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내내 날씨가 좋더니, 안개가 부옇게 낀 흐린 날이었다.
짐은 전날에 싸 둬서 몸만 움직이면 됐던 유정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준우가 준비한 아침을 먹고, 미처 챙기지 못한 가방을 에이든이 넌지시 챙겨 주고, 마지막으로 광현과 어색한 인사도 나눴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일찌감치 거주지를 나선 유정은 거주지 앞 개울과 동네 풍경을 바라보며 차에 올라탔다. 공항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가깝나 생각이 들 만큼 교통 체증도 없었다.
비행기에 탈 때까지 최대한 출발 시간을 미룬 태경과 공항 라운지에 간 유정은 따듯한 차를 마시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아침으로 먹은 식빵이 바삭해서 좋았다는 둥, 공항 오는 길에는 멋있는 가로수를 봤다는 둥 주로 말을 하는 쪽은 그녀였고, 그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시답지 않은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 줬다.
당장 비행기 탈 시간이 닥쳐도 어제와 같은 일상이어서 유정은 마음이 잔잔했다.
그러다 태경이 손목에 무겁게 자리한 손목시계를 일별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후 그를 뒤따른 순간부터는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잡고 가는데 이대로 같이 한국에 가는 느낌이 들어 이상해질 때쯤, 그가 여권과 비행기 표를 쥐여 줬다.
“이제 가을이니까 아침에는 외투 꼭 걸쳐요.”
잠깐 시선을 옆으로 돌린 그는 짧게 말을 덧붙였다.
“되도록 집에만 있으면 좋겠지만.”
유정은 커다란 눈망울에 태경의 모습을 지그시 담았다.
그를 만났던 여름을 보내고, 어느덧 가을이었다.
새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밥도 잘 챙겨 먹고.”
그는 약속을 받아 내듯 상체를 숙여 유정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바로 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무탈하게 지내려면, 태경 씨가 먼저 그래야 해요.”
“…….”
“그래야 내가…… 잘 지낼 수 있어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맺히는지. 가장 중요할 때. 웃으면서 가야 할 순간에.
“사랑해요. 태경 씨. 다치면 안 돼요.”
줄곧 변치 않는 마음이었다. 유정은 고개를 들며 애써 태경과 눈을 마주했다.
태경의 눈동자가 순간 일렁였다. 밑으로 손을 내린 그는 핏줄이 불거질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격하게 제 안으로 들어오던 그였다. 유정은 그의 반응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 응시했다. 마찬가지로 그녀를 뚫어져라 보던 태경이 짓씹듯 말을 뱉어 냈다.
“날 위해 울고 걱정하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비 오는 마카오 항구. 어쩌지 못하고 뱉어 내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유정은 그에게로 두 팔을 뻗었다.
“그냥, 안아 줘요.”
작게 속삭이는 말에 굳은 듯 멈춘 태경이 팔을 잡아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유정에게는 중요한 존재들이 있고, 그건 태경도 알았다.
그가 보기엔 그저 기생충이나 다를 바 없지만, 기생충 같다고 생각한 존재마저 그에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나한테 돌아갈 곳은 서유정이에요.”
여린 목덜미로 얼굴을 숙인 그가 넌지시 말했다.
유정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그의 품을 적셨다. 그녀는 제 몸을 덮을 것처럼 넓은 어깨 위에 손을 올려 그의 옷을 부여잡았다.
* * *
캐리어 바퀴가 다그락 다그락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캐리어를 놓치지 않으려 손잡이를 꾹 움켜쥔 유정은 평탄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고, 올랐다.
어느 지점까지 오니, 오래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줄을 이었다. 다 비슷해 보이는 주택 중 녹이 슨 녹색 대문 집 앞에 선 유정은 주소를 확인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끼익-.
곧이어 듣기 싫은 쇳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간 유정은 태경과 헤어지기 전 울음을 쏟아 내느라 퉁퉁 부은 눈을 차가운 손등으로 누르며 집 외관을 둘러봤다.
덜컹거리는 창문에 에어캡이 딱 달라붙어 있었고, 현관문은 대문만큼이나 녹이 슬어 있었다. 좁은 마당은 지저분하긴 했지만 그래도 공간이 있다는 자체만큼은 괜찮았다.
월셋집이긴 하지만, 집이 쫄딱 망하고 단칸방에 살았을 때를 생각하면 굉장히 살기 좋아 보였다. 가족들이 다시 한국에 자리 잡고 나서 처음 한국에 들어온 터라 집을 처음 본 유정은 내심 안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유정이 왔구나.”
유정의 엄마, 차영이 반갑게 맞으며 유정의 캐리어를 받아 갔다. 아프다던 게 정말인지 핼쑥한 차영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심란해진 유정은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와 포옹했다.
