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유정이 리모컨의 버튼을 눌러 버티컬을 걷어 냈다. 넓은 통창으로 기다렸다는 듯 햇빛이 들이쳤다. 일순 콧잔등을 찡그리며 그녀가 부채처럼 손을 펼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입꼬리는 부드럽게 휘었다.
태경이 러시아에서 귀국한 지 이틀째였다. 그간 부지런히 관리해 왔던 화분이며 밝은 데서 그 품격이 더해지는 신진 화가의 미술품은 딱 그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내친김에 창문도 반쯤 열어젖힌 후에야 그녀는 속이 후련해졌다.
오픈형 주방으로 걸어가며 유정은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었다. 익숙하게 아일랜드 하부장을 열어 앞치마도 꺼내 걸쳤다.
식자재로 가득 찬 냉장실이며 냉동실에서 그녀의 선택을 받은 건 병어였다. 태경은 한 번 작전에 들어가면 주로 육류를 섭취하기 때문에 나름의 배려였다. 그가 없을 때는 몇 가지 나물 반찬이 전부였던 밑반찬도 다양하게 준비해 둔 덕에 메인인 병어찜만 성공하면 되는 일이었다. 잔뜩 고무된 유정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그는 좀처럼 숙면하는 일이 드물었다. 잠귀도 어찌나 밝은지 조금만 뒤척여도 바로 눈뜨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춰 주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야생 동물처럼 경계심을 풀지 않던 그에게 이제 좀 틈이 생긴 것만 같아 유정은 아침부터 심장에 열이 올라 녹는 줄 알았다. 완성된 병어찜을 그릇에 옮기던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 부근을 내리눌렀다.
압도적인 체향과 함께 목덜미를 짓누르는 무게가 느껴진 건 그때였다. 유정은 숨을 삼켰다.
“아침부터 왜 귀엽게 굴지.”
그가 유정의 목선을 입술로 지분거리며 한숨처럼 말했다. 어디로 내빼지 못하게 그녀의 허리를 틀어쥔 손등에는 핏줄이 곤두섰다. 안 그래도 잘록하고 납작한 허리는 이틀 만에 비쩍 골았다. 밤낮으로 붙어먹는 틈틈이 음식은 빠트리지 않고 먹였는데 이상하기도 하지. 그는 슬금슬금 발을 빼는 유정의 몸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원래도 밥을 해 주려고 했는데 이틀간 태경 씨가…….”
억울함에 휙 돌아보며 읊조리던 유정의 입술이 이내 닫혔다. 그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검은자위를 툭, 떨어뜨린 탓이다. 무엇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의 촘촘한 근육이 전보다 더 팽창한 듯 보였다. 침대에서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는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유정이 황급하게 눈을 돌렸다.
그게 하필이면 아래인 바람에 더 큰 난관에 봉착했다. 버클도 안 채운 바지를 간신히 걸치고 있었다. 드로우즈 끄트머리도 언뜻 보였다. 그 주변으로 근육이 쩍쩍 갈라지고 뼈는 도드라졌다. 그가 제 안으로 밀고 들어올 적마다 허리를 튕기던 장면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이틀간 내가 뭘?”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으며 그가 물었다. 유정은 시선을 회피하며 냄비를 아일랜드 식탁으로 옮겼다. 등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으나, 무시했다. 태경은 다행히 더는 짓궂게 굴지 않았다. 대신 얌전히 식탁에 앉아 주었다.
문제는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뼈를 모조리 해체한 병어의 도톰한 살코기는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되어 유정의 밥그릇에 수북이 쌓였다. 최상급 품질의 더덕무침도 예외는 아니었다. 밥 한술을 뜰 때마다 입술 앞에 밀어 주는 바람에 유정은 울상을 지었다. 그토록 공들인 밥상이 모두 제 뱃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그녀는 적잖은 절망감에 빠졌다.
“요리한 보람도 없이 이게 뭐예요.”
식기를 싱크대에 담그며 유정이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안 하면 되겠네.”
옆에 서 있던 그가 간단하게 일축했다. 유정은 기가 막힌 눈으로 쳐다봤다. 태경은 그녀가 집안일이라면 뭐든 하는 걸 싫어했다. 그가 집을 비울 때면 종일 혼자 있어 할 일이 없는데도 가사 도우미를 붙여 주기도 했었다. 유정이 기겁하며 취소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계속 불필요한 도움을 받았을 거고.
“저 소질 있단 말이에요. 병어 손질도 다 제가 했어요.”
어릴 때부터 유정은 예체능에 재능이 있었다. 그가 집을 비우면 미술도 배우고 프랑스 자수도 배웠다.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게 생길 때까지 그는 무엇이든 하라고 했었고. 요리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될 텐데, 아직도 별개로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칼질은 내 전문인데.”
“…….”
“그 손은 피아노 연주가 어울려요.”
“…….”
“지루하면 좀 더 큰 건반을 만져도 좋고.”
