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60)화 (60/83)

60화.

차영의 병원 진료가 예상보다 빨리 끝이 나는 바람에 집 근처 과일 가게 들러 각종 과일을 샀다. 유정은 오랜만에 한국 과일을 맛볼 생각에 들떴다. 양손 가득 장을 본 꾸러미를 들었는데 무거운 줄도 몰랐다. 우편함에서 우편까지 찾아 챙길 정도로 거뜬했다. 반면에 차영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앓는 소리를 했다.

“아휴, 허리야. 이제 나이가 있어서 대중교통도 못 타겠다, 얘. 네 오빠 앞으로 차 한 대 뽑아야지, 안 되겠어. 기껏 딴 면허 썩히는 것도 아깝고.”

“엄만 좀 쉬어. 내가 정리할게.”

그 말에 차영은 냅다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널브러졌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유정은 싫은 내색도 없이 장 봐 온 것들을 냉장고에 정리했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공간이 제법 냉장고 구실을 하게 됐다. 뿌듯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세운 유정은 곧장 우편물을 뜯었다.

“요즘엔 이런 것도 다 문자로 받을 수 있는데, 왜 안 돌렸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차영도 나이가 있으니, 그런 쪽으론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잘 뜯기지도 않는 우편물을 북북 찢어서 펼친 유정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대출금 납입 촉구문이었는데, 남은 금액이 칠천만 원이었다.

칠천만 원.

그러니까 지금까지 갚은 금액이 고작 천만 원이라는 뜻이었다. 유정의 커다란 눈망울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엄마.”

“왜애. 과일 이따 먹자. 엄마 피곤해.”

우편물이 덜덜 떨렸다. 아니. 정확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유정은 눈꺼풀을 내리고 침대에 드러누운 차영을 홱 노려보았다. 이제는 온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유정은 굳은 몸을 이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차영이 눈을 떴다. 유정은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차영의 앞에 우편물을 들이밀며 말했다.

“이거…… 이게 뭐야, 엄마? 반은 갚았다고 했잖아. 근데 왜 칠천만 원이 남았다고 날아온 거야?”

그 말에 차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차영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유정의 눈빛이 날카롭게 갈렸다. 순하디순한 애가 돌변하자, 차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휴, 그래. 내가 널 속여 뭐 하겠니? 또 속일 일도 아니고. 너도 알다시피 우리 처지가 네 아빠 죽고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잖니.”

“…….”

“그저 아껴 보겠다고 옷 한 벌 제대로 못 사 입고, 쌀 한 톨까지 아껴 먹고, 아파도 병원 한 번 맘 놓고 못 갔어. 네가 마카오까지 가서 그 고생해서 보내온 돈, 내가 아까워서 어떻게 쓰니? 모았지. 차곡차곡 모았지! 그 돈 전부 빚 갚는 데 홀랑 쓰기가 쉽겠냐고! 내 딸이 몸을 갈아서 번 피 같은 돈인데…….”

차영은 얼른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유정아…….”

“…….”

“너도 알겠지마는, 수중에 가진 돈이 없으면 얼마나 불안하니? 우리 중에 누구라도 갑작스러운 사고나 당해 봐. 수술도 못 해 보고 그냥 보내? 그래서, 내가 그래서 종잣돈을 좀 모았어.”

“종잣돈……?”

“그럼! 사천 정도 돼. 그래서 반 정도 갚았다고 한 거고. 내가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네가 준 돈까지 보태서 한 번에! 응? 한 번에 갚으려고 했어. 정말이야.”

차영이 결백하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혼란에 휩싸인 유정은 모친의 손을 뿌리치며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무슨 미련한 짓이야?”

이자만 갚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고.

하지만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대출금이 크면 이자만 갚는 데 익숙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당장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서 더 안일해진다고.

하지만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금액이고, 원금 상환도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었는데. 유정은 지난 세월이 다 허송세월인 것만 같아 허망했다. 그나마 허튼 데 쓰지 않고 저축했다니 다행이었다. 유정은 두통을 억누르며 말했다.

“저축해 둔 돈으로 원금 상환부터 해. 원금을 갚아야지 뭘 해도 할 거 아니야.”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니까……. 이제 오빠도 취직했고 하니까, 걱정할 거 없어. 우리 딸, 알았지?”

유정은 대답 대신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는 돌아섰다. 이번에 원금을 상환하고 나면 대략 천만 원 정도가 남게 된다. 유정은 그것까지 완납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 그거면 되는데. 울적함이 마음 깊숙한 곳을 푹, 찔러 왔다.

* * *

보름, 아니 한 달? 그 정도 보상은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건 과욕이었다. 일주일도 채 쉬지 못하고 지겨운 아르바이트가 시작되었다.

유정은 워낙 일을 빨리 습득하는 편이라,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하루 만에 숙달되어 점주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렇다고 손님들이 알아주진 않는다. 바닥에 떨어진 빨대를 주워서 몸을 세우던 유정은 시야에 익숙한 브랜드 슬리퍼가 들어왔다. 곧장 안색이 굳었다.

“야, 젓가락을 줘야지 처먹든지 하지.”

