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80)화 (80/83)

외전 6화.

에이든에게 한국은 여전히 낯선 나라였다. 주변인이 온통 한국인인데도 그랬다. 직업상 어디든 떠도는 게 일쑤지만 아무래도 영어권을 쓰는 곳이 더 편하달까. 고향이 한국인 신혼부부도 그럴 터였다. 그래서 굳이 이곳에 터를 잡았겠지.

보나 마나 저가 첫 손님인 것을 직감한 에이든은 태경과 유정의 신혼집에 들어서며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판단해도 눈으로 보는 순간 의문이었다.

태경은 바지만 대충 걸친 모습으로 현관문을 열어 줬고, 뒤늦게 방에서 나온 유정은 옷으로 몸을 꽁꽁 감추고는 있지만, 부끄러운지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남들이 잘 시간에 멀쩡히 깨어 있는 것만 봐도 도착 전 무슨 일을 벌이고 있던 건지 짐작이 갔다. 보나 마나 낮이고 밤이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겠지. 사실은 지낼 곳이 어디든 상관없지 않을까. 홍콩에서처럼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 사는 모양이니.

느끼려 하지 않아도 여전한 둘 사이를 느끼게 된 에이든은 유정이 딱하게 느껴졌다. 전에는 그래도 아슬아슬 줄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지금은 주태경이 정말 모셔다 두고 꿀꺽 삼키는 것 같았다. 그것마저도 바라고 좋아한다면 할 말 없고.

에이든은 귀찮으니 얼른 꺼지라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유정이 가져온 에스프레소 잔을 들었다. 대각선의 일인용 소파에 앉은 유정이 반갑게 웃었다.

“오실 줄 몰라서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미안해서 어쩌죠.”

“저야말로 늦게 방문해서 미안합니다.”

에이든의 말에 태경이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깍지 끼며 답했다.

“알면 오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연락했을 때 받았으면 그랬겠죠.”

에이든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태경은 유독 한국에 있을 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뉴욕에 가야 합니다. 긴 일정은 아니고, 짧게…….”

에이든은 유정을 힐긋 보며 말을 끝까지 이을지 고민했다. 그러고는 이내 말로만 들으면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기에 상관없다고 판단하며 입을 뗐다.

“간단한 조사 차원에서. 세르게이가 자꾸…… 언급해서요.”

아킬레스건을 난도질해 더는 걸을 수 없는 세르게이는 자신이 그렇게 된 이유가 주태경이라며 우겼다. 정신병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며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오히려 진짜 정신병자가 되었구나, 하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형식상 조사는 이루어져야 했다. 그간 구축해 놓은 악의 이미지 때문에 스스로 발목을 아작 내 놓고 주태경에게 돌리려는 짓 아니냐는 말도 속속히 나오고 있었기에, 결과는 뻔했다.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친 태경은 지루한 얼굴이었다. 당연히 놀란 기색은 없었다. 왜 조사를 받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알 테니까.

에이든은 잠깐 목덜미가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커피 잔을 들었다. 세르게이의 이름이 나오면서부터 안색이 어두워진 유정이 주춤 입을 열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에요?”

당연히 결혼식 때 사건의 연장선인 줄 아는 유정이었다. 잠자코 있던 태경이 유정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며 안정시켰다.

“보상금 더 줄 테니 합의하자고 귀찮게 구는 거죠. 별일 아니에요. 이번만 가면 끝나요. 그렇지?”

태경의 눈길이 에이든에게 닿았다. 유정을 볼 때와 확연히 다른 온도 차에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인차 하는 마지막 조사니까요.”

시간을 확인한 태경은 언제, 몇 시에 떠나면 되는지 묻지도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바로 출발하겠지. 에이든도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자 생각에 잠겨 있던 유정이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시선을 들었다.

“에이든.”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흘려들을 작은 목소리였다.

“부탁할 게 있어요.”

부탁? 좀처럼 유정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말에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 * *

봄철 한국과 날씨 차는 없지만 비가 자주 오는 뉴욕은 태경이 비행기에서 내리면서부터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다. 그가 공항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새카만 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말단이 태경에게 우산을 씌워 줬다. 지켜보던 에이든은 곧바로 숙소로 향했다.

곧이어 뒷좌석에 올라탄 태경은 미간을 손으로 꾹 누르며 차 시트에 몸을 푹 기댔다. 꿀단지를 숨겨 놓은 집에 돌아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이렇게 됐다.

좆같은 세르게이.

물론, 세르게이의 아킬레스건을 작살내 놓긴 했지만, 정신병으로 갇힌 개자식의 개소리에 이렇게 빨리 움직이게 될 줄은 몰랐다. 대외적으로 하는 거긴 하는 거지만 이거야말로 융통성 없는 짓거리였다. 러시아에 뒤탈 없으려는 건 알겠는데 세르게이는 이미 러시아에서 잘린 꼬리였다.

