안 양, 두 분 의견은 유언장 공개가 끝난 뒤에 듣도록 하죠. 흠흠, 이주은 님 유언에 마지막 단서 조항이 있습니다.”
재식이 안경 너머로 기석을 한 번 힐끔 쳐다본 뒤 유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만일 유언이 공개되는 시점에 백수안이 미성년자일 경우, 법정후견인을 남편인 차도훈으로 지정하고 그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한다. 이상입니다.”
사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내내 느긋했던 기석은 경악한 얼굴로 재식을 바라보고 있었고, 수안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곱씹느라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도훈만이 처음과 다름없는 냉담한 태도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개수작이야? 남편이라니? 어떻게 아빠인 내가 모르는 결혼이 있을 수 있어!”
근엄한 척, 고상한 척 꾸미고 있던 기석의 본성이 바닥을 드러낸 건 순식간이었다.
흥분한 기석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소스라치게 놀란 수안은 도훈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그의 손을 답삭 움켜쥐었다.
자신조차도 몰랐던 결혼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미쳐서 날뛰기 일보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기석에게 정신이 팔려, 도훈이 샌드위치가 된 자신의 손을 빼내 수안을 토닥이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미성년자의 혼인은 부모 중 한쪽의 동의만으로도 성립이 가능하며, 백수안 양이 만 18세가 된 올해 5월에 이주은 님의 동의로…….”
“지금 내가 그걸 몰라서 이래? 이건 음모야! 비겁한 계략이라고. 차도훈 너 이 새끼, 주은이를 대체 어떻게 꼬드긴 거야? 감히, 내 딸을 이용해서 네놈 배를 채우려고……!”
눈 깜짝할 새에 탁자에 다리 하나를 올린 기석이 도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거 놓으시죠.”
조용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깔렸다.
“무, 뭐야, 인마? 안 놓으면 어쩔 건데? 이 새끼 너 몇 살이야? 몇 살이나 처먹었는데, 윗사람도 못 알아보고, 윽.”
도훈이 기석의 손목을 꽉 움켜쥐자,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의는 서로 지키는 겁니다. 수안이 아버님으로서 대접해 드리는 건 여기까집니다.”
기석의 손목을 내팽개치듯 밀쳐 낸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팀장님, 그대로 절차 밟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자신이 누군가에게 밀쳐졌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 채 망부석이 되어버린 기석은 안중에도 없는 듯, 도훈은 지시를 내리는 일이 몸에 밴 사람 특유의 단호함과 여유로움을 선보였다.
당연하다는 듯, 재식의 답변도 깍듯했다.
지금은 뉴욕지사 사장에 불과했지만, 머지않아 태성을 장악하게 될 게 자명한 도훈의 뜻을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이 회장이 살아 있었을 때 이미 정식적인 승계 절차를 밟아가던 중이었다.
이 회장의 부재로 순조롭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될 수도 있지만, 뉴욕지사에서 도훈이 이루어낸 실적을 생각하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건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다 이 회장의 유일한 혈육인 백수안의 마음까지 얻는다면…….
“백수안.”
그런데 저렇게 딱딱하게 굴어서야 원.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때문에 내려다보는 자세가 상당히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도훈을 보며 재식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저래서야 감수성 예민한 열아홉 살 소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힘들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수안은 도훈의 부름에 잔뜩 겁먹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올려다봤다.
“예?”
“뭐 하고 있어? 그만 일어나. 나가자.”
“어, 아, 예.”
수안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뜻밖에도 생소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남편이 간절히 바라는 걸 이뤄주겠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