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이리 와 볼래요?”
유정을 당겨 무릎 위에 앉힌 태경이 눈을 내렸다.
“왜 울지?”
그가 눈물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닦아 주었다.
“꿈만 같아서요. 너무…….”
“유정 씨. 이게 꿈이면 안 돼요.”
“…….”
“이것마저 꿈이면.”
그녀의 가슴에 무너지듯 얼굴을 묻고서 태경이 중얼거렸다.
* * *
유정은 편의점을 앞에 두고 태경을 돌아봤다. 늦지 않게 데려다주긴 했지만, 편의점 간판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그가 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성큼 다가서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가져가 번호를 입력했다.
다시 핸드폰을 건네받은 유정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태경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다른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유정이 점점 눈을 크게 뜨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어? 전화해도 돼요? 문자도?”
“네. 유정 씨랑 연락하려고 만든 거니까.”
태경은 상체를 숙여 유정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언제든 해요.”
유정은 붉어진 얼굴로 이마를 슥슥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디서든 같이 있지 않아도 말을 나눌 수 있었다. 좀 전까지는 그와 붙어 있고 싶은 마음에 출근이 아쉬웠지만, 금세 기분이 좋아져 손을 흔들고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시재 점검을 하며 괜스레 밖을 힐긋 쳐다본 유정은 이전 아르바이트생이 인사하며 자리를 뜨자, 같이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전기난로를 켜지 않아도 따듯한 기운이 맴돌아 졸음이 몰려왔다.
결국 밥을 먹고 나서도 낮잠은커녕 그의 품에 안겨 끙끙 울음 섞인 신음만 내뱉었기에 잠이 한참 부족했다.
목이 쉰 것도 같아 헛기침을 몇 번 한 유정은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구니를 들고 음료 칸으로 간 손님이 콜라 다섯 캔을 계산대로 가져왔다. 계산을 다 하고 비닐봉지에 콜라를 넣어 준 유정은 등을 돌리고 가는 손님에게 인사를 하며 음료수 창고에 가서 캔 콜라를 채웠다. 으슬으슬 추운 기운에 잠이 깨는 것도 같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딸랑-.
그러던 중 손님이 들어오는 종소리에 황급히 나갔다. 연속으로 손님이 들어오는 경우는 잘 없는데 오늘따라 조금 바쁜 편이었다. 그 때문에 시간이 제법 빠르게 흐른다고 느낀 유정은 손님을 몇 차례 더 맞으며 편의점 바깥을 빗자루로 쓸고 들어왔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끝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태경을 생각하던 유정은 메시지를 보낼까 고민했다.
딸랑-.
고민하던 중에 문이 열렸다. 소리만 듣고 다음 야간 아르바이트생인 줄 안 유정이 인사를 하려 고개를 들자, 그녀를 힐긋 쳐다본 태경이 온장고에서 두유를 꺼내, 계산대에 내려놨다.
깜짝 놀라 멈춰 있던 유정이 계산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태경 씨!”
태경은 계산한 카드를 지갑 속에 넣으며 두유를 유정의 손에 쥐여 줬다.
“기다릴게요. 마치고 나와요.”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유를 소중한 것처럼 두 손으로 잡았다.
태경이 천천히 뒤를 돌아 편의점을 나섰다. 마침 도착한 다음 아르바이트생이 그를 힐끔 쳐다보며 들어왔다. 얼른 나가고 싶은 마음에 두유부터 꿀꺽꿀꺽 삼킨 유정은 서둘러 교대 후 밖으로 향했다.
기다란 목도리를 대충 여미고 나온 그녀는 가로등 밑에 서 있는 태경에게로 다가갔다. 뛰어가는 바람에 대충 여민 목도리가 밑으로 흘러내렸다.
“기다렸는데 왜 연락 안 해요.”
목도리를 다시 둘러매 준 태경이 말했다. 안 그래도 메시지를 보내려다 쑥스러워서 선뜻 보내지 못했던 유정이 목도리에 하관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아, 하려고 했는데…… 내일부턴 꼭 할게요.”
너무 다짐하는 것처럼 말해 버렸나?
유정의 커다란 눈망울이 위로 굴러가며 태경을 바라봤다. 다행히 그는 별 신경을 안 썼는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길이었다. 하지만 일 끝나고 집 가는 길이 축 처지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유정은 장갑을 끼지 않아도 손이 시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깝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거리도 순식간이었다. 대문 앞에 선 유정은 뒤를 힐긋 돌아보며 말했다.
“어제 봤겠지만,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태경의 시선이 유정의 어깨너머 대문으로 향했다. 유정도 괜히 고개를 돌려 낡고, 허름한 집을 쳐다봤다.
“난방은 잘 돼요?”
태경이 물었다.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린 유정은 어느새 자신을 응시하는 눈동자와 마주했다.
“아……, 네. 아무래도 오래된 주택이라 외풍은 좀 있지만…… 그럭저럭 따듯해요.”
“유정 씨.”
