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엄마 일어났어. 병원에서 내일 퇴원하래.]
최악은 면했다. 유정은 핸드폰을 꽉, 껴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함이 가라앉자,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 끝에 진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왜.
모친의 뒤치다꺼리에 신물이 났는지, 퍽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전화 받는 예의가 이전과 한 치의 다름도 없었다. 유정은 아직 시작도 못 한 질문을 앞두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불끈거리는 관자놀이의 혈관을 엄지로 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엄마 어디가 편찮으신 거냐고.”
-나 다니는 회사에 문제가 좀 있어. 엄만 충격받고 쓰러진 거고.
“……무슨 문제?”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진기의 고심하는 듯한 숨소리를 들으며 유정은 바짝 긴장했다. 솔직히 진기가 회사 생활을 하는 것부터 못 미더운 일이었다.
이윽고 내키지 않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냥 직장 내 트러블이야. 사장한테 몇 대 맞았어.
“뭐? 그게 말이 돼?”
-아무튼 엄마 빈혈도 있다 하고, 당분간 누가 옆에 있어 줘야 할 거 같은데 난 바쁘다고.
진기는 자세한 설명을 꺼리는 눈치였다. 오히려 이참에 그녀를 불러들일 작정인지 윽박을 질렀다.
-너 이제 그냥 한국 들어오면 안 되냐? 여기도 일자리 많잖아!
유정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건 오히려 그녀였다. 가족들은 말렸고. 그런데 어째서?
-왜 대답이 없어! 야, 씹냐?
진기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험악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장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이내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끊어 봐. 엄마가 나 찾는다.
그대로 통화가 종료됐다. 유정은 입술을 뜯으며 욕실 거울을 응시했다.
뭘 망설이는 걸까?
한국에 가는 편이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었다. 그동안 바라던 일이기도 했고, 태경도 전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해질 테고.
유정의 여린 어깨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 결심한 듯이 일어나는 얼굴에는 결연함까지 엿보였다.
어느새 태경이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응시했다.
“태경 씨.”
“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면 말을 꺼내기가 더 수월해야 하는데, 어쩐지 높은 장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답답한 나머지 유정은 스카프를 끌어 내리며 입을 열었다.
“저…… 다 알아요. 태경 씨 멀리 가야 하는 거.”
“…….”
“저 때문에 안 가려고 하는 거죠?”
그 말에 태경이 길쭉한 눈매를 더 늘어뜨렸다.
“전에도 느낀 건데.”
“…….”
“유정 씨는 성가신 말이나 하는 게 더 좋겠어요.”
그가 음험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다정한 목소리였는데,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유정의 무른 심장을 바늘처럼 콕콕 찔러 왔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팔이 저렸다.
“두고 떠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든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옆에 있으라든가.”
“…….”
“아무 힘도 없는 협박질이나 하는 거요.”
분명 무언가에 화가 난 것 같은데, 전혀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날 위한 거라는 말 같은 건 하지 마요.”
태경은 그저 피식 웃었다. 차라리 화를 냈더라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더는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유정은 고개를 떨구며 겨우 말을 이었다.
“한국에…….”
목이 막혔다. 침을 삼켜 말라붙은 목구멍을 적셨다.
“한국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엄마가…… 편찮으세요.”
유정이 떨리는 손으로 무작정 핸드폰을 켜서, 진기의 메시지를 찾아 화면에 띄워 건넸다. 태경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그걸 받아 들었다. 핸드폰 액정 불빛이 고인 검은자위가 거침없이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게 보였다.
“태경 씨가 저를 두고 가는 게 아니에요. 저는 어차피 한국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가세요.”
“……일이 얼마나 걸릴 줄 알고.”
무덤덤한 말투로 말하던 그의 동공이 쓱, 위로 올라왔다.
“……기다릴게요. 기다릴 수 있어요.”
유정은 절실하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물방울이 스러지듯 금방 사라져 버려서, 잘못 보았다는 의혹마저 들었다.
* * *
강준우는 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갔다가 거실로 와서 앉은 서유정을 관찰했다. 해맑은 얼굴로 머랭 과자를 손에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의심스러웠다.
이른 아침. 주태경이 작전 투입 일정을 물었다. 직접적으로 말만 안 했지, 그건 합류하겠다는 통보였다. 시일이 임박해, 주태경이 없더라도 작전에 착수하려고 했는데. 그가 웬만해서 마음을 바꿀 작자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혔냐는 말이지. 아무리 봐도 서유정이 설득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데. 그랬다면 이렇게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능한가?
