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인식하기도 전에 끌려간 그녀의 목에 그가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통화가 끝났는지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넣으며 태경이 말했다.
“냄새 안 나요.”
안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유정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체를 세우는 그의 입술이 스치듯 광대에 입을 맞췄다. 아무도 이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데도, 유정은 쑥스러워 얼굴을 숙였다.
넋을 놓은 그녀 대신에 태경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등이 밀려서 겨우 차에 올라타는데, 뒤에서 그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결국 이마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유정은 마침 태경이 안전벨트를 쭉 당기는 바람에 숨도 쉬지 못했다. 그가 보닛 쪽으로 돌아서 운전석으로 가는 모습을 유정이 샐쭉한 얼굴로 보았다. 하지만 정작 차에 올라탔을 때는 황급히 화제를 돌리게 됐다.
“참, 가족들한테 태경 씨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거든요. 언제 시간 돼요?”
다행히 그는 의심 없이 안전벨트를 채우며 대답했다.
“내일 저녁 괜찮아요.”
“좋아요. 그럼 그렇게 말해 둘게요.”
유정을 잠깐 쳐다본 태경이 액셀을 부드럽게 짓밟으며, 핸들을 돌렸다.
* * *
도착한 곳은 호텔이었다. 태경의 커다란 체격으로 인해 시야가 가로막혔으나 언뜻 보이는 것들이 익숙했다.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럭셔리함에 압도당한다. 주춤주춤 걸음을 옮기던 유정의 귀에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낯설지 않았다. 청각을 세운 유정의 보폭이 넓어졌다. 순식간에 응접실까지 진입했다.
넓은 소파가 작아 보일 정도로 덩치가 큰 준우와 에이든이 눈에 띄었다. 유정은 반가움에 숨을 들이마셨다. 인사를 먼저 꺼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입은 그저 벌어지기만 했다.
씻고 올 테니 인사 나누라고, 태경이 읊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더불어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를 발견한 준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태닝이라도 한 것처럼 피부가 한층 구릿빛이었다. 현장에 투입될 거라던 예고대로 되었나 보다.
유정은 재회의 감격에 휩싸여 눈물까지 글썽였다. 멋쩍게 웃는 준우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래도 하얀 건치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이 반가워서 심장이 뜨거웠다.
“유정 씨, 이렇게 반가운데 울면 어떡합니까! 저 선배한테 죽습니다!”
준우는 벌써 어디라도 한 군데 맞은 시늉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에 못 이겨 유정도 웃음이 터졌다.
“너무 반가워서요. 곤란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근데 왜 또 그렇게 피골이 상접했습니까?”
말대로, 그녀는 다시 한 줌이 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로 닭똥 같은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데 어느 누가 마음이 안 찢어져. 준우가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며 옆에 앉을 것을 재촉했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 간식거리들을 끌어오고, 캔 음료 뚜껑도 땄다.
그가 수선을 떠는 바람에 에이든은 졸지에 맞은편 자리로 쫓겨났다. 불만스럽다는 듯 구시렁거리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녀가 앉을 자리에 슬쩍 티슈를 밀어 주기도 했다.
유정은 찡한 코끝을 문지르며 빈자리에 앉았다. 저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에이든을 똑바로 응시하며 억눌린 목소리를 냈다.
“고마워요, 에이든.”
“별로. 난 눈물은 질색이라서.”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듯했지만 에이든의 귀 위쪽이 빨개져 있었다.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준우는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냈다.
“말을 해도 꼭……. 가만 보면 사람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 말에 에이든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나?”
“그래, 너.”
준우는 몹시 불쾌하다는 듯 에이든에게서 몸을 홱 돌려세웠다.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던 둘은 여전했다. 유정은 오랜만에 보는 말싸움마저 반가워 그저 웃기만 했다.
“다들 잘 지내셨나 봐요.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그녀의 차분한 시선이 준우와 에이든의 상태를 훑어 내렸다. 일단 육안으로 확인되는 상처가 없어 안심한 얼굴이었다. 매일 남자들과 살을 부대끼며 사느라 세심한 걱정은 받을 일이 드물었던 둘은 쑥스러운지 딴청을 피웠다.
“사실 태경 씨가 엄청 잘 지낸 거 같아서, 두 분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유정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러자 준우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잘 지내긴 했는데……, 선배님이 멀쩡했다고요?”
준우는 말끝에 탄식까지 흘렸다. 그녀가 떠난 후의 주태경은 모든 감각이 전사한 거 같았다. 준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때를 떠올렸다.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는 이미 육탄전으로까지 번진 상황이었다. 사상자가 무려 일곱이었다. 폭탄이 날아들고 총질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도 그는 태연했다. 경건하고 무자비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주태경이 홀로 무장 공비에 포위되었을 때는 아찔했다. 돕기 위해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전세가 역전될 수 있어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드럼통 뒤에 몸을 은신한 그를 적군이 검푸른 파도처럼 접근했다. 그때 아마,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고요 속에서 격발 소리가 들렸다. 주태경은 남은 탄환까지 계산하는 치밀함을 보여 주었다. 헤어날 수 없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한 모습이, 잔혹한 사신이자 살아 있는 시체 같아서 기이할 정도였다.
