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문득 태경이 전달해 주었던 보상금 삼천만 원이 생각이 났다. 좋은 일로 받게 된 돈도 아니고 그 돈을 어디에 쓸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출처라도 물어보면 어쩌지. 유정은 또 골똘히 상념에 젖었다.
“쉰다고? 그래, 그래. 쉬면 좋지. 너 고생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차영은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었다. 유정은 어릴 때부터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오랫동안 숙고하는 바람에 기다리는 입장에선 천불이 났다. 그렇게 해서 내놓은 대답마저 시원찮았고. 이럴 때는 무조건 나 죽네, 어쩌네 하며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
“아휴, 그나저나 이제 어쩌나……. 병원비도 무시 못 하고, 엄마는 당장 일하기도 힘들어. 네 오빠는 이제 막 취직 했고. 돈 나올 구석이 없단 뜻이지. 빚은 하루만 늦어도 독촉 전화를 얼마나 해 대는데…….”
유정이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빚은 어느 정도 갚은 상태야?”
“응? 아니, 뭐…… 이제 뭐 반절 정도?”
차영의 두루뭉술한 대답에도 유정은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반색했다. 끝이 없는 늪에 빠진 줄 알았는데,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왕 얼마 안 남은 빚, 얼른 갚아 버려야겠다는 의지까지 샘솟았다. 우선은 전산 회계 같은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안정된 직장에 취직해야지. 취직 전까지는 자격증 공부와 주말 아르바이트 같은 걸 병행하면 되겠다.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알았어. 내가 어느 정도 생활비 마련해 볼게.”
유정이 의욕을 보이자, 차영은 퍽 마음이 놓인 얼굴이었다.
“휴, 이제 한시름 덜었네. 그래, 우리 딸이 어떤 딸인데. 어려서부터 말썽 한번 안 피우고. 아주 듬직했지, 내 강아지.”
차영이 기특하다는 듯 그녀의 엉덩이를 두드리다가,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덥석 껴안았다. 유정은 그 품이 여전히 어색했다. 어릴 때부터 늘 모친의 품은 오빠의 것이었다.
어쩌다 한 번 안길 때면 그게 그렇게 애틋하고 좋았는데. 어째선지 지금은 하나도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곧장 태경의 품이 생각났다. 너무 넓고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는데. 벌써 그가 그리웠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빚을 갚는 것도 좋고, 취직하는 것도 다 좋은데. 그렇게 되면 태경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득한 걱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차영에게 들킬까 봐 재빨리 마주 껴안았다. 모친의 야윈 등을 쓰다듬으며 뜨거운 눈시울을 가라앉혔다. 아파서 쓰러지기까지 했던 모친은 정말로 앙상했다.
“엄마 많이 말랐다. 밥 좀 잘 챙겨 먹어.”
* * *
한국의 날씨도 꽤 변덕스러웠다.
하루는 우중충하고, 하루는 화창하다가, 또 그다음 날에는 먹구름이 드리우는. 변덕의 연속이었다.
유정은 또 일기 예보에도 없는 소나기가 내릴까 봐 우산을 챙겨 학원을 알아보러 다닌 끝에 완전히 지쳐 버렸다. 평일 대낮인데도 지하철에 웬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역에는 무슨 계단이 그렇게 많은지. 유정은 반나절 만에 핼쑥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집이 또 역에서 거리가 있는 바람에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집이 있는 방향을 원망스레 바라보면서 유정은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편의점 출입문에 붙은 구인 공고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바로 핸드폰을 켜 번호를 저장하는데, 출입문이 딸랑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길을 터 주려던 유정은 나오는 이의 얼굴을 보고 눈이 커졌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늦게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어?”
진기는 딱 그녀가 하고 싶은 질문을 골라 했다.
“오빠야말로 출근 안 하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러자 진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이내 뻔뻔한 성품이 빛을 발휘했다.
“갔지. 갔다가 왔지! 다친 거 나을 때까지 쉬라고 하더라. 폰팔이도 영업직이니까.”
유정이 미심쩍게 쳐다보자, 진기가 보란 듯이 멍든 한쪽 눈을 매만졌다. 멍이 처음 봤을 때보다 확실히 옅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티가 좀 나긴 했다.
진기는 수영장에서 익사할 뻔한 뒤로 빨리 걷거나, 뛰면 금방 숨이 차곤 했다. 군대 문제도 있고 하니, 별의별 검사를 했으나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나마 정신적 문제라고는 하는데, 이제는 아주 고질병이 돼 버렸다.
본인도 그게 스트레스인지, 그 뒤로는 집에만 있으려고 했다. 유정이 가장이 된 데 크게 일조한 셈이었다. 지금 이렇게 직장을 구하려는 시도 자체가 많이 발전한 것이다.
유정의 얼굴에서 의심이 거두어졌다는 걸 느꼈는지, 진기는 금세 자세가 삐딱해졌다.
“먼저 가라.”
진기는 손까지 흔들며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래도 퇴사하겠다고 난동 안 부리는 게 어디야. 유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 * *
차영은 전에 없이 곰살맞았다.
