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신발도 안 신고 왜 이러고 있어요.”
한겨울 눈밭을 달려온 그녀의 발이 안쓰러울 정도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태경은 그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발등은 새파랗고, 그 주변은 울긋불긋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곱아드는 발가락, 안절부절못하다 차라리 눈 속으로 더 처박아 버리는 움직임까지. 그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눈에 담았다.
유정은 민망한 얼굴로 한쪽 뺨을 쓸어내렸다. 대답을 고르려고 하는데, 마땅한 핑계를 찾기 어려웠다. 한겨울에 맨발로 나다니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는 극히 드물었다.
그 와중에도 습윤한 눈은 허겁지겁 태경을 살폈다. 최근 머리를 잘랐는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정돈된 느낌이었다. 검은색 폴라티에 화이트 셔츠, 그 위에는 멀리서부터 눈길을 끌던 시커먼 캐시미어 코트가 뒤덮고 있었다.
그는 겨울이 참 잘 어울렸다. 특유의 무심한 표정과 계절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맞물려 묘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조금 어색하고,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품은 변함없이 견고했다. 울림이 있는 음성도 여전했고.
유정은 몸을 떨었다. 뺨도 얼고, 코끝도 얼고. 몸이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떨림은 그깟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돌아왔다. 냉혹하고 지독한 현실이 까마득한 저편으로 날아가고, 비현실적인 행복감에 휩싸였다.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왠지 태경 씨가 올 것 같았어요.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맨발로 뛰쳐나왔나 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런 다음에는 서슴없이 코트를 벗었다. 어쩐지 어깨와 팔뚝이 전보다 더 단단하고 두툼해진 것 같다는 감상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태경은 벗은 코트를 유정의 몸에 둘러서 여며 주었다. 그에게는 한낱 겉옷에 불과했던 코트는 그녀가 걸치자마자 이불로 용도가 바뀐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괜찮다는 뜻으로 팔을 저으려 했지만, 소매에 파묻힌 손이 보일 리 만무했다.
유정도 그 사실을 늦지 않게 깨달았는지, 퍽 난감한 표정으로 전신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태경이 그녀를 들쳐 안은 탓이다. 유정은 중심을 잡기 위해 절로 그의 목을 팔로 감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은 아까보다 더 빨개진 채였다.
“저기, 저는 괜찮은데요…….”
그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사실 유정도 그 품에서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따뜻하고 안락했다. 눈을 감자, 뺨을 타고 미지근한 눈물이 흘렀다.
* * *
호텔 MK는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호텔이다. 입구부터 고급스러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는데, 최고층은 위엄마저 감돌았다. 포근한 인상의 응접실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회의실을 끼고 있었으며, 조금만 걸어가면 럭셔리한 레스토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다이닝 룸도 존재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들고 주태경이 다이닝 룸에서 나왔다. 유정은 소파 끄트머리에 겨우 걸터앉아 있었다.
실내 온도를 27도까지 높여 놓았는데도, 여전히 그의 코트를 몸에 두른 채 꽉 움켜쥐었다. 시선은 널찍한 창문 밖의 리버 뷰를 부유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그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태경은 그녀의 눈길을 삼키며 걸어갔다. 그리고는 코트 자락을 무슨 동아줄처럼 쥐고 있는 손에 기어이 머그잔을 들려 주었다. 그런 다음에는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유정의 발에서 실내용 슬리퍼를 벗겨 냈다.
아직도 불긋불긋한 맨발이 드러났다. 손아귀에 움켜쥐어도 터무니없이 작았다. 유정은 기겁하며 그의 손을 밀어내었다.
“이제 안 차요. 따듯해요.”
그런다고 태경이 밀려날 리 만무했지만. 어쨌거나 필사적이었다.
발은 무슨 동상이라도 걸린 것처럼 찼다. 그는 엄중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양 엄지발가락부터 하나하나 손으로 문질렀다.
사람의 손에, 그것도 이토록 섬세하게 발을 어루만짐 당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이따금 심술을 부리듯이 발가락 새새 길쭉한 손가락을 쑤시기도 했다.
유정은 그 간지럽고 화끈거리는 감촉에 몸을 웅크렸다. 은근슬쩍 발을 빼내려는 시도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대신에 인공조명을 받아 번들거리는 검은자위가 눈을 맞춰 왔다. 얼굴의 피부 결을 따라 지나가는 곧은 시선이 아주 끈적거렸다.
