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65)화 (65/83)

65화.

유정은 그가 준 하얀색 카드를 떠올리며 움찔했다. 일단 받아만 둔다고 했던 말이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오래 있을 예정이에요.”

뒤이은 말에, 딴청을 피우며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던 유정이 안색을 밝혔다.

“정말요?”

“당분간 한국에 일정이 잡혀 있어서.”

또 언제 떠나게 될지 몰라 내심 걱정하고 있던 유정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시름 놨다.

* * * 

고민하다가 차영에게 오늘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메시지를 남긴 유정은 종일 서서 일하는 바람에 고단했던 몸을 씻고, 욕조에 들어갔다. 물을 반쯤 채워 노곤하게 반신욕을 즐기는데, 홍콩에서의 일상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욕실 안을 울리는 순간, 욕실 문이 열리더니 태경이 들어왔다.

욕조에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유정을 힐긋 쳐다본 그가 옷을 벗으며 샤워 부스 안에 섰다. 움직일 때마다 빳빳하게 서는 허벅지 근육과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로 시선이 꽂힌 유정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발기되지 않아도 허벅지 사이로 길게 늘어진 그것은 차마 쳐다볼 수 없어, 눈을 깜빡였다. 물 온도는 분명 식었는데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태경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욕조로 들어왔다. 반쯤 차 있던 물이 그가 들어오자 바깥으로 출렁 넘쳐흘렀다.

촘촘하게 짜인 그의 상체가 물을 머금고 번들거렸다. 유정은 목이며 얼굴, 귀까지 새빨갛게 물이 들었다. 애꿎은 샤워 볼을 들고 부지런히 몸을 닦는 척을 했다. 그럴 때마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요란하게 들렸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기분이 야릇했다. 몸 이곳저곳에서 열기가 치솟고 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자신이 내지 않은 물소리가 정확하게 구별이 되었다. 태경이 불쑥 가까워졌다.

“여기서 살아요.”

“…….”

“전처럼 같이.”

고저 없는 목소리인데도 늪지처럼 깊고 질척였다. 유정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눈을 들었다. 태경의 동공에서 불가사의한 일렁임이 보였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하마터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갑자기 독립하겠다고 했다간 의심을 살 테고, 모친의 정서상 혼전 동거를 허락할 리 만무하다. 무엇보다 책임질 수 없는 섣부른 대답으로 그를 실망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가족들이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마땅히 댈 핑계도 없고…….”

“…….”

“저도 태경 씨랑 있고 싶지만…….”

진심이 흘러나와 버렸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조급해져 태경과의 거리를 한 움큼 좁혔다. 그러자 그의 목울대가 들썩였다. 어깨의 근육이 조여드는 걸 보고서는 절로 숨을 죽였다.

거절하는 것은 힘든 일이고, 또 그 상대가 태경이기 때문에 괴로웠다. 그녀는 제발 오해하지 말라는 듯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태경은 뭔가를 인내하듯이 숨을 들이마신 후에 말했다.

“유정 씨 가족들 만나고 싶어요.”

“네?”

“소개해 줘요.”

태경은 놀라서 벌어진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유정 씨 가족들이니까. 나도 뵙고 싶어요.”

그가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반면에 유정은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갑자기 온갖 걱정이 봄날의 꽃송이처럼 타다닥 피어났다.

태경을 가족에게 소개하는 자리가 가진 달콤한 의미.

배려가 없고 무례한 가족들이 벌일 만행.

그와의 장밋빛 미래.

소중한 대접을 받지 못한 인생이 발각될까 하는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스친 건 찰나였다. 목구멍이 깔깔했다. 어설프게 웃기만 하자, 태경의 곧은 시선이 들이쳤다.

“곤란하면 신분 하나 만들까요. 부모님 멀쩡히 있고 화목한 집안으로.”

그런 것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태경이 싱긋이 웃었다. 유정은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아니에요!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렇게 말을 해도 그는 태연한 눈으로 굽어보았다. 명치가 욱신거렸다.

“저는 그냥 태경 씨가 가족들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돼서. 그리고 신기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바로 대답을 못 한 거예요.”

“…….”

“저는…… 태경 씨의 모든 게 자랑스러워요. 속일 필요 없어요.”

그의 턱이 꽉 맞물리며 굳어지는 게 보였다. 유정은 황급히 더 가까이 다가가 절실하게 그의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거짓말 아니에요. 믿죠?”

태경은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가슴께를 더듬는 손을 잡아 올리고서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내가 유정 씨 아니면 누굴 믿겠어요.”

유정이 훅,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면서도 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잘 있는 거죠?”

