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소파는 넓었지만 커다란 그의 몸에 안겨 있으려니 비좁았다.
시간이 도대체 얼마나 흘렀을까. 실내에 꽉 찬 야한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이틀간 내리 섹스만 한 탓에 기운 없이 졸린 눈을 깜빡이던 유정은 제 몸을 휘감은 무거운 팔을 조심스레 밀어냈다.
“얌전히 있어요. 보낼 생각 없으니까.”
그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유정의 몸을 감싼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유정은 숨통이 조이는 느낌에 가슴을 크게 움직이며 호흡했다.
“태경 씨…….”
잔망스러운 부름에 태경이 몸을 뒤척이며 상체를 세웠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그녀에게 고착되어 있었다. 그가 뭐라 말하려 입을 뗀 순간, 유정이 더 빨랐다.
“집에 다시 안 들어갈 거예요.”
유정은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가족만 떠오르면 가슴 어딘가 시큰거렸던 느낌이 이제는 조금도 남지 않았다. 어렸을 적 수영장에 빠뜨려 오빠를 아프게 한 죄책감을 질질 끌고 살기엔, 저야말로 물에 잠긴 듯 숨이 막힌 채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길었다.
유정은 입을 달싹이며 시선을 다시 올렸다. 저를 놓칠세라 긴장하고 있는 남자야말로 제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끝내 그런 그에게 무례했고, 무시했다.
내가 그들에게 그런 존재밖에 되지 않으니까.
찰나에 울컥한 유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는…… 그 집에서 살 일 없어요.”
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상하던 것과는 다른 말인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시선 끝에는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의심이 걸려 있었다.
“짐만 가지고 나올 거예요. 옷이랑 화장품 같은 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도.”
“…….”
“……태경 씨가 단추 달아 준 잠옷이랑 셔츠.”
말을 마치며 유정은 몸을 일으켰다. 잠깐 현기증이 일어 상체가 비틀대는데, 태경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제 품에 기대게 했다.
“오늘은 안 되겠는데.”
그는 고개를 숙여 이미 울혈이 가득히 새겨진 목덜미를 핥고, 작고 부드러운 귓불을 아프지 않게 깨물며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랑 가요. 내일.”
유정의 고개를 돌리게 해 입을 맞춘 태경은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그는 소파에 기댄 채로 잠든 유정을 안아 들고 욕실로 갔다. 따듯한 물을 채운 욕조에 조심스레 내려진 유정은 피로가 풀리는 느낌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태경이 온몸 구석구석을 매만지며 씻겨 주고 있는데, 기진맥진한 상태라 말릴 여유가 없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어떤 부분들을 의도치 않게 건드릴 때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 그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가슴을 스치듯 매만지자, 유두에 찌릿찌릿하며 자극이 왔다.
“읏…….”
눈가를 찌푸리며 입술을 앙다무는 유정을 향해 태경이 눈을 치켜들었다.
시선이 어지러이 부딪치자, 유정은 떨려 오는 호흡을 바로잡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제 가슴에 얼굴을 묻자 숨을 참았다.
그의 코끝이 보드라운 윗가슴에 닿고, 입술이 유두를 간질이며 집어삼켰다. 평소처럼 잘근잘근 씹지 않고 부드럽게 핥으며 빨자, 바짝 선 예민함이 부드럽게 달래졌지만 흥분감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정은 밑에서 애액이 주르륵 흘러 물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다리 사이를 좁혔다.
“태경 씨…….”
울 것 같은 목소리에, 태경이 젖가슴을 전체적으로 핥아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배고프겠는데.”
먹은 것도 없이 그의 것만 품었으니 기운이 없을 만도 했지만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었다.
“조금 더 자고 싶어요.”
태경은 대답 대신, 유정의 샤워를 끝마쳐 주고 큰 타월로 몸을 감싸서 안아 올렸다.
* * *
하루 꼬박 기절한 유정은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려 준 태경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혼자 다녀올까 했지만 태경이 들어줄 리 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
유정은 차에서 내려 태경의 손을 잡고 대문 앞에 섰다. 몇 달을 지냈건만, 생전 처음 본 집인 듯 낯선 기운이 발목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잠깐 놓고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었다.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철컥, 열렸다. 대문 안에 발을 디뎌도 잠깐 멈춰서 집을 올려다본 유정은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고민도 없이 제 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캐리어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한국에 와서 새로 사 둔 건 전혀 없기에 차곡차곡 금세 캐리어 안이 채워졌다. 지켜보던 태경이 도울 것도 없을 만한 짐이었다.
“뭐야……? 유정이니?”
인기척에 나와 본 차영이 방 앞에 기대선 태경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방 안을 들여다봤다. 유정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잠옷을 챙겨 넣었다.
“뭐 하는 거야? 이 남자는 왜 여기 있고!”
차영이 목소리를 높이자, 게임 하고 있던 진기도 거실로 나왔다. 태경과 눈이 마주친 진기가 움찔하는 순간, 짐을 다 싼 유정이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나 이제 엄마랑 오빠 안 볼 거야.”
유정의 초연한 모습 앞에 차영이 무슨 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 얼굴을 구겼다.