모든 게 한층 날카롭고, 예민해진 그는 식사도 건너뛰는 날이 많았다.
그날도 간단히 물로 목을 축이는 게 전부였는데.
‘아침부터 육식이네. 홍콩에 있었을 땐 유정 씨가 아침으로는 고기 별로라 그래서 잘 안 먹었는데.’
잘게 토막 내 아무렇게나 구운 고기가 식사로 나와, 잠깐 유정에 대한 말을 뱉었다.
그 순간 물을 마시는 소리가 끊겼다.
또 무엇을 불쾌하게 했나 싶어 입을 다물자, 주태경이 아예 의자를 빼서 앉더니 말했다.
‘계속해.’
여자에 관한 얘기면 무엇이든 하라는 거였다.
그래서 정말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을 두서도 없이 뱉어 놓는데, 숨을 멈추고 듣는 것 같았다.
주태경에게 허기가 있다면 서유정이었다. 그 흔적마저 게걸스럽게 삼킬 정도로.
회상에서 허우적거리던 준우는 이내 의아한 얼굴의 유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가 다 유정 씨가 그리울 지경이었거든요.”
다행히 군사 회담 이후 민병대 철수 결정이 되었고, 살벌했던 전운이 걷혔다. 아무리 그 짓으로 벌어먹는다고 해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타격이 컸다. 당연히 당분간은 휴가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런 호사는 없었다.
“저희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도 선배가 만들었으니까, 뭐.”
준우는 잠시 고심했다. 이 애틋하기 그지없는 커플은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주태경이 낯간지러운 말로 그녀의 기다림을 보상해 주었을 리 만무했으며, 서유정도 그저 돌아와 주었으니 그저 다 괜찮다고만 했을 테니.
불을 좀 지펴 주어도 될 것 같다.
“이유를 만들었다고요?”
한국 유엔군 사령부는 엄밀히 말해 유엔 관할도 아니다. 그런데도 주태경은 허락도 없이 사령관부터 참모장, 일개 병사까지 조직 전체를 관통하는 조사에 착수하도록 만들었다.
그게 단 하루에 벌인 일이었다. 서유정을 만나려면 한국으로 와야 했으니까. 숫제 미친놈이었다.
“네. 저흰 원래 한국에 올 일이 없거든요. 여긴 분쟁 지역도 아니고.”
“그랬구나…….”
생각지 못했던 말에 유정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일이 있어서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저는 부수적인 이유에 불과하다고. 그런데 삼 개월 동안 혼자만 가슴 졸인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명치를 할퀴었다.
“저한텐 좋은 일이죠. 오랜만에 엄마도 보고.”
준우는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거기에 모친에 대한 애정과 걱정, 연민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럼 집에는 가셨어요?”
유정은 한국을, 모친이 그리워 향수병까지 앓았다던 준우의 말이 떠올라 괜히 저가 더 반가웠다.
“아니요. 딱히 집이 없어요. 우리 엄마 아직 요양원에 계시거든요. 거기 들렀다 왔어요.”
“아…….”
실수했다는 생각에 유정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준우는 손을 저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그런 얼굴 할 거 없어요. 웬만한 집보다 훨씬 좋거든요. 골프장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 주마다 한 번씩 클래식 공연도 해 준다니까요. 아들 덕분에 호강한다고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사실 저도 좀 뿌듯하고.”
진심으로 뿌듯해하는 준우를 보며 유정도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정 씨는 가족들이랑 같이 살아요?”
그렇게 묻던 준우가 시선을 들었다. 주태경이 나온 탓이다. 갑자기 기류가 바뀌는 것은 그가 나타났을 때라는 사실을 유정도 본능으로 알았는지 돌아보았다.
준우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애당초 태경은 그간 잘 지냈다고 증명한 후에 꺼지라고 했었으니까.
에이든에게도 눈치를 주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미 일어나서 응접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럼 우린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 말에 유정은 아쉬움이 완연한 얼굴로 일어섰다.
“벌써요? 더 있다 가시지…….”
혹하는 제안에 준우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주태경을 보았지만, 그 직후 다리를 바깥으로 뻗어야만 했다. 죽일 기세로, 빨리 꺼지라는 눈빛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더 버틸 강심장은 못 되니까.
그 와중에 에이든은 이미 신발까지 신었다. 준우도 서둘러 신발을 구겨 신으면서 에이든의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야비한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