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82)화 (82/83)

외전 8화.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한 달째. 태경과 함께하는 특별한 시간은 계속됐다. 그가 좋아하는 디저트처럼 달짝지근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변함없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한 가지 튀는 일이 생겨났다. 예정일이 지나도 생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주기적으로 하다가 가끔 며칠 늦는 일은 있었어도 이번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뉴욕 숙소에서 질내사정을 했다.

설마. 그날 딱 하루였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그 두근거림이 떨림인지 불안인지는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었지만 확인해야만 했다.

유정은 결국 예정일이 며칠 지나고 나서 편의점 가는 척 약국에도 들러 임신테스트기를 사 왔다. 그녀는 씻고 나온 태경에게 사탕과 초콜릿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젖은 머리를 타월로 털던 그가 봉투를 열어 보더니 시선을 들었다.

“이거 사러 나간 거예요?”

필요한 게 뭔지 말하라 했더니 기어코 혼자 다녀오겠다던 그녀였다.

유정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평소 궁금하던 것을 일부러 이 타이밍에 물어봤다.

“태경 씨는 사탕이 좋아요, 초콜릿이 좋아요?”

“사탕.”

“왜요?”

“씹어 먹을 수도 있고, 녹여 먹을 수도 있으니까.”

대답해 준 태경이 유정에게 입을 맞췄다.

“오래오래.”

딸려오는 말과 함께 혀를 집어넣자, 유정이 물기 젖은 태경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하반신에 커다란 타월을 두르고 있던 태경의 중심이 꿈틀대고 있었다. 바짝 붙은 몸 사이로 그것을 느낀 유정은 천천히 입을 뗐다.

“씻고 올게요.”

“이따가.”

태경이 제 허리에 팔을 두르자, 유정은 입을 빼쭉 내놓으며 울상을 지었다.

“씻고 밥 먹어요. 배고프단 말이에요. 어젯밤에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양념게장을 먹고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야무지게 쪽쪽 빨아먹는 유정의 모습을 빤히 보던 태경이 갑자기 식탁을 치워 버리고 그 위에 그녀를 올린 후로, 오늘 아침까지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결국 태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욕실로 보냈다.

욕실로 들어와서 옷을 벗은 유정은 물을 틀어 놓고, 옷 안에 숨겼던 임신테스트기를 꺼냈다. 혹시 몰라 두 개를 사 온 그녀는 설명서대로 한 뒤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샤워를 했다. 몸에 거품을 묻히며 괜히 아랫배를 쓸어 만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그간을 떠올려 보면 태경은 피임을 필수로 여겼다. 뉴욕 숙소에서 있던 일도 자신이 졸라서 충동적으로 질내사정 한 것이지, 그 뒤 오늘까지도 콘돔을 빼놓지 않았다.

심장이 점차 빨리 뛰었다. 서둘러 결과를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유정은 평소보다 샤워를 빨리 끝마치고 세면대로 향했다. 길쭉한 임신테스트기 중심에 붉은 선 한 줄이 선명했다. 잘못 본 건 아닌지 조명에 비추어 보아도 두 개 다 한 줄이었다.

“후…….”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 유정은 한숨을 뱉은 입을 가렸다.

나 설마 기대한 거야?

불안인지 떨림인지 모를 두근거림은 이로써 정해졌다. 유정은 생소한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그도 갑작스럽긴 하겠지만, 기뻐할 터였다. 왜냐면 법적으로 부부 사이고, 아직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은 없어도 자녀 계획에 대해서도 언젠간 대화를 나눌 테니까.

그를 닮고 저를 닮은 아이인데, 싫어할 이유가 있을까. 계획한 것도 아니고 한 번에 되기도 힘들지만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윽고 보송한 가운을 몸에 걸친 유정은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욕실을 나섰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태경이 손에 들린 것을 쳐다보자, 가까이 다가가서 건넸다.

“생리가 늦어서 해 봤어요.”

유정을 바라보던 태경이 시선을 떨궈 제 손에 들린 임신테스트기를 확인했다.

“임신이 아닌 건가?”

한참을 보다가 나온 질문에 유정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서 두 개 해 봤는데 결과는 똑같더라고요. 놀랐죠?”

태경은 침대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유정은 임신테스트기를 가만히 내려놓는 그의 기다란 손가락을 쳐다봤다.

“네.”

대답과 다르게 그의 표정은 차분했다.

“다행이네요.”

미소 띤 유정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 갔다.

“다행……이라고요?”

그녀는 목덜미에 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우리한테 아이가 생길 수도 있던 거였는데요?”

“그러니까요.”

유정은 입술을 다물었다. 남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달콤한 상황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태도도 그녀의 예상엔 없었다.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 때문에 할 말을 잃은 유정은 꺼낼 목소리를 겨우 찾았다.

