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61)화 (61/83)

61화.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한우 전문점은 손님들로 붐볐다. 그 바람에 설거짓거리가 끝도 없이 밀려 들어왔다. 혼자서 그 많은 양의 설거지를 해내느라 유정은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었다. 결국 퇴근 직전까지 설거지를 한 후에 옷을 갈아입고 나올 수 있었다.

“사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래요. 고생했어, 유정 씨.”

사장은 슬쩍 다른 직원들의 동태를 살피더니, 감춰 두었던 쇼핑백을 건넸다.

“배고플 텐데 뜨끈하게 한 그릇 하고 자.”

“매번 안 챙겨 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뭘. 내가 고맙지. 유정 씨 없으면 우리 가게 안 돌아간다? 대목만 지나면 좀 편해질 테니까, 조금만 버텨 주라.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사장은 그래도 인심이 후한 편이었다. 바빴던 날에는 퇴근 때 갈비탕을 포장해서 줄 때도 있고. 젊은 아가씨가 기특하다며 특히 더 챙겨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몰래몰래 줄 때가 더러 있으니까. 장사가 잘되는 가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유정은 갈비탕을 챙겨 들고 가게를 나섰다.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지칠 것 같았지만 그럴수록 걸음을 재촉했다. 지쳐 주저앉고 싶은 심정보다 빨리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우세했다.

집 대문 앞에 도착하자, 안심이 되었다. 여유롭게 아픈 다리도 굽혔다 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현관 앞에 못 보던 커다란 박스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분리수거를 이 모양 이 꼴로 해 놓을 사람은 진기밖에는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유정이 곧장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한껏 들뜬 진기가 새것으로 보이는 컴퓨터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지쳐서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유정을 보고는 왔냐, 하고 건성으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녀는 목을 길게 빼서 오빠의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도 화려한 컴퓨터 두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뭐야, 저것들?”

“뭐긴 뭐야, 새 컴퓨터지.”

“그러니까. 왜 샀냐고.”

유정이 울컥, 높아지려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간신히 말을 완성했다. 눈치도 없는지 진기는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개인 방송 한번 해 보려고. 게임 콘텐츠로.”

찡긋, 윙크하는 진기를 그녀는 차갑게 응시했다. 어렵게 취직했다던 핸드폰 가게는 때려치운 지 오래였다. 영업이 안 맞는 것 같다고 했던가? 그래도 내버려 두었다. 한동안은 구인 활동에 나름 열성적인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개인 방송이라니. 유정은 강한 두통을 느꼈다.

“내 어릴 적 꿈이 프로게이머였잖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돈도 벌고. 일석이조 아니겠냐?”

철없는 소리. 개인 방송은 이미 레드 오션이랬다. 오빠는 정말 모르는 걸까,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그런 쪽에는 문외한인 그녀도 아는 사실인데. 아니. 뭐가 됐건 상관이 없었다. 알고 저질렀든, 모르고 저질렀든 최악인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회사 면접은?”

그래도 설득하면 마음을 바꾸겠지. 지금까지 지겹도록 가져왔던 희망을 또 품어 보았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방송할 건데 회사를 왜 가.”

진기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더 토를 달았다간 화를 낼 기세였다. 유정은 그런 오빠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자 진기가 콧방귀를 뀌며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차영이 주방에서 나왔다.

유정이 그녀를 돌아보며 힘주어 물었다.

“엄마가 오빠 돈 줬어?”

차영은 진기와 눈빛을 주고받더니 살살 웃으며 말했다.

“컴퓨터로 일한다고 해서 내가 사 줬어, 그래.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엄마.”

유정이 화를 삼키며 불렀지만, 차영은 아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미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진기도 나름 계획이 있더라니까. 어떻게 할 건지 동영상까지 보여 주면서 똑 부러지게 설명을 하는데, 이거다 싶었어. 요즘 유행이라며? 너도 알다시피 네 오빠가 말주변이 좀 좋으니? 잘 될 거야. 하고 싶은 일 하는데 얼마나 잘하겠어, 열심히. 안 그래도 네 오빠 건강이 안 좋아서 걱정했는데. 잘됐지, 뭐.”

유정은 모친과 오빠를 밀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딱 봐도 고사양의 컴퓨터인 데다, 본체의 케이스도 화려했다. 조명 역시 휘황찬란하고.

컴퓨터 두 대에 방송 장비까지.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을 게 뻔했다. 유정은 머리꼭지로 피가 확 쏠렸다. 정말 원치 않는데, 울먹임에 가까운 목소리가 나왔다.