태경이 골반을 붙여 왔다. 당혹감에 유정이 눈을 크게 뜨자, 그녀의 손에서 남은 식기마저 빼앗고는 물을 틀었다.
또 당했다.
그는 불리할 때면 이런 식으로 능글맞게 빠져나가곤 한다. 치사하다고 따져도 보았지만, 그러면 반응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는 현답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인 셈이다.
유정은 패배감으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몸을 돌렸다. 식기들이 태경의 커다란 손에 무자비하게 씻겨 나가는 동안 캡슐 커피를 하나 뜯었다. 그의 취향에 맞게 우유와 시럽까지 듬뿍 첨가했다. 그걸 식탁에 두고 설거지하는 태경을 바라보았다.
움직일 적마다 느른히 일렁이는 근육과 등허리를 두 쪽으로 나눈 선을 홀린 듯 삼켰다. 바지를 대강 추켜 올린 상태에서도 엉덩이의 탄력이 눈에 들어왔다. 유정이 저도 모르게 침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사이 그가 설거지를 끝내고 길고 곧은 다리를 뻗으며 다가왔다. 얼핏 유정이 제조한 커피로 시선을 주는가 싶었지만, 몸을 구부려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인내심이 없는 손은 앞치마를 벗기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자그마한 몸에 비해 너무 큰 셔츠는 태경의 것이다. 그는 유정이 제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을 좋아했다. 의도한 것이지만 막상 태경의 손이 셔츠 속으로 파고들자, 유정은 어깨를 움츠렸다. 차가운 손이 빳빳하게 선 유두를 누르고 돌렸다.
“일할 때마다 유정 씨 데리고 가서 숙소에 두고 싶어요.”
“…….”
“끝나고 돌아가서 바로 이렇게 빨아 주게.”
그의 뜨거운 숨결이 유륜에 붙었다. 아찔한 온도에 유정이 목을 꺾으며 탄성을 참았다. 그 바람에 목울대가 파르르, 울었다. 무심코 그의 어깨를 잡고 버티는데, 손바닥이 까끌까끌했다. 꺾인 시야를 간신히 옮기자, 못 보던 흉터를 발견했다.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듯한 몸에 흉터가 생길 때마다 유정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가 있는지 눈치챘는지 태경이 유정의 목덜미를 당겨서 입을 맞췄다. 새가 부리로 먹이를 쪼듯이 자잘하게. 유정은 황홀함 속에서도 애틋하게 큰 덩치를 껴안았다.
“정말 이제 몸에 상처 안 났으면 좋겠어요. 네?”
태경은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가슴 밑부분을 핥았다. 중력을 못 이긴 젖은 아랫부분이 가장 통통했다. 그 살성에 태경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셔츠를 더 잡아 내렸다. 그러자 유정이 재빨리 셔츠를 사수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오늘 할 일 있다고 했잖아요.”
태경이 날카로워진 눈을 들었다.
“이건 어쩔 건데요.”
그가 짧게 허리를 쳐올리자, 하반신에 곧장 딱딱한 앞섶이 부딪혀왔다. 그 순간 질구가 축축해졌다.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유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할 일 하고 나서……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요.”
그 말이 작정하고 유혹하는 것보다 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태경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침묵이라는 공백 속에서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이윽고 태경이 셔츠를 놓아주었다. 거대한 몸을 세우고 욕실 방향으로 틀었다. 유정은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셔츠를 추슬렀다.
하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은 잠시였다. 욕실로 걸어가는 그의 등에 할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흥분하면 손톱으로 할퀴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니까, 완벽한 언행 불일치인 셈이었다. 다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 놓고 정작 그의 등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유정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 * *
잠시 후 나온 마당 한편에는 앙증맞은 밥그릇과 물그릇이 서너 개 놓여 있었다. 그 앞에 쭈그려 앉은 유정이 밥그릇에 사료를 우수수 쏟아부었다. 맛있는 걸 먹을 때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태경은 담벼락 위에 있던 고양이 두 마리가 밑으로 폴짝 뛰어내리는 걸 발견했다.
“키우는 거예요?”
그가 다시 시선을 밑으로 내리며 유정을 쳐다보자, 유정이 돌아보며 웃었다.
“아니요. 가끔 보는 애들인데 귀여워서요. 이제부터 좀 챙겨 주려고요.”
순간 미풍이 불어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간질이며 휘날렸다. 흐트러진 옆머리를 귀 뒤로 꽂으며 드러난 뺨이 분홍빛이었다.
할 일이란 게 마당에 들르는 고양이들 밥 챙겨 주는 거였나. 태경은 유정의 해사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턱을 매만졌다. 그녀는 온통 저 같은 것만 좋아했다. 부드럽고, 살랑살랑하고, 따듯한 것들.
“태경 씨, 물 좀 갈아 줄래요?”
유정의 말을 듣고 물그릇에 담긴 물들을 잔디 위로 버린 태경은 들고 있던 생수로 물그릇을 다시 채우며 느릿하게 말했다.
“집에서 키우는 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