“어차피 난 이 집에서 뭣도 아니었잖아. 난…… 할 만큼 다 했어.”
“유정아!”
“가족이라서, 가족이니까 다 참았어. 엄마랑 오빤 단 한 번도 나를 생각해 주지 않았는데, 나만 애쓰는 관계였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엄마가 안아 줬을 때, 그립지만 어색했다. 밖에만 나돌았던 아빠,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던 오빠, 그 누구한테도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가족인데, 가족이 아니었다.
그녀는 당연해서 끈질기게 놓지 않았던 것을, 그들은 당연해서 그녀를 함부로 놓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그간 한 번도 말썽 안 피우다가 왜 뒤늦게……!”
“내가 오빠한테 방해될까 봐 신경 썼지, 언제 나한테 관심 둔 적 있어? 바라던 대로 해 줘도 늘 실망만 시킨 건 엄마야!”
유정은 소리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카오에서 번 돈 다 줬고, 한국 와서도 큰돈 손에 쥐여 줬잖아. 그거로 이제 우리는 끝이야.”
사색이 된 차영의 얼굴을 보며 지긋지긋해진 유정이 뒤를 돌았다.
참다못한 진기가 발을 크게 구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야, 너 뭐 그거 가지고 생색내냐? 그리고 한국 와서 준 돈, 회사 사장 팬 거 합의금으로 진작에 다 쓰고 없어. 뭐 졸라 큰돈인 줄 아네.”
태경을 힐긋 쳐다본 진기는 그가 이미 유정에게 다 말했을 거로 생각하고 숨김없이 뱉어 냈다. 내내 숨기던 사실이라 안면이 뻣뻣하게 굳은 차영을 보면 안타깝지만, 돈 가지고 유세 떠는 유정의 속을 어떻게든 긁고 싶었다.
언제나처럼 땍땍거리며 울기나 하겠지.
차라리 그렇게 감정적으로 굴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효과가 있는지, 유정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천천히 뒤를 도는 그녀의 얼굴은 울음기도, 분노도 없었다.
“……놀랍지도 않네, 이젠.”
유정은 차영을 응시하다가 진기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한심한 새끼.”
할 말을 잃은 진기가 입매를 비틀었다.
깜짝 놀란 차영이 진기의 팔을 잡으며 다급히 말했다.
“서유정! 너 남자 잘못 만나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거니?! 오빠한테…….”
“태경 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뭐?”
차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되묻자, 유정은 입술을 짓씹었다.
“엄마랑 오빠보다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태경에게 눈짓하며 다시 뒤를 돌았다.
“가요. 태경 씨.”
미련 한 줌 없는 동작으로 나가는 유정을 바라보던 태경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렇다는데.”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서도 차분했다.
그는 얼빠진 차영과 진기를 보며 이마를 매만졌다.
“합의금 얘긴 왜 해. 유정이 속상하게.”
눈을 감으며 미간을 찌푸린 그가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차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당신! 당장 책임지고 우리 딸 데려와요!”
“무슨 개소리세요. 내가 안 보내 주는 건데.”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지만 내용은 거침없었다. 차영이 흠칫 떨며 말을 잇지 못하자, 진기가 나섰다.
“역시 군인 아니지? 깡패나 뭐 그런 거지? 시대가 어느 시댄데 흥신소 붙여서 내 뒷조사하고.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생각하는 거 하고는.”
태경은 따분하고 지겨운 듯 혀를 찼다.
차영과 진기가 찬물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앞으로 서유정 찾으려고 하지 마. 거지새끼들이 계속 들붙으면 내가 좆같잖아.”
진기가 어버버 거리며 멍청히 서 있는 순간, 차영이 옆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
아연실색한 차영과 그런 차영을 붙잡은 진기를 내려다보던 태경은 뒤를 돌아 뚜벅뚜벅 걸어갔다. 애초에 들어올 때부터 구둣발이었던 그의 발자국이 방바닥에 시커멓게 남겨졌다.
* * *
유정은 펜트하우스로 돌아오자마자 짐을 풀었다. 다른 방을 고를 것도 없이 태경이 그의 침실로 캐리어를 놨기 때문에 그녀가 머물 곳도 당연하게 정해졌다.
욕실 쪽 선반에 화장품을 올려놓던 유정이 거울을 통해 태경과 눈을 마주쳤다.
어깨를 벽에 기대고 선 그가 입을 뗐다.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유정이 눈을 키우며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말을 덧붙였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거나, 아니면 피아노를 다시 하고 싶다든지.”
피아노…….
가느다란 제 손가락을 쳐다보는 유정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유일하게 할 줄 알던 것이지만, 유일하게 욕심내던 것이기도 했다. 상을 타 오면 가족들이 기뻐했고, 조금이나마 관심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나마도 장남을 위해서 그 조금의 관심도 받을 수 없게 됐지만.
내가 정말 원하고, 하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애쓰고 노력했던 것 중에 하나일 뿐일까.
피아노에 관한 것마저 다시 생각해 본 유정은 얼굴을 굳혔다.
태경이 그런 유정에게 성큼 다가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새하얀 얼굴 위를 이리저리 훑었다.
“화 안 풀렸네.”
다정하지만 어딘가 삐딱한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