사무국에는 대략 사십 분 정도 후에 도착했다. 태경이 차에서 내리자, 앞 좌석에 같이 온 말단이 우산을 씌워 줬다. 곧은 걸음으로 걸어가던 태경은 어느 순간 발을 멈춰 섰다. 비에 흠뻑 젖은 준우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태경은 손을 옆으로 뻗어, 우산을 직접 쥐며 말단에게 고갯짓했다. 말단 병사는 태경과 준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차로 향했다. 태경과 단둘만 남게 된 준우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짧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비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태경은 내리뜬 가느다란 시선으로 대꾸 없이 준우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주먹 쥔 준우의 손으로 더 내려갔다.

“저도 병신으로 만들어 주세요. 그래도 됩니다.”

“…….”

“팔이든, 다리든 뭐라도 좋으니까.”

준우가 죄책감에 괴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태경은 막힌 숨이 풀린 듯 하, 숨을 내뱉으며 어이없다는 듯 나직이 읊조렸다.

“이미 병신같은데.”

준우는 결국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질끈 깨물다가 소리쳤다.

“죽을 때까지 때리든, 어떻게든 하라고요!”

“어머니 가지고 딜 했는데 그 손으로 덤빌 생각을 해야지.”

여전히 주먹 쥐고 있는 준우의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때리면 맞아 줄 거고요?”

“아니.”

장우산을 고쳐 잡으며 나온 대답에 준우는 힘없이 피식거리며 젖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태경은 표정 변화조차 없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네 어머니가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 안 썼어.”

“그때, 구출했다고 거짓말한 거 압니다.”

주태경은 지금처럼 표정 변화도 없이 거짓말했다. 마치 모든 상황을 다 알고 대처해 놓은 것처럼. 그 태연하고 잔인한 거짓말을, 준우는 믿었다. 블랙스완은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팀이니까. 하지만 거짓말인 걸 알고 나서도 죄책감을 버리진 못했다. 군인으로서, 유정과 쌓은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준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유정 씨한테도, 선배님한테도. 그러니 죄송한 제 마음을 풀게 도와주세요.”

태경은 손목시계를 일별하며 눈가를 찌푸렸다. 준우의 모친은 광현과 에이든의 촉으로 운 좋게 살아남았다. 유정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이 얼떨결에 들어맞았을 뿐이다. 그러니 과한 죄책감은 쓸모없는 감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한 게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 일로 강준우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나 블랙스완을 그만두면 서유정은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눈 놈이어도 마음 아파할 여자니까.

“그건 네 알아서 해.”

더 시간 끌면 봐주지 않을 듯 심상한 말투였으나, 준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는 겁니다.”

“바쁘니까 비켜.”

뚜벅뚜벅 걸어간 태경이 준우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 밀쳐 버렸다. 커다란 몸이 힘없이 뒤로 밀려나며 쓰러졌다. 태경은 천천히 일어서는 준우를 지겹다는 듯 눈짓하며 비켜 지나갔다.

* * *

검은 세단이 사이프레스 힐스를 가로질렀다. 그리 값비싼 가격대의 차량도 아닌 데다 특이점도 없는 세단에 불과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윽고 세단이 허름한 주택 앞에 정차했다. 광택이 도는 블랙 셔츠를 빈틈없이 소화한 태경이 긴 다리를 뻗으며 뒷좌석에서 내려섰다. 무성의한 발걸음은 단숨에 문 앞까지 당도했다.

문을 열기 직전, 그는 스윽, 동공을 굴려 사위를 훑어보았다. 건너편 주택 창문을 통해 훔쳐보던 노인이 황급하게 커튼을 내렸다. 시선이 설핏 스쳐 간 것에 불과했으나 뼈에 박히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진 탓이다.

태경은 이내 문을 열었다. 다 쓰러져 간다고 봐도 될 법한 외관에 비하면 내부는 괜찮은 편이었다. 사실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몇 달을 먹고 자도 끄떡없지만. 어찌 됐건, 그는 일말의 타격도 없는 표정으로 순식간에 거실에 들어섰다.

“빨리 오셨네요.”

가죽 소파에 불편한 자세로 앉아 집중하고 있던 에이든이 목을 세우며 인사 비슷한 말을 했다. 피로감에 찌든 에이든의 눈이 사뭇 의무적으로 주태경을 훑었다. 몇 달씩 밖에서 뒹굴어도 피부가 타는 법이 없다는 게 정말이지 미스터리였다.

얼굴이 튀어 임무 중에는 반 복면을 착용해서 그런가. 종종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상태로 돌아다니던 이광현과 강준우가 그것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에이든은 남자를 무언가 다른 종족, 혹은 외계인을 보듯이 보며 노트북을 덮었다.

“오늘 여기 아무도 안 올 예정입니다.”

태경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보다가,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강준우나 내 눈에 안 띄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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