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태경은 넋이 나간 세르게이를 두고 태연히 걸어갔다. 정녕 자신의 몸에 칼을 쑤셔 박은 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심했다. 세르게이는 질렸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와락 얼굴을 구겼다.
“J!”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뭐해! 당장……!”
세르게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부하들을 향해 무작정 명령을 내렸지만, 그저 구경꾼들만 우르르 흩어질 뿐이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움직여 주태경을 붙잡기에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성당 안에서 서유정과 강준우가 나왔다. 여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세르게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앞으로 걸어가던 주태경의 몸이 사선으로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끝내 바닥에 쓰러졌다. 여자가 경악하며 달려오고, 그 뒤를 강준우가 뒤따랐다.
“태경 씨!”
유정의 맑은 동공 안에 창백한 그의 얼굴이 담겼다.
* * *
캄캄한 어둠 속에 준우가 앉아 있었다. 모친은 정말로 구출되었다. 전우애도 저버리고, 서유정과의 우정도 저버리면서까지 원했던 것인데도 철저히 괴로웠다. 죄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끝없는 자기반성은 결국 자기혐오에 빠지는 데까지 왔다.
그때, 불이 켜졌다. 준우는 마른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보다 더 마른 눈을 들었다. 방문자는 이광현이었다. 침대도 아니고, 소파도 아니고. 그가 구석 자리의 바닥에 처박힌 준우를 보며 헛웃음을 웃었다.
“혼자 처박혀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이광현은 사직서를 들어 보였다.
“고작 한다는 게 이런 짓인가?”
준우는 저벅저벅 다가오는 팀장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광현은 상체를 비틀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피해 버리는 놈을 응시했다.
군인이자 블랙스완의 신분으로 민간인에게 포섭되었으니 사직이 아니라 파면되어도 모자란 처사라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도 결국에는 발렌틴이 저지른 서유정 납치극의 연장선이다. 그녀를 납치하는 바람에 주태경은 윌 터너 소장을 시찰하여 본부로 이송하는 작전에서 무단이탈했다. 그 바람에 윌 터너가 세르게이에게 포섭되었고, 블랙스완의 정체가 노출되었다. 나비효과가 이렇게까지 이어질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예상했어야 하는데.
이광현은 이를 악물었다.
“자격 미달은 네가 아니라 나야.”
준우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광현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삶을 포기한 것처럼 늘어져 있는 준우의 멱살을 잡아챘다.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서 팀원에게 피해를 끼쳤다고. 네가 아니라 내가.”
“…팀장님…….”
“책임은 내가 진다.”
“팀장님!”
준우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선배님이…… 다쳤습니다.”
“…….”
“결국 그렇게라도 증거를 잡아야만 끝나니까……!”
성당의 계단은 CCTV 사각지대였으나 범행 도구와 목격자가 있었다. 준우가 그 사실에 얼마나 안심하고, 또 자책했는지 알고 있는 광현은 실소를 터뜨리며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주태경은 원래 그런 놈이야.”
노쇠한 세르게이 하나 주태경이 막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겠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세르게이도 죽음보다는 오히려 그편에 더욱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지금껏 쌓아 올린 아성이 자국에서나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매장당할 일이었으니.
평화 유지군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실제로 비슷한 선례가 있었다. 평화 유지군을 살해한 후 범인이 도망쳤고, 그 범인에게는 60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결과는 뻔했다. 범인을 찾은 후, 그 자리에서 사형당했다.
세르게이는 살인 미수뿐만이 아니라 협박과 매수하는 과정 속에서 민간인을 인질로 잡았으며 계획의 목적 또한 민간인 살해였기에 죄질이 더욱 나빴다.
다행스럽게도 세르게이는 순순히 체포되었다. 비록 죄를 부인하고는 있지만 머지않아 인정하게 될 테고.
“그렇게 제 잘못을 정당화하고 싶진 않습니다.”
“강준우.”
“듣고 싶지 않아요.”
“어머님, 주태경이 처음 말했을 당시에는 구출되지 않았어.”
준우가 멈칫, 고개를 들었다. 광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준우의 죄책감을 모르지 않았다. 뭣보다, 제 목숨을 위해 배신한 게 아니라 놈이 끔찍이 아끼는 모친을 살리고자 배신했다. 그런 놈에게 숨 쉴 구멍은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광현은 생각했다.
“그게 무슨…….”
“서유정을 구출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셈이지.”
주태경은 그런 인간이었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이용하고 무엇이든 버린다. 그 냉혹함은 그의 출중한 능력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장점이었다. 그게 서유정을 향한 보호 본능에도 적용이 되었을 뿐이다. 결국 그 선택이 모두를 살린 묘안이 되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고.
“구출은 그 후였다. 그걸로 죄책감은 덜어 내.”
결국 각자 지키고 싶은 걸 지키려 했을 뿐. 이광현은 그렇게 못을 박고는 돌아섰다.
“곧 팀 개편이 있을 거다. 허튼 생각 말고 적응할 준비나 해 둬.”