유정은 슬며시 눈을 옆으로 굴렸다. 이내 반대편으로 다시 굴려도 보고, 아예 고개를 돌리기도 해 봤다. 하지만 얼굴에 달라붙은 시선은 좀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목소리를 흘렸다.
“맞았어요?”
그 말에 유정이 처음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 질문이 나오게 된 원인을 알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곧 태경의 시선이 광대 부근에서 유독 오래 머물렀다는 점을 떠올렸다.
유정은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광대에 보랏빛 멍이 들어 있었다. 누구든 오해할 만한 절묘한 위치와 색깔이었다. 민망함과 당혹감에 휩싸인 그녀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거울 속의 제 멍과 태경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욕실 입구의 벽에 삐딱하게 기대선 채로 물었다.
“누구한테?”
덤덤한 어조였다.
“오빠?”
짚이는 구석을 언급하는 그의 동공이 우묵하게 침전했다. 절대 추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궁지에 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결국 유정은 황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넘어졌어요.”
태경이 빤히 쳐다봤다. 골수까지 속속들이 꿰뚫을 것 같았다. 유정은 괜히 침을 삼키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솔직히 오빠가 인간성이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절 때린 적은 없어요.”
서진기는 인간성으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형편없었다. 그렇다고 누굴 완력으로 제압할 만큼 야만적이지도 않고, 사실 그럴 만한 배짱도 없었다. 그저 어른으로서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는 챙기고 싶은 게으른 낙관주의자일 뿐.
당장 오늘만 해도 그랬다. 흥분해서 밀쳐 놓고, 막상 그녀가 어디에 부딪히자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서진기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무엇보다, 지금은 가족들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태경에게 가 있었다.
떨어져 있어도 일상 틈틈이 떠올리곤 했다. 밤에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손을 뻗어도 만질 수 없는 현실이 가혹해서.
그랬는데, 그가 이렇게 눈앞에 있었다.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망상이 아니라 실체로 서 있었다.
유정은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에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반면에 태연한 태경에게 서운하고 야속했다.
“……걱정돼요? 그런데 왜 여태껏 전화하지 않았어요……?”
“…….”
“난 태경 씨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예전처럼 다치면 어쩌나 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함께 겪어 본 이상 그의 안전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생사를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정은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무어라 더 말하려 했다. 그 순간에 태경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몸을 잘게 진동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말을 완성했을 터였다.
이렇게까지 삶에 개입하려 든다면 질릴 수도 있지 않을까. 남자는 자유를 억압할수록 신물 나 한다던 지아의 말이 하필 지금 떠올라 버렸다.
유정이 금세 자신감을 잃고 고개를 떨구는데, 턱밑으로 손이 쑥 들어왔다. 다급한 손길에 턱이 추켜세워지기 무섭게 입술이 삼켜졌다.
그 상태로 태경이 콧숨을 들이마셨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그의 팔뚝을 잡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경련하고 있었다.
태경 씨.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부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태경이 시끄럽다는 듯 목덜미를 누르는 바람에 고개가 더욱 젖혀졌고, 동시에 혀가 밀고 들어왔다.
유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휘청 뒤로 물러났다. 허벅지가 소파를 쓸고, 탁상 다리에 종아리가 부딪히며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촉촉한 혀가 입 안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혓바닥을 삭삭 핥고, 얽어매서 빨고, 밑바닥을 긁어 댔다. 마찰로 인해 입 안에 고이는 침까지 다 빨아 먹었다.
그런 다음에는 혀를 길게 빼서 입천장을 비볐다. 유정이 간지럽다고 흐응, 하고 숨을 뱉어 내자 그것마저 모조리 집어삼켰다.
결국에 등이 유리창에 맞닿았다. 냉기에 흠칫 떨리는 어깨를 그가 감싸 쥐었다. 겨울의 화려한 리버 뷰를 배경으로 삼은 모양새였다.
그가 아랫입술의 연한 살점을 이로 깨물었다. 그 짜릿한 감각에 승모근을 세우며 숨을 들이마셨다. 머금은 숨을 뱉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태경의 혀가 치열을 훑었다. 콧숨을 급하게 내쉬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유정이 고개를 비틀며 그의 입술에서 빠져나왔다.
“하, 하아……. 잠, 잠깐만…….”
태경은 숨을 몰아쉬며 들썩이는 목에 얼굴을 처박았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어깨 부근에서 짐승처럼 이마를 문질렀다. 그의 이마는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