몸이 뻣뻣해지리만큼 어색했다. 그런데 익숙한 엄마 냄새와 부드러운 품에, 묵혀 놨던 그리움을 느낀 유정은 뭉클함을 삼키며 웃었다.
차영이 유정을 보며 따라 웃었다.
“배고프지? 밥해 놨으니까 얼른 먹자.”
차영을 따라 주방으로 가던 유정은 열린 방문 사이로 오빠, 진기가 헤드셋을 낀 채 게임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오빠 바쁘다면서?”
“새로 일 구했는데 며칠 뒤부터 나오라고 했대.”
차영은 식탁에 앉은 유정에게 밥을 퍼 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의 왜소한 어깨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유정이 밥을 한술 뜨기도 전에 차영에게 안부를 물었다.
“몸은 좀 어때?”
“좀만 서 있으면 픽픽 쓰러져. 그래도 유정이 네가 와서 다행이지.”
차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하다가 유정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제 한국 아주 온 거지?”
“……아직 안 정해졌어.”
유정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내심 한국에 있으라고 말하고 싶던 차영은 유정이 수저를 들자,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에 엄마가 해 준 밥을 먹는데도 유정은 생각에 잠겨 있느라 맛을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일을 끝마치고 돌아와도 또 어디로 갈지 몰랐다. 세계 각국을 옮겨 다니니 예측 불가였다.
그러면, 그때 돼서는 또 어떻게 되는 거지?
“오랜만에 엄마가 해 준 밥 먹어서 좋지?”
“어? 아, 응. 당연하지.”
차영의 물음에 유정은 잠시 생각을 접고 국을 한술 떴다.
* * *
방 안의 구성 요소들은 전부 고루했다.
우글우글 일어난 벽지, 노란색 장판, 낡아 빠진 데다 어설퍼 보이는 레이스 커튼, 얇은 합판으로 만든 침대, 먼지로 얼룩진 책상, 어두침침한 형광등 조명. 한 자리에서 고개만 몇 번 돌려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유정은 짐 가방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로 엉거주춤 책상 의자에 앉았다. 멀뚱멀뚱한 눈이 하릴없이 방 안을 떠돌았다. 남의 집을 보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일단 한국에 돌아온 것부터 아직 실감이 안 났으니까.
내일이라도 마카오의 단칸방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존재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막상 집 안에 들어오니, 복잡한 감정이었다.
하루빨리 적응해야지. 유정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짐 가방을 열어 펼쳤다. 짐이라는 표현조차 민망한 수준의 옷과 소지품을 꺼내 하나하나 정리를 시작했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속옷을 서랍에 막 넣었을 무렵이었다. 대충 네, 하고 대답을 하자 차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걸을 때마다 기계식 주름 스커트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유정의 물품이 자리 잡은 곳들을 훑어보며 침대에 걸터앉은 차영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가족이 다 모이니까 좋다. 북적북적하고.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아. 그치?”
그 말이 유정은 다행이기도 하고 꺼림칙하기도 했다. 가세가 바닥에 처박히며 반지하 월세방도 감지덕지한 상황에 모친은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숨만 쉬어도 법석을 떨기 일쑤였다. 좁은 집에 셋이나 옹기종기 붙어사니 땀띠 나겠다며. 모든 대화의 끝은 돈으로 귀결됐다.
그래도 세월이 지났다고, 이제는 안정을 찾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집도 그때보다는 좋으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일만 한 보람이 있었다.
“응. 사람 사는 거 같아.”
대답하면서도 그 말이 뼈에 사무쳤다. 오직 돈을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마카오에서 보낸 시간이 묵언 수행과 같았다. 출근과 퇴근만이 반복되는 삶. 휴일마저 아르바이트에 매달리고. 퇴근 후에는 아무도 없는 단칸방의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여름에도 추웠고, 겨울에는 시렸다.
어떨 때는 말을 하루에 세 마디만 해도 많이 한 축이었다. 급기야는 너무 외로워서 일기장에 이름을 지어 주고, 대화 형식의 일기를 매일 썼다. 그것마저도 나중에는 허탈감이 밀려와 그만두었는데. 혼자만 쓸쓸함에 휩싸였던 게 아니었다는 점에 위안이 되었다.
“이제 어쩔 거야? 마냥 놀 순 없을 거고. 계획은 있지?”
“아직 일할 생각 없는데…….”
그동안 오직 돈만 보고 달려왔다. 평범하게라도 살기 위해서.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보름 정도. 아니면 한 달? 그 정도 보상은 받아도 되지 않을까. 유정이 나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차영의 눈빛이 일순 차갑게 굳어졌다.
“모아 놓은 돈은 있는 거야?”
“내가 돈이 어디 있어. 벌어서 다 엄마한테 부쳤잖아.”
유정은 책꽂이에 책을 꽂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