그가 엄지손톱을 입술로 문지르며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들었다.

“태경 씨 동료들이요. 모두들 저한테 잘해 주셨는데……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아래로 손을 뻗어 배수구 마개를 뺐다. 물이 쏴아아, 빨려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다음에는 그녀의 다리 한쪽을 욕조 턱에 걸치게 만들었다.

“잘 있겠죠.”

적당히 물이 빠지자, 그는 다시 배수구 마개를 끼웠다. 벌건 대낮처럼 환한 욕실에서 다리를 벌리게 된 유정은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같이 있다가 온 거 아니었어요?”

그가 상체를 기울여 귓불을 뜨겁게 사리물며 속삭였다.

“아직도 딴생각할 여유가 있어요?”

유정은 목을 꺾으며 바르르 떨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꼬박꼬박 대답할 여유도 있고.”

태경이 동공을 어둡게 가라앉히고서 손을 밑으로 내렸다. 대범하게 수풀을 헤집은 손은 갈라진 주름 사이를 정확하게 내리눌렀다. 그 말에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던 유정은 새된 신음을 터뜨렸다.

“흣!”

그의 손이 물살과 함께 둔덕을 쓸어 올렸다. 소중히 어루만지는 듯 하고서는 단번에 예민한 핵심을 문질렀다. 유정은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엉덩이가 제멋대로 들썩거리고 허벅지 안쪽이 팽팽하게 수축했다.

말도 안 돼.

태경은 빠른 속도로 그녀를 고지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당혹감과 수치스러움에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미 헐떡거리고 있었다.

“반응이 너무 빠르잖아요.”

“…….”

“음탕해, 서유정.”

그가 목젖을 움직이며 웃었다. 커다란 손으로는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고 쭉, 끌어당겼다. 유정은 그대로 엉덩이가 미끄러졌다.

* * *

그가 몇 번이고 다시 몸을 붙여 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아르바이트에 지각할 뻔했다. 설거지를 하는데 눈꺼풀이 무거워서 혼이 났다. 피곤한 기색을 가득 머금고 집으로 돌아온 유정에게 전에 없이 차영의 질문이 날아왔다.

“얘, 너 어젯밤 어디서 잤니?”

유정은 피로한 눈을 비비며 모친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랑 있었어? 며칠 전에 진기가 봤다던 남자는 진짜 남자친구니?”

이상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누구랑 친한지, 뭘 하고 노는지 관심도 없던 모친이었다. 화이트데이며 빼빼로데이에 선물을 받아 와도 남자친구냐고 한번 묻지도 않았었는데. 유정은 새삼스러운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담백하게 대답했다.

“남자친구 맞아.”

차영의 동공이 묘하게 커졌다.

“진지하게 만나는 관계라 안 그래도 소개하고 싶었어.”

“정말? 그럼 빠른 시일 내로 약속 잡아.”

모친의 의외로 적극적이었다.

“안 그래도 걱정이었어. 제대로 된 놈인지 내가 판단해야지. 너처럼 순해 빠진 애가 무슨 남자 보는 눈이 있다고.”

유정은 침묵했다. 그러자 차영이 살살거리며 웃었다.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린 거 알지?”

의도 없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딱 모친이었다. 유정은 동의할 수 없다는 태도로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 진기가 냉장고에서 꺼낸 쭈쭈바의 꼭지를 따며 말했다.

“엄마, 쟤 눈 엄청 높아. 대문 앞에서 내가 봤다니까.”

차영이 눈썹을 휘며 아들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외모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진기가 아씨, 왜 때려. 하고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차영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그나저나 어디서 봐야 할까? 집으로 초대하는 게 맞지만, 집이 이렇게 누추해서 말이다.”

그보다는 직접 음식을 차리는 게 귀찮고 싫을 게 뻔했다. 행여 유정이 집을 고집할까 봐 차영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진기야, 너도 면접 보러 다닐 때 입었던 양복 있지? 그것 좀 꺼내 놔. 드라이 맡기게.”

“나도 봐?”

그러자 차영이 남잔 남자가 봐야 안다는 둥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아예 신경 안 쓰는 건 아니구나. 유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 * *

유정은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다음 아르바이트생이 구해질 때까지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사장의 배려 덕분에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온 유정의 눈에 그의 차가 들어왔다.

불빛을 깜빡거리며 정차한 차 앞에 태경이 서 있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가까이 오는 그녀를 보고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유정은 괜히 목덜미를 매만졌다. 고깃집이어서 그런지 몸에 냄새가 밴 것 같아 코를 킁킁거리게 됐다. 그때, 뺨으로 불쑥 손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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