“나는 내심 태경 씨 닮은 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임신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태경 씨는 싫어요?”

“닮았다고 해도 그건 유정 씨가 아니에요.”

그건 유정 씨가 아니에요. 유정은 태경의 침착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막상 그의 생각을 알게 되니, 바라면 안 되는 것을 바라는 기분이 돼 버렸다. 그녀 외의 것에만 나오던 냉정함이 여기서 나올 줄이야.

그럼, 임신이었으면…… 그랬으면……?

유정은 차마 내뱉지 못할 말들을 삼키며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쿵쿵, 떨림으로 뛰던 심장이 불안한 듯 요동쳤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상처라는 걸 받게 됐다.

* * *

“뭐? 결혼을 했다고?”

카페에서 오랜만에 만난 지아는 유정의 결혼 소식에 놀라 침을 튀기었다. 계속 홍콩에서 머물다가 마침내 가족과 화해해 한국에 정착하기로 한 그녀가 오자마자 만난 사람이 유정이었다. 그런데 유정이 그사이 유부녀가 됐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응. 결혼식은 하려다가 일이 생겨서 못 했어. 언니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되더라.”

“아, 잠깐 수신 거부로 돌려놨었다, 참.”

성 정체성 문제로 마지막에 가족들과 대판 싸웠던 지아는 까먹었던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생활은 어때? 뭐가 좀 다르나? 와, 차재이가 알면 진짜 깜짝 놀라겠다. 걔는 아직도 네 남친…… 아니, 네 남편 나쁜 놈으로 알걸?”

에이드를 마시던 유정이 반가운 이름을 듣고 빨대를 뱉어 냈다.

“재이 씨는 잘 지내?”

“사업 물려받는 준비 하느라 아주 바쁘지. 여기저기서 여자 소개도 많이 받을걸? 걔 또래에서 발 넓잖아. 잘 지내니까, 걱정 마.”

유정이 다행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지아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본격적으로 살림 차리니까 그 남잔 아주 좋아 죽겠네. 이러다 아기 생겼다고 불쑥 그러는 거 아니야, 너?”

아기 얘기에 유정이 멈칫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지아가 눈을 끔뻑끔뻑 움직였다.

“왜? 왜 그래.”

“자식 생각 없대. 둘이 살재.”

유정은 컵 아래 가라앉은 과일청을 빨대로 휘저었다. 탁해지는 에이드와 유정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지아가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괬다.

“요즘 그런 경우 많다지만, 너한테 죽고 못 살길래 자식 욕심 있는 건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넌 어떻게 생각해?”

“…난…….”

입을 뗀 유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잠자코 기다리던 지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다시피 난 임신이 안 되는 몸이라. 딱히 조언해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넌 바라는 것 같은데. 아니야?”

“그렇게 바란 적은 없다고 여겼는데 태경 씨가 싫어하니까, 뭐랄까…….”

“싫어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치켜세운 지아가 안타까운 듯이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다. 서운하겠지. 말은 해 봤어?”

“딱히 길게는…….”

“그럼 대화를 더 해 봐. 네 마음이 어떤지 보여 줘.”

지아와 눈을 마주치던 유정이 시선을 내렸다. 투명한 컵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자몽 알갱이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 * *

지아와 저녁까지 먹은 유정은 데리러 온 태경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와 다르게 차분한 그녀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따라 들어간 태경이 한쪽 어깨를 벽에 기댄 채 팔을 겹쳤다.

“재밌었어요?”

“네.”

아이보리색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은 유정은 라탄 바구니에 외출복을 넣으며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서 태경과 시선이 부딪힌 유정이 뒤를 돌았다.

“왜요?”

“오랜만에 만나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별로 안 그래 보여서.”

멈칫한 유정은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컨디션 때문에 그렇게 보였나 봐요. 좀 졸려서.”

그녀는 이내 바닥에 내려놓았던 종이봉투 안에서 포장된 마카롱을 꺼냈다.

“마카롱 먹어 봐요. 지아 언니가 사 줬는데 괜찮더라고요.”

먼저 한입 베어 물은 유정은 배시시 웃으며 필링이 묻은 입술을 혀로 훑고는 말했다.

“너무 달다.”

팔짱을 푼 태경이 그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한 손으로 유정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입을 맞췄다.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어 아직 녹지 않은 크림을 샅샅이 핥아 먹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네. 다네.”

침음하는 목소리에 유정이 턱 끝을 올려 그를 올려다봤다. 타액이 묻은 조그만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사랑해요.”

속삭이듯 나온 말을 씹어 삼키듯 가만히 있던 태경이 입을 달싹였다.

“나도.”

유정은 오로지 저만 담고 있는 남자의 새카만 눈동자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만약에 임신이었으면. 그랬으면, 어떻게 했어요?”

이번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그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좀 전과 똑같은 건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진득한 시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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