태경은 더듬더듬 입을 떼는 그녀를 불렀다. 말을 이으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끼익-.
그 순간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몸을 돌린 유정은 진기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런 유정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진기가 그녀의 앞에선 태경을 보고는 눈을 키웠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와중에 입이 조금 벌어졌다.
유정은 서둘러 태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화할게요. 추우니까 얼른 가요.”
“먼저 들어가요.”
태경이 유정의 한쪽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결국 먼저 대문 안으로 발을 디딘 유정은 진기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들어갔다. 멍청히 서 있던 진기도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왔다.
“야, 뭐냐?”
“뭐가.”
“저 남자 누구야?”
어디 가기로 한 것도 까먹었는지 유정의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목도리를 돌돌 풀던 유정이 피곤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알아서 뭐 하게.”
“남자친구냐?”
“신경 꺼.”
“어디서 만났는데?”
유정은 결국 진기를 방 밖으로 밀치고는 방문을 쾅, 닫았다.
소란스러워지자 차영이 나와 봤는지, 대화하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 작게 들렸다.
“걱정하지 마. 남자친구랑 있었나 봐.”
“남자친구?”
“어. 방 들어가지 마. 쟤 아직 삐쳐 있어. 내일이면 풀리겠지, 뭐.”
짜증이 확 밀려온 유정은 침대에 털썩 앉아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진기 때문에 당황해서 그를 서둘러 보내 버린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
-잘 들어갔어요?
잠잠한 목소리에 안정을 찾은 유정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았다.
“네. 아까는 우리 오빠예요. 많이 놀랐죠? 별로 마주치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왜요?
“그냥 내 치부 같아서요. 가족인데. 태경 씨한테 무례하게 할까 봐도 걱정되고. 태경 씨가 실망할까 봐…….”
-실망 안 해요.
잠깐 입을 닫은 유정이 목소리를 작게 흘렸다.
“맞아요. 태경 씨는 그러겠죠. 그런데 그냥 제가 괜히.”
-가족들이 힘들게 해요?
그도 잠깐 아무 말을 하지 않더니 물었다.
머뭇거리던 유정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눈을 감았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괜찮아요.”
이번엔 정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차 문 여닫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제 가는 거예요? 조심히 가요. 오늘 피곤하겠어요. 일찍 자요. 내 꿈도 꾸면 좋고…….”
진심이었지만, 괜히 닭살인가 싶어진 유정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꿈은 매일 꿔요. 눈만 뜨면 없어지니까 악몽인가 했는데 오늘은 아니더라고.
혼잣말 같았다. 유정은 그의 자조 섞인 말에 순간 가슴이 떨렸다.
-내일 봐요.
뭉클해진 유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
“네. 내일도 봐요, 우리.”
내일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 * *
태경이 돌아온 일상이어도 온전히 곁에 있을 수는 없었다.
식당 설거지 아르바이트 때문에 저녁에나 만날 수 있던 유정은 식당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로 뛰어갔다.
“태경 씨!”
다가오는 유정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던 태경이 멈칫 그녀의 손을 뒤집어, 시선을 내렸다.
쪼글쪼글하고 거칠어진 손을 황급히 오므린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기름기 확인하려면 헹굴 때 한 번씩 고무장갑 벗거든요. 그래서 조금 건조해요.”
유정의 손을 뚫어져라 보던 그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그는 이내 낙담하듯 한쪽 손으로 얼굴을 까슬하게 쓸어 만졌다.
“유정 씨.”
“네?”
“일하지 마요.”
단도직입적인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유정이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지금처럼 평일 주말 할 거 없이 일하면 그를 보는 시간도 줄어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아, 그럼 편의점만…….”
“그것도 하지 말라는 소리예요.”
태경은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하얀색 카드를 내밀었다.
“이거로 생활해요. 세르게이한테 받을 보상금도 곧 나올 거예요.”
“태경 씨.”
손에 쥐어진 카드를 보며 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태경은 거절할 생각 말라는 듯 눈썹을 세웠다.
“보상금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써요. 일, 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 거니까.”
그는 대답을 들을 필요도 못 느끼는 듯 조수석 문을 열어 안으로 턱짓했다.
지난 보상금인 3천만 원은 어디로 갔는지 묻지도 않는 그를 물끄러미 보던 유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받아만 둘게요.”
유정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문을 닫은 태경도 운전석으로 가 시동을 켰다.
우르릉.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무거운 소리와 함께 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새카만 무광의 겉모습과 반대로 온통 상아색인 내부는 밖에서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유정은 안전벨트를 매만지며, 차체가 낮아 신기하게 보이는 바깥 풍경을 쳐다봤다. 차에 대해 뭘 몰라도 값비싼 외제 차인 건 알았다. 그녀는 이내 차 안을 빙 둘러보다가 운전 중인 태경을 응시했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이 툭툭 가볍게 움직였다.
“나 이런 차 처음 타 봐요. 한국 오자마자 산 거예요? 오래 있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개같이 벌어서 개같이 쓰거든요.”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티 나게 써요. 아끼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