심지어 유정은 태평하게 머랭 과자 한 조각을 권해 왔다. 이게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중이냐고. 준우는 꺼림칙한 심정을 감추고 과자를 받아 들었다.
머랭이 많이 달지도 않고 맛있다는 둥, 커피랑 먹으면 금상첨화겠다는 둥 시답잖은 이야기나 주고받던 중이었다. 갑자기 유정이 핵폭탄을 투하한 것은.
“저 한국으로 가게 됐어요.”
준우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럼 주태경은 어쩌고? 그 걱정부터 먼저 들었다.
“진짜요? 아주 가시는 겁니까?”
사실 제일 궁금한 부분은 주태경이 허락했냐는 건데. 유정의 평온한 표정으로 보자면 그 일로 의견 차이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엄마가 편찮으셔서 잠깐 가는 거예요. 좀 길어질 수도 있고…….”
유정도 잠깐이 얼마큼인지는 장담할 수 없어, 안색이 어두웠다. 준우는 그녀의 걱정이 작전의 기간 때문인 줄로 알아,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우린 금방 끝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작전이 끝난 뒤에도 유정 씨가 한국에 계시면 놀러 갈게요. 선배한텐 비밀입니다?”
준우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유정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국인이 한국에 놀러 온다고 말하는 상황이 좀 재밌네요.”
“그러게요. 저도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요양 병원에 계신데. 아무래도 자주 갈 수가 없어서 전화로 안부만 주고받거든요.”
이렇게 아무 걱정 없는 거처럼 보이는 준우에게도 나름의 사정이란 게 있다니. 유정은 안쓰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형제는 없어요? 저는 오빠가 한 명 있거든요.”
“전 외동입니다. 그렇게 안 보이죠?”
“네. 형제가 있는 줄 알았어요. 형이나 남동생?”
준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낄낄거렸다. 칭찬으로 알겠다는 말도 했다. 그러다가 가만히 있던 에이든을 턱짓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쟤는 위아래로 형제가 둘이래요. 완전 안 어울리죠?”
한국어를 모르는데도 에이든은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준우는 능숙하게 시치미를 뗐다. 유정도 덩달아 어색하게 미소를 꾸며 냈다. 어쩐지 에이든을 속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그때, 아치형 현관문이 열리며 태경이 들어왔다.
“왔어요?”
준우는 쪼르르 달려가는 유정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과자와 쿠션까지 내팽개치고 달려갈 정도로 주태경을 좋아한다는 게,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 * *
어스름한 새벽. 잠에서 깬 유정이 눈을 천천히 떴다. 푸른 빛이 가득한 방 안을 둘러보다가 옆을 쳐다보니 잠든 태경이 있었다.
새카만 속눈썹 때문에 눈매가 더 길어 보이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며칠 이상 떨어져 있던 적은 그가 몸을 회복하고 나서 동료들을 보러 갔던 때 말고 없었다. 그래서 그럴까. 떠나는 날이 오늘인데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와 떨어져 지내는 나날이.
유정은 팔을 느리게 뻗어 태경의 단단한 어깨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 애잔한 손짓에 감은 두 눈이 천천히 뜨이더니 곧 시선이 얽혀 들었다.
이윽고 태경은 유정의 허리를 감싸 안아 끌어당겼다. 곧은 입매가 벌어지며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목걸이는 빼놓지 마요. 그래야 내가 유정 씨 어딨는지 알 수 있으니까.”
눈썹을 휘며 그의 말뜻을 생각해 보던 유정이 그의 품에 박힌 얼굴을 위로 들었다.
“혹시 위치 추적기 같은 게 이 목걸이에 있는 거예요?”
아, 그래서 전에도 목걸이 계속 하고 있으라고 했구나. 그 뒤에 납치당했을 때도 바로 왔었고.
목걸이의 숨겨진 기능을 이제야 알게 된 유정이 그의 턱 끝을 올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말도 안 해 주고.”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예고하는 거 같아서. 걱정할까 봐요.”
“위치 추적기를 위한 땜빵이었군요. 목걸이는.”
유정이 투정 부리듯 말하자 그녀를 안은 태경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아니고.”
단호한 부정에 작게 웃음을 터뜨린 유정이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코끝에 닿는 단단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좋아 얼굴을 비비자, 그가 커다란 몸을 기울이며 그녀를 감쌌다.
“일 정리되면 데리러 갈게요.”
뜨거울 정도로 따듯하고 안락한 품이었다.
유정은 대답 대신 눈을 살포시 감고, 그의 가슴에 입술을 댔다.
한국으로 데리러 온다는 그의 말에도, 어쩐지 떨어지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