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72)화 (72/83)

72화.

예정대로 결혼식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정이 6000HK$를 받고 샴페인을 날랐던 마카오의 그 성당이었다.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주태경이 굳이 이곳을 선택했다.

성당은 총격이 있었다고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정교하게 조각된 석조 외벽, 높고 웅장한 천장. 어쩐지 중압감마저 느껴지는 고풍스러움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이치는 햇살이 중화해 주었다. 그 한 편에 마련된 신부 대기실에 유정은 상기된 얼굴로 앉았다. 원장 수녀님과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한 티아라 대신 소박한 꽃으로 머리를 장식했다.

태경은 성당 측에서 제작했다는 제대 장식을 뒤로 한 채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이곳은 아무리 관리를 했다고 해도 바닥에서부터 세월이 느껴졌다. 그만큼 수없이 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갔을 터.

태경은 구둣발로 슥, 바닥을 긁었다. 여기에 서유정과 발자국을 남기게 생겼다. 작전에 투입되어 방문했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진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눈이 일순 선득하게 굳었다. 자신의 그림자에 낯익은 그림자가 겹쳐진 탓이다.

“기분 좋아 보이는군.”

근엄하지만, 일단 들으면 불쾌감부터 치미는 희한한 음성. 그것의 주인을 진작 눈치챈 태경이 시선을 들었다. 초대하지 않은 하객이자 불청객을 보는 그의 눈빛이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축하해 주러 왔네. 미안한 일도 있고.”

세르게이. 마치 그렇게 부르는 듯이 태경이 어금니를 꽉 사리 물었다.

“…….”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를 보며 세르게이는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주태경의 귀에서는 그 순간에 클래식 음악이 처절한 장송곡으로 바뀌었다.

“씨발.”

그는 세르게이를 지나쳤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던 그는 갇혀 있던 우리에서 탈출한 짐승처럼 신부 대기실로 달려갔다.

신부 대기실은 예상대로 난장판이었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꽃잎, 구석에 내몰려 공포에 질린 수녀와 신자들. 태경의 눈은 그들을 헤집고 관자놀이에 총부리를 붙인 채 덜덜 떨고 있는 서유정에게 기어이 닿았다. 그의 동공이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일렁였다.

태경의 시선은 다시 역행했다. 혼란과 두려움이 드리운 그녀의 얼굴에서 총부리로, 방아쇠를 얽은 손가락으로, 그리고 총을 들고 아이처럼 눈물을 쏟고 있는 강준우에게로.

“죄송해요……. 죄송, 해요.”

준우는 넋이 나간 채로 그 말만 반복했다. 태경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대꾸했다.

“놔.”

그가 서슴없이 다가서자, 경기라도 인 듯이 준우가 소리쳤다.

“우, 움직이지 마요!”

그 말에 그는 오히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어깨를 굳혔다.

“안 놔?”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준우는 울먹이면서도 끝까지 총을 겨눈 자세를 풀지 않았다. 태경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때, 강준우의 몸에서 빨간 불빛을 발견했다. 그의 눈매가 무섭게 가늘어졌다. 준우는 그 몸에 폭발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협박.

태경은 단박에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추궁하듯이 응시하자, 준우는 눈물로 젖은 입술을 사리 물고는 말했다.

“엄마를……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그 말에 유정은 숨을 삼켰고, 이내 체념하듯이 눈이 까맣게 죽었다. 태경은 그 변화를 감지하고 얼굴을 굳혔다. 더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구출됐어.”

“……!”

준우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예민한 감각으로 반응을 감지한 태경은 더욱 침착하게 말을 덧붙였다.

“네가 정신머리 놓고 다닐 동안 네 뒤부터 밟았어. 이제 폭탄만 해제하면 살 수 있단 뜻이지.”

“…….”

“서유정이 다치면 넌 죽어.”

구출. 해제. 죽는다. 강준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핵심 단어가 귀에 박혔다.

준우는 일단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총부리와 유정의 관자놀이가 분리되었다. 태경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둘의 거리가 점차 더 벌어지다가, 준우가 끝내 총을 아래로 떨구었다.

동시에 태경이 움직였다. 우선은 더는 허튼짓을 못 하도록 강준우의 발등을 구둣발로 짓밟고 섰다.

“죄송…….”

준우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하는 중간에 태경의 목소리가 다음 말을 덮어 버렸다.

“입 다물어.”

그러고는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의 버튼을 눌러 간단하게 초침을 분리했다. 그걸로 폭발물 어딘가를 지지자, 스위치와 전파가 끊어졌는지 폭발물의 빨간 불빛이 픽 꺼졌다.

태경의 잇새로 헛숨이 터졌다. 유사시 대응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시계이긴 했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해도 폭발물은 허술했다. 처음부터 눈속임일 뿐이었으니 복잡한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도 없었던 거겠지.