저녁상부터 차이가 있었다. 두부가 들어간 된장찌개, 달걀부침, 진미채 등 단출하지만 정성이 들어간 밥상이었다. 그걸 보는데, 또 태경이 떠올랐다. 마카오에 있는 동안 식사는 늘 대충이었다. 그저 한 끼 때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항상 속이 허했는데.
태경이 밥을 챙겨 주었을 때. 먹어도 금방 허기가 지던 배 속이 처음으로 든든했었다. 잊고 살았던 온기가 채워져서였을까.
숟가락으로 된장찌개를 떠서 입에 넣은 유정은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눈시울부터 붉어졌다.
“내일 병원 가는 날이야.”
다행히 모친이 눈치 없이 말을 걸었다. 이럴 땐 눈치가 없는 게 도움이 되었다. 유정은 눈이 간지러운 척 손등으로 비비며 물었다.
“몇 시?”
“열 시.”
“알았어.”
“너 눈이 왜 그렇게 빨개?”
그 말에 유정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했고, 차영은 가려지지 않는 각도를 찾아 요리조리 기웃거렸다.
“응? 눈이 왜 빨가냐고.”
“고추 씹었어.”
기껏 고안해 낸 변명이 제법 그럴듯했는지, 차영은 곧장 수긍했다.
“얘는. 애호박도 있는데 꼭 고추를 건져 먹어.”
“그러게.”
유정은 싱겁게 대답하고는, 큭큭 웃었다. 그에게는 씩씩한 척 굴었지만, 사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다. 티끌만 한 연결 고리만 있어도 곧장 그를 떠올린다. 의도치 않게 고추를 씹어 버리는 것처럼.
* * *
그는 예지력이 있었던 걸까.
안 받겠다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생활비와 병원비 명목으로 돈이 필요해지다니.
유정은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그걸 모친에게 건넬 때는 무거운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도 같았다.
그걸 알 리 없는 차영은 봉투를 들추어 보고는 단숨에 화색이 돌았다.
“이게 다 얼마야? 모아 놓은 돈 없다고 딱 잡아떼더니, 계집애.”
태경이 반강제로 받으라고 했던 보상금 삼천만 원 중에 3분의 2를 인출한 금액이었다.
“돈 생길 일이 있어서.”
“고마워. 우리 딸.”
차영이 비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얼른 빚 다 갚았으면 좋겠어.”
유정은 진심으로 말했다.
자유롭고 싶었다. 돈에 얽매여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일이 없었으면 했고, 멀리 타국까지 가는 일도 없기를 바랐다. 그녀가 바라는 건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러게. 그럼 소원이 없을 텐데.”
행여 잃어버릴세라 흰 봉투를 자신의 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으며 차영이 대꾸했다. 모친은 그녀가 번 돈으로 생활하면서도 대출금에 이자까지 착실하게 갚아 왔으니, 완납은 시간문제였다. 유정은 뿌듯한 얼굴을 한 채 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보상금의 절반 이상을 한 번에 지출해 버렸지만, 가족에게 필요한 돈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유정은 후련한 얼굴로 거울 앞에 앉았다. 스킨과 로션을 차례대로 바른 후에 립밤까지 꼼꼼히 발라 주었다. 하필이면 시선이 목걸이로 가는 바람에 중간에 멈춰 버린 게 문제지만.
유정은 저도 모르게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것보다, 태경의 목소리가 너무 그리웠다. 그는 핸드폰이 없는데. 있어 봤자 일할 때만 사용하는 일회용 핸드폰이고, 도청이 되기 때문에 그걸로는 전화하지 않으리란 사실도 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의 직업이 직업인만큼 생사 걱정도 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준우의 말대로라면 그는 상처 하나 쉽게 날 사람이 아니니까.
유정은 오래전 들었던 준우의 말에 의지하며 걱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다 제가 입은 잠옷을 내려다봤다. 유독 상의 단추가 짱짱했다.
그가 흥분을 못 이기고 뜯어 버린 잠옷. 그리고 약속대로 단추를 다시 하나하나 달아 주었던.
그 추억에 잠긴 유정은 웃음을 흘렸다.
침대에선 거침이 없는데, 평상시에는 그토록 다정할 수가 없다. 그런 모습은 저만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래도 동료들에게 너무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데. 에이든은 몰라도 준우는 곧잘 투덜거리니까. 정말로 감정이 상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유정은 준우의 뾰로통한 얼굴과 에이든의 심드렁한 표정이 떠올라 또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탄산수가 먹고 싶었다. 마트에 갔다가 홀린 듯이 사 버렸는데. 그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열고 나온 유정은 문득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 어떻게 돈이 생겼네요. 충분히 낼 수 있을 거 같아요.”
안방 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통화 중인 차영과 눈이 마주쳤다. 유정을 본 차영은 갑자기 안색을 굳히더니, 안방 문을 닫아걸었다.
대출금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런 추저분한 일에 대해서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정은 냉장고에서 탄산수만 꺼내서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