* * *
병실은 훈기로 가득했다. 물론 자동으로 적정 온도가 유지된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정의 손길이 만들어 낸 훈기에 가까웠다. 태경이 입원한 후 이틀 동안 그녀는 가습기의 물을 매번 갈았고, 꽃도 가져다 두었으며 시집을 챙겨와 의식도 없는 그에게 읽어 주었다. 의사는 생명에는 전혀 지장 없다 했고, 유정은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에이든은 태경의 이마를 쓸어 만지는 유정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녀는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오셨어요?”
“네.”
에이든은 마땅히 더 할 말이 없어 침묵하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극정성이 먹혔나 봐요. 멀쩡히 돌아다닐 때보다 얼굴이 좋네.”
“그러게요. 이렇게 긴 잠을 자는데도 참 멋있죠.”
유정이 눈을 감은 주태경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에이든은 병문안 온 것을 후회했다. 홍콩의 임시 거주지에서부터 느꼈던 둘의 애틋함은 어째서 식지도 않는 것인지. 에이든은 입 안에 자신이 질색하는 단 게 들어오기라도 한 듯이 몸서리를 치며 의자에 앉았다.
그 사이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낸 유정이 뚜껑을 따서 에이든에게 건넸다.
“준우 씨는…… 좀 어때요?”
에이든은 잠깐 고민했다. 죄책감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긴 했는데 그것도 팀장의 극약 처방으로 좀 나아지긴 했다고. 그래도 아직까진 주태경을 볼 면목은 없는 모양이라며 솔직하게 말했다간 서유정의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오랜만에 휴가죠.”
에이든은 그렇게 둘러댔으나 눈치가 빠른 그녀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일단은 묵비권보다는 좋은 방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망고 주스를 한 모금 들이키던 에이든은 일순 몸을 굳혔다. 지금 막 섬뜩한 기운을 감지한 탓이다.
“태경 씨!”
아니나 다를까, 유정이 감격한 얼굴로 침대로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눈을 뜬 주태경의 품으로.
그는 이틀 만에 의식이 돌아온 사람 같지 않게 태연했다. 단지 품으로 파고들어 엉엉 우는 서유정을 힘껏 끌어안을 뿐이었다.
“……퇴원해야겠어요.”
빌어먹을 방해꾼이 없는 곳으로. 에이든은 그가 꼭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 뜨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서유정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참 둘 다 한결같지.
복부 상처가 깊고 출혈이 컸다지만 주태경의 눈깔은 여전히 형형했다. 에이든이 눈치껏 빠져 준 후에는 대놓고 유정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유정은 간호사 선생님을, 아니 의사 선생님을 불러오겠다며 부산을 떨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데려왔다.
그는 의사와 몇 가지 질의응답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를 응시했다. 서유정이 가까이 오지는 않고 시야 안에서 왔다 갔다만 하자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유정은 시선을 의사에게만 주고. 의사의 말만 귀담아듣고.
씨발, 인내심 테스트도 아니고.
태경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의사가 무어라고 경고하는데 뒤틀린 숨만 들이마셨다.
그러자 의사의 안색이 굳어졌다. 환자가 대답은 착실히 잘해서 언뜻 보면 순탄한 대화로 비춰질 테지만, 사실은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다. 줄곧 다른 곳을 보다가 한 번씩 눈이라도 마주칠 때는 심장이 써늘했다. 건조한데 뜨거운, 이상한 기분을 들게 하는 눈이었다. 결국 의사는 준비한 질문에 대한 대답만 주워 담아서 나갔다. 그녀는 그런 의사의 배웅까지 했다. 그 뒷모습에 주태경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서.
그런 다음에는 배고프지 않냐는 둥, 물을 좀 마시지 않겠냐는 둥 질문을 던지며 냉장고를 뒤졌다.
“서유정.”
태경이 성까지 붙여 부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정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유정 씨, 이리 와 봐요.”
그가 손짓했다. 그러자 유정은 냉장고의 문을 닫고서 몸을 세웠다. 작은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그녀를 태경은 참지 못하고 낚아챘다.
“역시 퇴원해야겠어요.”
“그건 안 돼요!”
유정이 단호한 얼굴로 말리자, 태경은 유정의 손을 뜨겁게 달아오른 제 밑으로 옮겼다. 딱딱하게 크기를 부풀린 남성에 깜짝 놀란 유정이 입을 벌리고 어버버거렸다.
“이게 왜…….”
“머리랑 좆은 안 다쳤잖아요. 유정 씨.”
태경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유정을 쳐다봤다.
“왜 자꾸 딴짓만 해요. 불안하게.”
“……불안했어요?”
“네. 툭하면 다쳐서 간병이나 하게 만드는 성가신 놈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러자 유정이 갑자기 침묵했다. 유독 선하고 깨끗한 눈망울은 동요도 없었다. 태경이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손가락을 튕겨 볼을 툭, 건드렸다. 다른 데보다 도톰한 뺨은 좀 뜨거웠다.
“의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뭐를요, 하고 묻듯이 그가 바라보았다.
“제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 태경 씨도 그럴 수 있잖아요. 괜히 휩쓸리지 않았으면 해서요.”
“…….”
“그래서 저는 태경 씨가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도 다칠 수는 있지만…… 제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고 믿기로 했어요.”
“…….”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대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닌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