“개인 방송은 아무나 해?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하는 거잖아! 나 게임 잘하니까!”

“게임을 잘하면, 그렇게 하고 싶던 프로게이머가 되지 그랬어? 그 수준 안 되니까 못한 거 아니야?”

그간 언성 한 번 높인 적 없던 유정이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차영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기는 당혹스러움에 우물쭈물하다가, 무안함에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끝내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눈을 치떴다.

“야. 너 말 다 했냐?”

진기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차영은 그런 아들을 뒤로 감추며 전면에 나섰다.

“유정아. 서유정! 너 오빠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엄마는…….”

유정이 아랫입술을 꾸욱, 짓씹었다. 참아 보려고 했는데. 참아지지가 않는다. 유정은 결국 내재된 원망을 폭발시켰다.

“엄마는 빚 갚을 생각이 있긴 해? 이거 다 해서 오백만 원도 더 되지?”

“그건…….”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왜 자꾸 이런 쓸데없는 데다 돈 쓰는 거야? 대체 왜!”

가쁜 호흡을 고르고 또 골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유정의 격앙된 반응에 차영의 기세가 확 꺾이자, 진기는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아오, 씹! 내가 놀려고 이러는 것 같아? 설명 다 했잖아!”

“나라고 하고 싶은 게 없는 줄 알아?”

내가 왜 포기했는데.

그 말까진 하기 싫었다. 스스로 선택해 놓고, 이제 와서 남의 탓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것보다 치사한 게 없으니까.

하지만 희생의 결과가 이래선 안 된다.

유정은 거칠게 발을 구르며 현관문을 밀어젖힌 후, 박스를 끄집고 들어왔다. 그다음에는 컴퓨터와 연결된 전선을 붙잡고 뽑아내었다. 그러자 흥분한 진기가 달려들었다.

“아, 이 미친년이 뭐 하는 짓이야!”

진기가 한번 확 밀치자, 유정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 옷장에 부딪힌 후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진기는 당황했는지 어깨를 움츠렸고, 차영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유정아!”

“야…… 괜찮아?”

진기가 미동도 없는 그녀의 몸을 툭, 건드렸다. 동시에 유정이 그 손을 탁, 쳐 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가 핑핑 돌고 눈앞이 어질어질했으며, 광대가 얼얼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통증은 없었다. 아니, 감각이 없었다.

하, 울음이 섞인 찬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상황이. 아니, 한국으로 돌아온 후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모두 기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앞을 막아서며 변명하려는 차영을 밀치고 뛰쳐나왔다. 숨이 차고 몸이 덜덜 떨렸다. 대문 밖까지 나와 상체를 구부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눈물로 희미해진 시야에 들어온 자신의 맨발을 보며 웃음만 실실 나왔다.

대체 저들에게 뭘 기대한 걸까.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다.

입술을 얼마나 깨물었는지, 혀에서 쇠 맛이 감돌았다. 찢어진 입술을 혀로 훑은 후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상체를 세웠다.

골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허공에는 아직도 눈발이 흩날리고, 그 적막 속에서 그녀는 오도카니 서 있었다.

한참 길 저편, 어딘가를 응시하던 유정의 동공이 일순 커졌다. 둥근 동산 같은 오르막 끝에 어둠보다 더 새카만 머리카락이 보인 탓이다.

낯익은 단서는 계속 나타났다. 눈처럼 희고 깨끗한 피부, 넓은 어깨, 길고 곧은 다리. 간절하게 그리워했던 형상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밤길을 걸어오는 그는 마치 거대한 얼룩 같았다. 이윽고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으며 멈춰 서는 게 보였다. 무릎 아래까지 떨어지는 캐시미어 코트가 바람에 나부꼈다. 그가 내뱉은 입김이 허공에서 스러지듯 흩어졌다.

유정은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유정은 있는 힘껏 달려갔다.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리고, 눈물도 흩날렸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거리를 좁혔지만 속도를 조절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그대로 그의 품에 퍽, 하고 둔탁하게 안겨 버렸다. 제법 세게 부딪혔는데도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커다란 몸을, 두 팔로 껴안아도 다 감기지 않는 몸을, 유정은 절실하게 끌어안았다.

몹시도 그리웠던 향기와 온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아찔했던 것 같다.

“어서 와요, 태경 씨.”

그 말에 그는 거대한 상체를 기울이며 더욱 꽉 안아 주었다. 안 그래도 작은 유정은 그 품에 파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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