강준우의 모친을 인질로 삼아 녀석을 이용하는 게 세르게이의 핵심 전략이었다. 그래. 강준우가 이깟 폭발물 하나 달았다고 쉽게 놀아날 인간은 아니지.

태경은 엄지로 입술을 훑으며 피식 웃었다. 폭발물이 해제된 조끼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던 유정이 흠칫, 시선을 들었다.

“태경 씨!”

다급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보았지만, 그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태경은 못 보던 표정을 했고, 낯선 웃음을 지었었다. 유정은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일순 오싹했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유정이 뭐에 씐 것처럼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가 먼저 반응했다.

“유정 씨…….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준우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오열했다. 유정은 몸을 돌려세웠다.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옆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도 신경은 온통 태경의 행방에 쏠렸다.

* * *

세르게이는 유유히 성당을 빠져나왔다. 바람이 불자 코트 자락이 휘이이, 흩날렸다. 옷깃마저 건드리고 지나가는 바람에 세르게이는 웃음을 흘려보냈다.

주태경은 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소속된 집단이 추구하는 방향이 선량한 일이라고 해서 놈이 저지른 일까지 선량한 건 아니다. 세상 이치란 건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분류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놈은 직업을 핑계로 그리 간단하게 분류해 버리고는 자기 멋대로 심판까지 하지 않았나.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깟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에 의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예를 실추당한 게 분하고 억울했다. 그러니 주태경도 그에 상응하는 절망에 빠져야지. 그렇게 해야만 수지 타산이 맞는 일이었을 뿐이다. 함께 뛰고 굴렀던 동료의 배신까지 더해져 더욱 괴롭겠지.

세르게이는 흡족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고막을 파고드는 둔탁한 발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주태경이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기척을 자유자재로 숨기는 능력으로 유명한 놈이었다. 분명히 고의로 발소리를 냈다. 세르게이의 빠른 추측이 거기까지 닿았을 무렵이었다.

태경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햇빛을 받더니 섬광처럼 번쩍였다.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태경과의 거리가 현격히 좁혀져 있었다.

“……?!”

주태경의 강철처럼 튼튼하고 거대한 그 몸과 세르게이의 몸이 충돌했다. 복부에는 묵직한 무언가가 파고들었고. 세르게이는 사색이 되었다. 황급히 복부를 확인한 후에는 아연실색했다.

“너…… 이 새끼, 이게 무슨…….”

충격으로 세르게이의 얼굴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순간에 발렌틴이 주태경에 대해 횡설수설 늘어놓던 말이 떠올랐다.

‘그 새끼 대가리는 연구 대상이란 말이야. 어떻게 씨발,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겠다는데 시간 계산을 하지? 공중에 있는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진 시간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야, 그 씨발 새끼는.’

병석에 누워서도 틈만 나면 주태경에 대해 떠들어 대며 치를 떨던 발렌틴의 얼굴에서 회상이 끝났다.

세르게이는 화강암 재질의 계단에 후드득, 떨어지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칼에 찔렸다. 세르게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무심결에 칼을 움켜쥐었으나, 베일 듯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손잡이가 잡혔다. 당혹감에 휩싸여 방황하던 세르게이의 눈이 뒤늦게 손수건을 발견했다. 주태경이 손에 손수건을 두른 상태로 칼날을 잡고 있었다.

충격으로 굳어 버린 세르게이의 두뇌는 여전히 더디게 회전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인식 불가였다. 결국 세르게이는 해명을 요구하듯이 태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심상한 얼굴이었다. 선선히 웃어 주기도 하면서 세르게이의 손목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칼끝이 살을 비집고 들어가는 감각을 세르게이는 선명하게 느꼈다.

그때.

귓구멍에 주태경의 목소리가 타르처럼 질척하게 흘러 들어왔다.

“널 한 방에 죽이는 건 아쉽지.”

그는 달달 떨리는 세르게이의 손을 탁, 쳐 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배에 꽂힌 나이프를 단숨에 뽑아내었다. 그 바람에 고여 있던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나중에는 줄줄 흘렀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의 악마 같은 행위에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 세르게이는 휘청거리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태경은 피 묻은 손으로 세르게이의 뺨을 툭툭 쳤다.

“그 개좆같은 자존심에 살인 미수로 사는 게 고통이겠지.”

살인 미수. 그 단어에 세르게이는 심장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스스로 자기 뱃가죽을 쑤셨는데 왜 내가 살인 미수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억울하네, 씨발. 난 다 잃을 뻔했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주태경은 존재 자체로 압도적이었다. 역광 아래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안광을 마주한 세르게이는 턱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뭘 또 건드려줘야 고통스러울까. 발렌틴을 그냥 죽일까. 지은 죄도 많은데.”

“…….”

“아니지. 또 씹질해서 핏줄이야 만들면 그만이잖아.”

“…….”

“먼저 알려 주면 감옥 가기 전에 죽여 줄 수도 있는데.”

그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세르게이의 귀에 퍽퍽 박혔다. 그 잔악함에 숭고함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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