아니나 다를까, 편의점 위 고시원에 사는 남자다. 삼십 대 후반으로 추정되고, 덥수룩한 머리 스타일과 듬성듬성한 콧수염이 특징인데. 위아래를 모르기로 이 근방에서 유명하다고 사장님이 귀띔해 주었다. 즉, 아무에게나 반말을 일삼는 무례한 사람이었다.

주로 컵라면이나 삼각 김밥, 컵밥 같은 인스턴트식품을 구매하는데 그때마다 각종 트집을 잡는 악취미가 있다. 오늘은 젓가락으로 시비를 걸 작정인 듯했다. 유정은 예의 미소를 머금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봉투에 같이 넣어 드렸습니다, 손님.”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듬성듬성 난 수염이 바르작거리는 게 보였다.

“내가 이걸 혼자 먹을지, 둘이 먹을지. 네가 물어봤어? 왜 젓가락을 네 멋대로 하나만 주는데?”

“컵라면이 하나여서 미처 두 분이 드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혹시 모르니까, 두 개 더 챙겨 드릴게요!”

유정이 재빨리 젓가락 두 개를 더 봉투에 넣어 주었다. 그래도 남자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똑바로 하자, 좀. 어?”

“네. 주의하겠습니다.”

남자는 끝까지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지 주시하다가,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편의점이 말이야. 직원 관리가 이렇게 안 돼서야 어디 벌어먹고 살겠어?”

들으란 듯이 구시렁거리며 남자가 출입문을 열었다. 유정은 그 등에 대고 마지막까지 예의를 지켰다.

“살펴 가세요, 손님.”

저런 손님들에겐 어쨌거나 책잡히지 않는 게 중요했다. 까딱하면 말투를 걸고넘어지니까. 불친절로 트집 잡히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진다. 유정은 불쾌한 심정이 쌓이기 전에 기억에서 지우기 위해 노력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유통 기한이 하루 지난 삼각김밥을 뜯어서 한입 베어 물었다.

“……이것도 자주 먹으니까 맛없다.”

처음엔 맛있었는데.

유정이 아쉽다는 듯 읊조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오긴 온 모양이다. 다들 두꺼운 잠바를 여미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50년 만의 한파가 12월에 찾아왔다고 뉴스에서 떠드는 걸 들었던 것도 같았다. 내부에 있는데도 괜히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 * *

평소에도 지각이 잦은 오후 알바생이 또 늦었다. 시간 개념만 없으면 모르겠는데, 정리 정돈도 엉망인데다 정산 실수도 잦았다. 유정은 꼭 해야 하는 리스트를 적은 쪽지까지 쥐여 주고, 편의점을 나왔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다급하게 목도리를 여몄지만 신통치 않았다. 몸 이곳저곳이 무겁고 삐걱거렸다.

평일엔 상대적으로 시급이 센 식당 설거지 일을 하다 보니 어깨가 뭉친 모양이었다. 스트레칭 비슷하게 목을 움직이며 걷던 유정의 동공이 커졌다. 좁쌀 같은 눈이 하늘거리며 내려왔다. 걸음을 뗄 때마다 눈발이 굵어지고, 그 바람에 바닥에도 소복소복 쌓이기 시작했다.

유정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탄성을 내지르는데, 입김이 피어올랐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다 못해 얼어붙을 지경인데 건데, 유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뻗었다. 손바닥이며 손등에 눈이 휘감겼다.

한국에 온 지 3개월이나 지났다는 점이 비로소 실감이 되었다. 어느덧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었다.

그를 보지 못한 시간도 딱 그만큼 흘렀다.

그와 보낸 나날이 현실이 아니라 사실은 꿈이지 않았을까. 갑자기 내리는 눈처럼 갑자기 찾아왔다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꿈.

내 삶이 그렇게 평탄할 리 없으니까. 그토록 행복할 리 없으니까. 아주 긴…… 꿈을 꾼 게 아닐까.

눈시울이며 코, 뺨이 죄다 새빨개진 유정이 일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젠 얼굴도 까먹겠어.

기억이란 건 원래 퇴색되고 편집되다가, 나중에는 희미해지는 법이니까. 그와의 추억도 나중에는 그렇게 흐려져 버릴까 봐 무섭기까지 했다.

유정은 목도리로 하관까지 덮어 우울한 얼굴을 가리며 걸었다.

나는 안 아프고 잘 지내는데. 안 춥게 다니고, 밥도 잘 먹고.

태경 씨는 잘 지내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묻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에서 맴돌다가, 끝내는 사그라졌다.

한참 걷고 또 걷다가, 유정은 문득 계단에 주저앉았다. 쌓인 눈 때문에 엉덩이가 차가운 줄도 모르고 퍼질러 앉아 씨근거렸다.

이럴 거면 목걸이는 왜 빼놓지 말라고 한 건지. 어떨 때는 어디 해외로 훅 떠나 볼까 싶기도 했다. 그러면 그가 놀라서 달려와 줄 거 같아서. 발렌틴에게 납치당했을 때처럼.

칼바람이 불었다. 눈이 시렸다. 그 핑계로 눈물을 찍, 흘렸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손등으로 얼른 훔쳐 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야 했다. 가족이 있지만 반기는 이는 없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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